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이 AI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언젠가 나의 자리를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기술이라기보다, 그 기술을 누가, 어떻게 쓰느냐이다.
많은 사람들이 AI를 단순 검색엔진으로만 사용한다. 거짓 정보를 주면 틀렸다며 화를 내고, 이것이 화제가 된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사실 지금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검색엔진도 언제든 틀린 정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감각과 판단이다.
우리는 왜,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면서도 질문하지 않을까.
왜, 의심하지 않는 걸까.
맞춤법 검사기를 쓴다고 해서 내가 쓴 글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계산기를 쓴다고 해서 수학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AI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의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학문도 본질을 이해해야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그 속에서 우리가 계속 인간으로 남기 위해 던져야 할 현실적인 질문은 무엇일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AI는 창조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조합하고, 반복할 뿐이다. 창작은 고통에서 온다. 상실과 결핍,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고통이 모방될 수는 있어도 대체될 수는 없다.
지난번, 지브리풍 그림이 AI로 대량 생성되며 논란이 일었다. 원작자는 '역겹다'고 말했고, 많은 이들이 그 말에 공감했으나, 충격적이게도 그 흐름을 가장 거세게 비판하던 다른 예술가들조차 AI를 활용해 그림을 생성하고, 그 결과물을 SNS에 공유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다른 분야의 종사자들이긴 하지만.
거기서 알았다. 이미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중요한 건 그 그림 자체가 아니라 창작의 고통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유통되고 소비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예술가들이 느낀 건 어쩌면 작품의 가치에 대한 분노라기보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희석되어 가는 데 대한 절망에 좀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을 AI가 만든 건인지, 인간이 만든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또 다른 도구의 도움이 아니라 그것을 써본 사람만이 감각적으로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이건 알려고 노력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인다.
사람은 자기 고통을 가장 무겁게 느끼는 존재다. 창작의 고통은 단지 감성적인 작품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고,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남기기 위한 가장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방식이다. 이건 기계가 모방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이 사라진 예술은 어차피 예술이 아니다.
그래서 예술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든든한 파트너를 얻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과 감정이 창작의 출발점이라면, 그 고통을 시각화하거나 형상화하는 작업은 이제 더욱 빠르고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다. 예술가는 더 이상 도구에 얽매이지 않고, 표현의 방식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변화하는 도구에 적응하지 못한 예술가는 조용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기술을 이해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사업가는 절대적으로 살아남는다.
사실 창작자와 사업가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앞서 읽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창조자이다.
하지만 기술을 다룬다고 모두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그 기술 속에 감각과 욕망을 녹여낸 사람만이 시대를 만든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 그가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기술을 잘 만든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욕망, 정체성까지 기술에 녹여낸 사업가였기 때문이다. 기계에 감성과 디자인을 입히고 그걸 브랜드를 넘어 마치 하나의 종교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 애플은 창조를 멈췄다. 멈춘 창조는 그냥 계속 반복될 뿐이다. 창조는 본질적 욕망을 계속해서 탐색할 때 나오지만, 반복은 그 욕망을 유지하려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업가들 대부분은 기존의 욕망을 충족시킨 사람이라기보다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낸 사람에 가깝다.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걸 시스템화시킨 것이다. 예술이 인간 내면의 욕망을 시각화, 청각화, 언어화하는 것이라면, 사업은 인간 외면의 욕망을 형태화, 구조화, 상품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본질은 같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앞으로의 핵심은 기술이라기보다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결핍을 건드리는 직업들이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을 일들이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이해받고 싶은 욕망, 그리고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망.
이 모든 건 여전히 사람에 의해 충족된다.
그중에 특히 주목할 만한 산업은 역시 미용 산업이다.
인간이 다수로 존재하는 한, 미용 산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형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겉모습을 꾸미는 데 집중해 왔다. 화장품, 헤어, 네일 등 모든 것은 외형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AI가 발전하고, 인간이 디지털 세계 속에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될수록 어쩌면 육체의 개념 자체가 흐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얼굴이 아닌, 디지털 속 아바타가 진짜 내가 되는 세계. 지금의 메타버스, VR과는 다른 좀 더 현실적인 또 하나의 세계 말이다. 외모에 갇힌 정체성과 늙는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우리는 언제든 원하는 모습으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말이 너무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혁신은 언제나 처음엔 허무맹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오히려 미용이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런 세상이 와도 미용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해질 것이다. 피부와 머릿결 같은 문제가 아니라 나를 어떤 나로 있게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꾸며왔다. 꾸민다는 건 단순한 욕망의 발현이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내면의 반사와 동시에 사회 속에서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이다.
아니 그런데, 디지털 세상에서까지 꾸밀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게임 속 캐릭터는 스타일을 바꾸고, 피부 톤까지 선택할까. 왜 메타버스 속 집을 꾸미고, SNS에 이미지를 공유할까. 그 이유는 캐릭터가 곧 자기 자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실이 곧 디지털이 될 때 인간은 오히려 더 강박적으로, 더 창의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나설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카메라 어플의 AI 필터에 돈을 쓰고, 유행하는 AI 그림을 만들기 위해 평소 AI에 별 관심 없던 사람들마저 챗GPT를 처음 설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중심에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예쁘다.
둘째, 보여주고 싶다.
만약 그 이미지들이 하나같이 기괴하고 못생겼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시간과 돈을 들였을까?
예쁘다는 것은 단순한 미적 취향을 넘어 인간의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발현된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예쁨이 곧 공유하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만든 이미지의 대부분은 SNS에 올려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미지들의 대부분은 나와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있는 나를 꾸미는 게 아니라 되고 싶은 나를 만들어 낸 욕망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인간은 점점 더 현실의 나를 지우고, 상상 속의 나를 살아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미용은, 그리고 인간을 꾸미는 모든 행위는, 그래서 결국 다른 형태의 외모지상주의는, 어쩌면 절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깊어지는 것이면 몰라도.
그러나 그 안에 보이는 희망이 있다면 외형을 선택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대부분이 평등하게 선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제는 단순히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보여지고 싶은 나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질 것이다. 인간 그 자체의 브랜드화. 누구나 연예인이 되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나 브랜드가 되어야 하는 시대.
앞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극하는 직업이 고소득 분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직업들조차 아마도 그런 곳에서부터 태어나지 않을까 싶다.
사교육, 미용, 연예, 예술, 명품, 전자기기 등 우리가 애써 욕망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 전부 인간의 욕망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결과물이다.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고 싶은 욕망,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타인의 시선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 감정과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 우월감을 통해 자존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 모든 걸 더 빠르고 쉽게 누리고 싶은 욕망.
결국, 욕망을 읽은 자가 시대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세상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건 그런 욕망을 따라가는 다수일 것이다.
AI 시대의 진짜 핵심은 기술이라기보다 본질적으로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질은 항상 결핍을 향해 움직이기에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것보다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 결핍과 욕망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건드릴 수 있는 자만이 미래 사회의 진짜 중심에 설 것이다.
AI는 검색엔진이 아닌 자기 자신이 가진 능력을 더 증폭시켜 주는 도구에 더 가깝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프롬프트를 찾는 것처럼, 어떻게 질문해야 되는지조차 남에게 묻는다. 모든 차이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스스로 본인에게 맞는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하고, 그건 결국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는 자기 삶에 가장 정확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시대를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