: 영원회귀
세계를 닫는 장치를 끝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하며 살던 시간들.
실은 그제야 겨우 움직일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 줄도 모르고.
끝은 언제나 멀리 있다고 느껴졌다. 시작의 근처에 있을 때는 끝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가지 않아 막연하게 두려우면서도 늘 곁에 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쉽게 무너져버릴 것만 같아 의도적으로 밀어내고 그렇게 치우고 또 치우는 사이, 정작 진짜로 무언가 끝났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리지 않았던 얼굴로 나타나고는 했다.
끝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생각이라는 것이 생긴 뒤였는지, 무언가를 해냈다고 느낀 다음이었는지, 어쩌면 이미 처음부터 몸이 먼저 알고 있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도 하루를 살아낸다는 점이다. 이해하려 애쓰고, 이해받기를 원하지만, 오해가 남아 있더라도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맞이해야 한다. 그렇게 지나간 장면들은 대개 한참 뒤에야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끝을 실패처럼 여기는 동안 우리는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그 탓에 우리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 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멈추지 않기 위해 애쓴다. 스스로를 무리하게 태워버리면서까지 늘린 시간은 꺼지지 않게만 지키던 촛불과 닮아 있었다. 빛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빛 아래 보이는 것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작은 그림자였다.
모든 것이 계속될 수 있다면 선택은 힘을 잃는다. 머무름과 떠남의 차이가 흐려지고 나면 사랑과 방관의 관계도 서로 선을 넘나 든다. 무엇이든, 언제든 이어질 수 있다면 붙잡을 이유 또한 사라지고 만다. 영원은 신의 특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전체가 멈추지 않는 상태에 동시에 도달했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애착과 고통이 하나로 묶여 손을 뻗을 이유조차 사라져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의 구분이 흐려진 자리에서 사랑도 간절해지지 않는다. 이 세계가 유한하다는 사실은 잔혹함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 가능해지기 위해 끝이 있다는 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했을 뿐이다.
끝에서는 잃었다는 두려움과 그리움 역시 같은 선상에 서 있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은 상실 그 자체만으로 결핍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것을 붙들 수 있었다면 누구도 제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지나온 장면들이 한 겹도 빠짐없이 남아 있었다면 그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이 세계는 지나치게 정교해서 반드시 비워져야 할 순간들을 이미 포함한 채로 굴러간다. 그 지워진 자리 안에 스민 그리움은 지날수록 미화되고, 그러다 잊히고, 그렇게 견디다 내 손으로 놓아버리고,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어쩌면 전부 선택일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유독 다시 반복되는 장면들이 있다. 도저히 운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나친 사건의 반복과 자주 마주치는 패턴들. 단순히 우연이라 부르거나 징크스라 말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무엇에 더 반응하는지 쌓인 것들에 의해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주파수로 굳어진 것이다.
끝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고, 준비했다고 해서 늦춰지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나에 의해서 내게 찾아온다. 이 불가항력 앞에서 결과의 의미는 빠르게 빛을 잃는다. 한때 성공이라 불렸던 것들은 다음 장면의 배경으로 밀려나고, 실패라 불렸던 순간들 역시 또 다른 가능성의 이름을 기다릴 뿐이다. 흔히 실패 다음이 성공이라고 착각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서로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임의로 매겨놓은 결론의 다른 호칭에 불과하다. 그 어떤 결과도 삶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끝에 다다라서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늘 결과를 향해 서두른다. 당장의 평가를 위해, 쓸모를 잃을 기준을 위해 그 안에 자신을 맞춰 끼운다. 삶이 자주 무거워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모두가 언젠가 끝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끝을 향해 살아가는 방식만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끝도 삶의 일부일 뿐인데 그조차 결론을 짓고 싶어 하는 욕망이 커진다. 정작 끝에 가서 더 간절해지는 것은 내가 무엇을 이뤘는지 보다, 아직 끝내 보고 싶은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결국 타인으로부터 정해지는 결과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내가 만들어낸 과정만이 내게 의미를 가진다.
성공과 실패처럼 끝과 시작 또한 그 둘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끝이 났다고 느낀 순간 그 앞에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 마주하게 되고, 시작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장면에 이름을 붙이고 제자리를 얻는다. 늘 무언가 떠나보낸 후에야 지나온 시간들을 헤아려본다. 손에 쥔 것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졌던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제야 삶이 직선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끝은 새로운 방향으로 다시 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과거로 기울지, 아직 오지 않은 쪽으로 열릴지는 내가 얼마나 후회를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게 다시 익숙한 국면 앞에 서게 될 때 즈음, 그때가 시작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한다.
영혼을 무한이라 부를 수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지 않는 것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 닿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유한함을 입는다. 시간을 배우기에 몸을 얻었다. 아픔을 느끼기에 몸에 집착한다. 안정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붙들다 결국 신의 형상조차 굳혀버렸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진짜 영원함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어디에든 닿을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으며, 느끼는 모든 감각이 닳아 없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전지전능한 자리를 꿈꾸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신의 얼굴 앞에서는 그저 평온하다. 신은 흔들리지 않기에 우리를 다치게 하지 않지만 바라는만큼의 생생한 삶을 건네주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라질 것들에 유난히 더 마음을 두고, 언젠가 잃게 될 감각과 사랑 앞에서 자주 울게 되는 이유는 모두가 이 기억에 끝이 있음을 알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완성하려는 욕망은 결국 끝을 두려워하는 공포에서부터 비롯된다. 완성작에는 불안이 섞여 있다. 이미 완성되었기에 더는 손댈 수 없다는 긴장감과 언젠가 훼손될 가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때로 삶은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 다시 돌아오는 일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돌아보면 보는 장면은 분명하게 달라졌지만 늘 같은 것을 되묻는다. 다만 답은 매번 같지 않다. 돌고 도는 흐름 속에서 어떤 날에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떤 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 있기도 하다. 시계는 늘 같은 원을 그리며 12를 지나 다시 1로 돌아온다. 시작일까, 끝일까. 어떤 하루를 살았을까, 그리고 어떤 하루를 살까.
모든 것이 흐르고 지는 유한함 속에서만 피어나는 사랑 덕분에, 우리는 삶을 조금 더 낭만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모순 속에 서 있다. 두려움은 머물러야 하는 강박 속에서 생겨난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만이 어쩌면 영원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떠남이 남기는 흔적은 다음 시간을 불러오고, 빈자리는 다시금 무언가로 채워질 것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다. 끝이 아니기에 시간이 맞닿으면 언젠가 다시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떠난 것들을 끝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