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탐닉하는 인간의 그림자
고통은 전시되면 멈추고, 살아내면 명작이 된다.
흔히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삶이란 결국 각자의 서사를 쌓아가는 일.
그 서사 안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비극.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밝고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다.
영원히 행복하기만 한 인생은 현실에서도 찾기 어렵고, 작품 속에서조차 그리 진실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불행이 깃든 이야기는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불행에 더 강하게 감정이 이입된다.
왜 그럴까.
가난과 폭력, 배신과 상실, 그 안에서 늘 행해지는 허무한 사랑과 끝없는 고통이 담긴 이야기들.
왜 그러한 이야기들은 때로는 시대를 넘어 명작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지는가.
현실로 겪으면 모두 지옥일 그 서사가, 왜 작품 속으로만 들어가면 예술이 되는가.
"고통과 괴로움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 쇼펜하우어
그 답은 어쩌면, 비극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에 닿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행복은 순간적이고 찰나 같다. 그 자체로 온전히 설명되기도 어렵다.
때문에 늘 의심부터 한다. 진짜일까. 얼마나 갈까. 곧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하지만 그러한 마음이 스치더라도, 결국 행복은 긴장을 오래 붙잡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이 쉽게 잊히고 만다.
그러나 불행은 다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통은 늘 진실하다. 아픔은 단번에 피부에 닿아 나를 현실로 끌어내린다.
어쩌면 삶의 진짜 모습은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안도감. 그래서 비극은 진실에 더 가까워 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영원히 회자되는 건 결국 그들의 죽음이었지, 그들의 행복이 아니었다.
고흐의 푸르고 쓸쓸한 붓자국, 베토벤의 침묵 위에 쌓아 올린 교향곡, 니체의 고통 위에 새겨진 고독한 문장.
그 비극 속엔 삶의 본질이 담긴 것만 같아 사람들은 숨죽이고 자꾸만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완벽한 행복은 가짜 같지만, 완벽한 불행은 이상하리만큼 설득력이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극을 경배하고, 불행을 탐닉하는 사람들.
본디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며 연민을 깨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된 비극은 그 연민을 흐리게 하고,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느긋이 감상하는 가학적 마음을 키워버린다.
불행은 예술로 넘어오면 감히 관람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이 된다. 작품 속 지옥은 나를 삼키지 않는다. 때문에 안전하다.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될 타인의 지옥을, 안전한 지옥쯤으로 치부하며 가볍게 들여다보고서는, 내 삶이 그나마 나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나는 아직 그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구나. 하는 얄팍한 우월감.
결국 비극이 예술이 되는 건, 그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사는 나를 대신해 고통을 연기해 주고, 때로는 내가 흘리지 못한 눈물까지 대신 흘려준다.
나는 그저 고고하게 작품을 감상하며, 교양을 쌓는다는 착각 속에만 빠져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품 속 가난과 폭력, 배신과 파멸을 사랑한다.
그 지옥은 그저 잠시 구경하고 떠날 연극에 불과한, 극 속 등장인물의 재밌는 불행일 뿐. 어차피 나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이 심리를 너무 잘 알았다. 고통과 불행이 본능적으로 사람의 시선을 끈다는 것을.
자본주의에서 주목은 곧, 돈이다.
불행을 팔아먹는 미디어, 슬픔을 감정의 상품으로 바꾸는 SNS, 고통을 문학으로 포장한 출판물까지.
우리는 그 모든 상업적 비극을 소비하며 가끔은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착각에 젖기도 한다.
그러한 비극은 감각적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의미 있어 보이지만 사실 남는 건 없다.
오히려 또 다른 비극을 찾게 만든다. 마치 중독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밑도 끝도 없는 가난, 폭력, 중독, 비극적 사랑.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을 그 지옥 같은 서사를, 억지로 덧칠하고 부풀려 전시하기만 한다면 그건 그냥 고통을 팔아먹는 상업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이 아니다.
예술이 되는 건, 그 안에 삶이 있는 비극이다.
"왜?"가 들어 있는 비극. 난 원래 불행한 사람이라며 단정 짓는 것이 아닌, 내가 왜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를 묻게 만드는 비극이어야 한다.
비극은 삶의 본질을 묻게 만든다. 행복은 질문할 이유가 없지만, 불행은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더 오래 가슴에 남는다. 날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명작은 대부분 비극을 품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감정의 빚을 지고, 그 작품을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과 괴로움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쇼펜하우어는 그 고통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며, 삶이란 고난과 결핍으로 점철된 여정이라 말했다.
하지만 "날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만든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그 고통은 단지 짐이 아닌, 인간을 성장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모습은, 그 비극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언어로 세상을 살아낸 고흐, 베토벤, 니체와 같은 이들의 삶이 아닐까. 고통에 스스로를 가두고 연민에 젖어들기만 하는 것이 아닌, 그 고통을 마주하며 삶을 새겨내는 것.
명작은 단순히 고통을 전시하지 않는다.
비극을 넘어 질문을 남기고, 그 질문으로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한다.
고통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 단순히 고통 그 자체만을 즐기는 예술은 성장이 아니라 멈춤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삶의 중심으로 삼아, 견디는 힘이 아닌 전시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불행을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불행도 살아내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비극이 아니라 삶이 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