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九)

: 푸른 잔여

by 유영

문득, 스물아홉이라는 숫자를 입 안에서 굴리다 둥글게 말린 소리 사이에 날카롭게 돋친 가시를 느꼈다. 둥근 입 속에 숨을 머금은 채,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끝만 날카롭게 휘어 있는 갈고리였다. 삼키려는 순간 그 끝이 목 안을 향해 걸려들었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무엇 하나 온전히 잡을 수도 없는 빈 고리에 걸려든 건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이전의 이름을 완전히 벗지 못했는데 잡은 적 없는 그림자는 이미 나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렇게 불안할 수 없었다. 무언가 바뀔 것 같아서,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까 봐.


그림자에 손을 담가보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감촉이 손 끝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봄의 새벽 공기라고 불렀다. 모든 것이 애매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시간이다. 엷은 밤과 주저되는 아침 사이에서 발밑에 어둠을 깔고 빛의 기척이 맺혀 있는 이슬을 눈에 담는다. 공중에 매달린 빛은 어디에도 완전히 내려앉지 못한 채 차갑게 번져가고 있었다. 서늘하다. 너무 서늘해서 어디로 스며들지 몰라 오래도록 눈을 감지 못했다.


괜히 심장이 이유 없이 뛰다가도 이내 잦아드는 순간이 반복된다. 막연하게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공허한 희망만이 또렷하다.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여전히 사소한 장면 앞에서는 낡은 기억 속으로 미끄러지듯 파고 들어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기대인지 불안인지 가르려는 손짓은 그 둘을 섞어 서로를 덮어버리고 하나의 흐릿한 색이 되었다. 그것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아무 뜻 없는 납작한 의미라도 붙여야 마음이 편하다. 감정이 평평해야 평온이 찾아오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의미라도 그 의미를 붙여야 한다. 무엇을 이루었을까, 무엇을 얻었을까. 붙잡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허공을 쥔 모양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껴안았다.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데 이제는 멈춰야 할 시간인 건지 누구도 명확히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책임 없는 말이라도 속삭여주기를 바라지만 그 안에는 기한이 없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날짜를 헤아린다. 달력의 가장자리를 자꾸만 매만진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아홉의 끝이 아직 목 안에 남아 있는 듯, 사라지지 않는 잔여가 마음을 스치는 것이다.


숫자가 한 칸 올라갈 때마다 그림자는 조금씩 짙어져 갔다. 어깨를 누르는 무게를 원하지 않는다 말하면서도 그 무게가 있어야 내 존재가 선명해질 것만 같은 느낌에 걸음을 독촉한다. 끝일지 시작일지 아무도 모르는 저 앞에 있는 안정이라 적힌 문에 다가서기 위해, 바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 흔들리는 다리 위에 서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같은 숫자 속에는 이르다와 늦었다가 공존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어쩔 수 없다. 그 당연한 숫자조차도 삶의 성적표로 매겨지는 세상 속에서 자라왔기에 나는 늘 내 이름이 놓일 칸을 먼저 떠올렸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숫자에도 의미를 덧붙인다. 그리고는 둥근 모양 하나를 마치 계단처럼 세워 두고서, 올라서지 못한 이의 등을 은근히 밀어 올린다.

끝이 어디인지 적혀 있지 않은 층계를 오르며 숨이 가빠졌다. 스물에도, 스물셋에도, 스물다섯과 스물일곱에도 깔깔한 공기가 목을 스쳤다. 한 칸 위에 서면 잠시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발을 옮길 때마다 다시 기우는 바닥의 모양새를 보며, 과연 이 계단에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불안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 계단을 본 순간부터 이미 발밑에 깔려 있던 미세한 경사였던 것이다. 더 오른다고 해서 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이 기울기를 적으로 삼을 이유가 있을까.


도시는 여전히 잠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이미 탈피를 마친 듯한 몸들이 빛 속으로 서둘러 걸어 나갔다. 비교는 애써 고개를 돌려도 결국 다시 나를 향했다. 묻고 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무엇하나 선명하게 답할 수 없었다. 조용한 새벽의 공기 속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안도처럼 내려앉는다.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잠시라도 형태를 갖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다. 하지만 새벽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는 낮을 동경하고, 누군가는 빛을 피하는 현실 속에서도 밝음은 공평하게 쏟아진다. 그 아래 숨을 수 있는 그림자만이 다를 뿐이다.

아무도 해가 뜨는 일에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마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준비되지 않은 아침은 유난히 눈부시다. 너무 밝아서,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찾을 수 없다.


환영할 수 없는 아침은 늘 먼저 와 있었다. 창문을 밀고 들어오는 빛은 내게 준비를 묻지 않는다. 언젠가 이 눈부심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을까, 평온한 얼굴로 맞이할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공평하게 떠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나는 여전히 미숙하다. 늘어나는 선택만큼 책임도 따라붙는다. 가벼워지고 싶다 말하면서도 더 무거워지고 싶어 하는 모순 속에서 나는 아마도, 더 짙게 나를 남기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나의 끝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완성은 애초에 목적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빛을 완전히 견디지 않아도 되겠다는 감정이 일렁인다. 완전히 감지 않아도, 뜨지 않아도 전부 상관없는 일이었다. 반쯤 열린 눈으로도 그 틈으로 선명히 보이는 게 빛이다.


늘 그렇듯 해는 떠오를 것이고, 새벽은 물러날 것이다. 밤은 다시 돌아오고, 계단은 여전히 위를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어제와는 다르다.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같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다시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과 설렘, 기대와 두려움, 사랑과 그리움은 한 몸처럼 엉켜있다. 어느 하나만 떼어내려 할수록 더 단단히 묶이는 것들이다. 빛을 맞이하는 자세처럼 그것들을 애써 나누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늦게서야 따라붙는다.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에 잠시 멈춰 선 이 시간, 점점 얕아지는 숨이 아래에 고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짙은 푸른색이 마르지 않은 하늘 아래, 갈고리처럼 휘어진 숫자를 혀끝에 걸어 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직 삼키지 못한 것들이 입 안에서 천천히 녹아 이 새벽의 공기와 뒤섞였다. 미련일까.

사랑은 떠난 뒤에야 제 이름을 갖는다. 그리움이 남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점점 그리워할 것들만 늘어간다. 지나가기도 전에 그리워지는 시간이라니. 지금 이 순간마저도 언젠가는 그리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사랑 한가운데에 서 있는 셈이 되려나.

미지근해진 숨이 폐 아래로 가라앉는다. 어디로도 흩어지지 못한 새벽이 내 안에 고여 있다. 해가 떠도, 이 푸른 잔여는 한동안 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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