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

지식의 함정

by 유영
모든 존재는 흔적을 남기려는 본능을 지닌다.




<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 보지 못한 형상,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세계.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창조라 부른다. 그래서 창조는 흔히 천재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신의 재능을 빌린 자들만이 닿을 수 있는 어떤 고결한 결과처럼.


이렇듯 우리가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창조라고 하면 그저 결과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완성된 그림과 음악, 출판된 책 같은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것들만을 창조라 여기기에, 예술가들의 일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물들은 우리 눈앞에 보이기 전까지는 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사실 창조는 인간의 본성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미 창조하는 존재로 지어졌다.


창조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자격이나 직업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가능성.

사업가의 비전, 교사의 설명, 우리의 사소한 선택까지도 들여다보면 전부 창조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가능하다 여기며, 거기에 이름까지 부여하는 용기.

바로 그 지점에서 창조의 싹이 움튼다.


그러나 이 창조적 용기를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이건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재능의 유무가 아니라, 익숙한 나를 떠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믿어온 기준을 의심하고, 내 안에 굳어버린 정의들을 해체하고, 내가 나라고 여겨온 모든 것들을 깨뜨려야 한다. 깨뜨리는 일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따른다.

가장 오래된 자신과의 이별은 가장 견딜 수 없는 일이기에.

하지만 이별은 끝이 아니라, 가장 낯선 나를 처음 마주하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 무지로부터 >


어릴 적 나는 음악을 했다. 모두가 말하길, 다양한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많이. 그래야 귀가 트이고,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강박적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장르까지 억지로 집어넣으며 내 귀와 마음을 넘치게 채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작 내 음악은 멀어졌다.

내 안에 너무 많은 음악이 쌓이자, 도리어 나만의 소리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려 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들었던 남의 음악이었다. 결국 내가 만든 건 그저 모방에 불과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식도, 감각도 한계 용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채운 사람은 생각하지 못한다. 넘치는 지식은 창조를 함에 있어서는 때로 독이 되기도 한다.

지식은 우리를 편하게 해 주지만 동시에 무뎌지게 만든다. 책을 끝없이 읽고 또 읽고, 배운 것 위에 또 배운 것을 덧칠하며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닌 말과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처음에는 새롭고 놀라웠던 것들이 반복되면 나를 무겁게 덮어버린다. 내 것이 아닌 말과 생각들로.


숫자를 배운 다음엔 해답을 찾기보단 문제를 만들어야 하고, 책을 읽은 다음엔 흡수해 쌓아 두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제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을 쌓는 건 시작일 뿐이고,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배운 것을 뒤집고, 어긋나게 조합하고, 나만의 관점으로 다시 해석해 보는 용기.

모든 창조는 그렇게 불편하게 태어난다.


나는 지금도 무지로부터의 창조를 믿는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무지는 무식함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눈을 말한다. 낯선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러니까, 어린아이의 눈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들이 커서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게 하느냐이다."
"라파엘처럼 그리기 위해서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쳤다."

피카소는 모든 어린아이는 예술가라 말하며, 그 본인도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가 갈망했던 것이 어쩌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비움, 순수, 질문.

창조란 세상을 다시 처음처럼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의 용기가 필요하다.

모르는 나를 인정하는 용기. 아는 척하지 않고, 창피해하지 않고, 그저 궁금한 것을 탐구해 보는 마음.

가장 오래된 나의 기준이 아닌, 처음 마주한 세계의 감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






< 허무로부터 >


지난 장에서는 질문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창조다.

그래. 누구나 창조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어떤 감각으로 창조해야 하는지도 알겠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굳이 창조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삶이 재미없어지는 순간, 우리는 점점 살아 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창조는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을 다시 '재밌게' 만든다.

우리 삶의 재미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애초에 의미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으로 살아있는 존재이며, 그 감각을 가장 선명하게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창조에 있다.


많은 이들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만, 아무리 찾아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

당연하다. 삶은 애초에 의미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각 속에서 순간순간 반응하는 유기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삶이 허망하다는 자각은 피할 수 없다. 언제나 끝은 정해져 있고, 우리가 쥐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들이다. 이렇듯 삶은 일장춘몽(一場春夢)에 가깝다. 짧고, 덧없고, 끝내는 허무한.

그러나 그 잠깐의 꿈 안에서 무언가를 궁금해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고, 그것을 실제로 해보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그 감각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창조는 증거가 된다. 우리가 단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


어쩌면 이 창조에 대한 갈망은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종족을 번식시키고, 유전자를 남기려는 본능.

하지만 그건 단지 생명을 복제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의 일부를 세상에 남기려는 충동에 가깝다.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누군가는 작품을 만들고, 누군가는 이름을 남긴다.

형태는 달라도 그 안에는 동일한 욕망이 흐른다. 나는 사라지지만, 내가 만든 것은 남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니까, 창조란 생물학적 번식의 연장선일 수 있다. 단지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과 감정, 기억과 감각을 담은 무언가를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일.

그것이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아이든 상관없다. 모두가 나를 담은 흔적이고, 그 흔적이 세상에 남는다는 사실은 이 덧없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남는 위안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사라질 존재다.

그러나 창조는,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길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그리고 나다운 발자국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창조하기를 바란다.






< 나로부터 >


끝없이 배우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지식은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해체와 재구성의 재료가 된다. AI는 이미 학습과 기억, 조합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은 일은 단 하나.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는 것.


지식은 외울 수 있고, 베낄 수 있지만 질문은 그 사람의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누군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다. 세상에 넘쳐나는 지식은 더 이상 우리에게 생각이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 뒤에는 반드시 사유가 따라온다. 그래서 괴롭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고, 그 위에 현실로 건너갈 다리를 놓는 일. 그것이 창조다.


그래서 묻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틀릴 수 있는 자신을 허락하고,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자는 결국 새로운 세계를 여는 자가 된다.

그 누구도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질문이 오면, 창조는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다.


모든 창조는 쓸모없음을 견디는 능력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쓸모없는 모든 질문과 사유.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말들. 그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가장 위대한 가능성의 씨앗일 수 있다.

이 무용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난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질문하라고. 질문하되, 정답을 찾지 말라고.

그 물음이 어디로 향하든 끝까지 따라가라고.

모든 걸 의심하라고.

그리고 그 의심 속에서 당신만의 세계를 시작하라고.

모든 창조는, 타인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다.

이 당연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식이란 게 얼마나 쉽게 쌓이고, 쉽게 무너지는 허상인지를 알게 된다.


어차피 이 생이 하나의 짧은 꿈이라면, 나는 그 꿈을 직접 그려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늘 그 무수한 가능성 위에 나의 꿈을 얹고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상상한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현실로 데려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아니, 사실 이미 상상한 순간부터 현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글을 보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꿈으로 이 허무를 견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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