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질문하지 않는 인간이 만든다.

나는 묻는다. 고로 존재한다.

by 유영
운명은, 질문을 던진 자만이 바꿀 수 있다.




< 생각은 쓸모없다.

그런데 왜 멈추지 못할까? >


사고의 깊이와 창의적 사유를 외치는 콘텐츠들이 꽤 늘었다. 덕분에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지만, 정작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생각이 뭔지,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 묻는 사람은 드물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사유하고, 점차 생각을 확장해 가는 일.

사실 그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보다 애초에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물리적 시간도, 정서적 여유도 없는 삶 속에서 생각은 사치다. 어차피 돈도 안 되고,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 데다,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정신적인 체력까지 소모되니, 우울에 빠지기도 쉬워 보인다.

아무리 봐도 딱히 중요할 것도 없어 보이고, 남는 것도 없어 보이는 생각을 왜들 그렇게 하라는 건지 납득이 될 만한 이유를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니 다들 굳이 시간까지 써 가며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반대였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생각이 너무 많아 괴로웠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도, 타인도, 세상도 끊임없이 파고들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든 생각이 사유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는 그 자체가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왜 사람들이 그걸 외면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 괴로운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또 다른 질문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데, 내가 하는 이 모든 생각들이 정말 내 것이 맞긴 한 거야?'






< 내 생각이 진짜 내 것이 맞을까? >


사고는 분명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뿌리는 내 안에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보는 풍경, 듣는 언어, 읽은 책, 만난 사람들.

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어디선가 받아들인 정보와 감정 위에 얹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뿐인 하나의 조건화된 인간인 걸까.

그럼 AI 역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답만을 학습했다. 질문을 던지는 학생은 괜히 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쓸데없이 수업 시간만 늘리는 재수 없는 애가 되어 또래의 눈총을 받는다.

답이 없는 말은 삼켜야 하고, 사고는 멈추는 게 효율적이니까.

그로 인해 우리가 하는 생각의 대부분은 자신이 살면서 쌓아온 모든 데이터의 조합이 낳은 하나의 연산 결과일 뿐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내 생각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는 우리가 생각이라 부르던 일의 상당 부분을 AI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정보 결합, 문장 구성, 더 나아가 감정까지 모방하는 AI.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환경, 받은 교육, 맺어진 관계, 사회가 제공한 프레임. 난 결국 그 안에서 사고하고 반응하고 있었다.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해도 사실 그 다름조차 이미 정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일인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게, 우리가 흔히 듣는 사람이 변하려면 먼저 주변 환경을 바꾸고 어울리는 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인간의 사고와 변화 또한 철저히 조건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과연 인간이 정말, 생각하기에 인간인 걸까?


바로 이 모든 것이, 내가 질문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이유다.


질문은 생각의 뿌리다. 질문 없는 생각은 단지 단순한 반응이거나 모방에 가깝다.

의심은 부정으로 이어지고, 부정은 질문을 낳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진짜 내 생각의 문을 연다.


흔히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이고, 생각은 그 답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대부분은 늘 끝을 먼저 바라본다. 그 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와 지나온 길은 모두 잊은 채.

사회는 결과만을 중요시하게 되어버렸다.






< 사기꾼이 판치는 사회, 신을 만드는 대중 >


우리 사회는 결론 없는 이야기를 참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을 답답해한다.

확신하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고, 주저하는 사람을 의심한다. 그래서 세상에 사기꾼들이 그렇게 판을 친다.

왜 그런지는 당장 주위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왜냐고 묻지를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왜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 대부분은 그 부모에게 묻고, 부모는 고민조차 없이 답을 내준다.


질문이 빠진 사고는 방향을 잃고 타인의 기준에 기댄 채 떠밀리듯 흘러가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인 줄 착각하게 되고, 주어진 세계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유독 연예인의 삶에 집착하고, 그저 돈, 돈, 돈만을 외치며 부자를 선망하는 사회가 된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지를 않으니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사는 게 재미가 없으니 자꾸만 남 인생에 관심을 가진다.

타인이 만든 환상을 좇는 일은 부족한 도파민을 채워주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다. 보는 동안에는 내 안의 공허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딱히 질문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회는 맹신을 키운다. 사과가 검은색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자에게 쉽게 권력을 쥐어주고, 신으로 만들어 결국 자신의 인생까지 맡겨 버린다.

이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질문이 없으니 신도를 포섭하는 일은 너무 쉽고, 아무리 뜯어 없애도 잡초처럼 계속 다시 자라난다.


타인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을 망각하게 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질문 없는 곳에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왜냐면 진실은 늘 의심 속에서 발견되고, 품은 의심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실도 과연 절대 불변의 영원한 진실일까?






< 나는 묻는다. 고로 존재한다. >


질문은 완성되지 않고, 완성될 수 없다. 하나의 명제로 닫히지 않고 언제나 열려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열린 상태는 불안함을 수반한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내 스스로 알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제 내 존재 자체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질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세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다시 묻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도 매번 다르게 구성된다.

나도, 삶도, 질문도 전부 고정된 것들이 아니기에 내가 질문을 하는 한 나 역시 계속해서 바뀌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AI에게 더 완벽한 답을 얻기 위해 질문지조차 강박적으로 답처럼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질문이란 건 정리될 필요도, 명확할 필요도 없다는 것.

정리되지 않은 뒤죽박죽의 엉터리 질문들이 때로는 시대를 초월해 타인을 이해하게 만들고, 아주 아주 사소한 장면 속에서 뜻밖의 나만의 해답을 건져 올리게도 만든다.


결국 그 모든 건 나를 이해하고, 붙잡고, 살아 있게 만드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는 남들보다 늦게 도착할지언정 한 번 도착하면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고 가장 오래 버틴다.

때문에 나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질문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어차피 정답은 나중의 일이다.

정답이 먼저 주어지는 삶은 내가 살아 있는 삶도 아니거니와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원하지 않는다.

생각 없이 살 수는 있어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시간이 갈수록 이 말이 점점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생각은 고통이다. 꿈속에서도 내가 살아 있음을 가장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

생각은 의심이다. 의심은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은 나를 깨어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닫힌 운명을 여는 열쇠가 된다. 답은 미끼일 뿐.

즉, 운명은 존재하지만 사실 그건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존의 모든 정답을 의심하고 바꾸는 것은 외롭고, 고통스럽고, 끝내는 자아마저도 놓아야 하겠지만 그 모든 변화를 껴안고 받아들일 줄 아는 자가 결국 운명을 바꾼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개다.

변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 변하지 않는 인간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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