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알고도 연기하는 배우처럼
삶이란 무엇일까.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는 이 물음을 아주 오래전부터 품어왔다. 특정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무엇이든 한순간의 정적 뒤에 되돌아보면 늘 그 질문이 남아 있었다. 난 그것을 피해 간 적이 없었다. 단단한 돌처럼 가라앉은 날도 있었고,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물처럼 스쳐 사라진 날도 있었지만 그 어떤 날에도 나는 이 질문을 손에서 완전히 놓은 적이 없었다.
삶은 생각보다 자주 텅 비었다. 해야 할 일들은 빈틈없이 나를 채우고 있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특별히 문제 되는 것은 없었지만, 일정이 끝난 저녁,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느끼는 감정은 도대체 내가 뭘 위해서 이렇게 살아가는 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고. 허무와 허무의 연속. 늘 그렇듯 텅 빈 하루의 끝에는 좋지 않은 생각들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나는 그 허무가 가장 두려웠다. 가장자리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낙원을 찾아 그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내 말이 닿을 자리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 나를 견딜 수 없어 더 많은 일을 벌이고, 더 많은 계획을 세우며 나를 바쁘게 몰아세웠지만, 결국 모든 활동이 끝난 뒤에는 여전히 허무만이 남아 있었다. 가진 후에 느끼는 감정은 충만보다는 허무에 더 가까워진다. 채우고 나면 비고, 이루고 나면 잊히고, 잡고 나면 빠져나간다.
나는 삶이 왜 이렇게 허무한지 알고 싶었다. 삶은 왜 허무하지? 허무는 단지 나약함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일까? 허무하다는 감정 자체가 잘못된 걸까? 아니, 허무가 대체 뭐지?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아주 오래된 결론 하나에 닿았다. 세상 모든 것은, 전부 허상이다. 심지어 나조차도.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고 배웠고, 남보다 더 빨리 이루고, 더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자가 될 거라고.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력했다. 삶의 종착점 앞에서, 우리가 애써 붙잡고자 했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 나는 허무가 나를 덮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부 사라질 것들만을 끌어안고 살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려워서, 보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 했기 때문에. 하지만 내 손에 쥔 모든 것들, 지키고 싶은 모든 것들은 전부 끝내 손에서 빠져나갈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삶은 고통이다.
그런데 그 허무 속에 잠겨 있을 때, 나를 더 혼란스럽게 하던 건 내가 그 고통을 어딘가에서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괴롭고 피하고 싶은 감정임은 틀림없으나, 어느 순간 나는 그 감정 속에 나를 담고 싶어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함과 동시에,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 감정에 잠긴 나 자신의 상태를 더 오래 음미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사랑을 원했다기보다는 사랑에 빠져 있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상처받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슬픔을 느끼고 괴로워하고 싶었다. 이상하다. 고통을 느껴보고 싶다는 감정은 누가 봐도 이상했기에 그 누구에게도 말로 꺼내지 못했다. 겪고 싶지 않으면서도 겪고 싶고, 피하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그 감정이 나를 완성시켜 줄 것만 같아 끌리는 기묘한 기대감.
사랑을 탐하듯, 진짜 고통을 원했다기보다는 고통을 견뎌내는 서사 속의 나를 욕망한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현실을 고통으로, 꿈을 해방으로 정의하지만, 정작 그 구분은 감각의 밀도에서 결정된다. 현실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꿈은 언제나 달콤하다는 이분법은 어쩌면 너무 단순해서 믿기지 않는다.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 삶도 누군가의 꿈일 수 있고, 그 꿈조차도 또 다른 꿈의 일부일 수 있다. 자각몽, 유체이탈. 중력을 잊고 공포 없이 세상을 날아다닐 수 있는 경험. 현실과 환상, 고통과 해방의 경계는 얼마나 흐릿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를 진짜라고 부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진짜일 필요는 있는 걸까.
삶은 고통이며, 고통은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자의적이다. 또한 깨달음이란 것이 꼭 수행자나 철학자, 성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길에서 마주친 낯선 멜로디, 글귀 하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 스쳐지나 보냈던 것들 속에 내가 필요로 하던 더 진짜가 숨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처는 먼 산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이가 아니라, 아직 세상의 말을 배우기 전인 어린아이일 수도 있다. 오히려 깨달음을 말하는 자가, 정작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가장 멀어져 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의 깨달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당장 깨닫지 못하는 삶을 불쌍히 여길 이유도 없다. 그리고 깨달음을 베푸는 듯한 시선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볼 이유도 없다. 어리석다 여기는 그의 모습은 지난날, 어딘가의 나의 모습일 수 있으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면, 그 안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허상이라면, 나는 이 안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던 지난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이제와서는 그것들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안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 깊이 새기고 싶어지는 것들이 있다. 진짜는 환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살아내면서 느끼는 것들이다.
전부 꿈이라면 어때.
삶이 꿈이든 현실이든, 허상이든 실상이든, 그것이 분간되지 않을수록 나는 그 감정을 더욱더 또렷하게 느끼고 싶어졌다. 만약 이 삶이 전부 허상이라면 나는 그 허상 위에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새기고 싶다. 그게 슬픔이든, 사랑이든, 고통이든.
어차피 사라질 이야기라면 더 아름답게 사라지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꿈의 막이 내릴 때까지, 거짓인 줄 알면서도 한 장면도 빠짐없이 연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