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느리다는 것을 틀렸다고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어릴 적부터 속도를 경쟁하며 자랐다. 얼마나 빨리 말을 트는지, 누가 먼저 걷기 시작했는지, 누가 더 빨리 문제를 푸는지, 얼마나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했는지와 같은 것들을 비교당하며.
어느 순간부터 속도가 우위의 기준이 되었고, 느린 이들은 시작도 전에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지루함은 피해야 할 무언가였다. 무료한 시간은 시간 낭비, 느린 속도는 낙오라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늘 그렇게 지루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느려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쳐 왔다.
종종 그 지루함 속에서 나는 견딘다는 감정을 느꼈다. 타인의 시선도, 결과에 대한 조급함도 다 놓아버린 그 순간이 어쩌면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빠를수록 좋은 걸까?
사람의 삶은 숫자로 잴 수 없다. 하루에 몇 시간을 일했는지, 얼마를 벌었는지, 몇 개의 목표를 달성했는지. 이런 것들은 결국 삶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안에 무엇을 느꼈고, 어떤 사유가 깃들었는지는 가늠되지 않는다.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너무 당연하다 여겨 쉽게 잊고 살아간다. 모든 자라남에는 햇빛과 물뿐만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도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실 같은 것들 말이다.
급하게 피어난 꽃은 짧게 피고, 깊이 뿌리내린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빠르다고 해서 반드시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래 남는 것들은 대개 느리게 쌓여간다.
삶도 그렇다. 찬란하게 피었다가 금세 스러지는가 하면, 잔잔하게 흘러가다 긴 시간 끝에 그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같은 땅에 있어도, 같은 햇빛을 받아도 피어남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빠르게 타오르는 불꽃이 되고, 또 누군가는 오래도록 남는 물결이 된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걸을 수 없다.
서로의 계절이 다르기에.
그러니 빠르게 타오르는 불꽃이 될 수 있게 태어난 것이 자랑이 될 것도 없다. 나무가 꽃이 될 수 없듯이, 꽃도 나무가 될 수 없다. 꽃이 아름답다고 하여 세상에 꽃만 있을 수는 없다. 세상에 봄만 있을 수도 없다. 봄이 따뜻한 이유도 결국 겨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은 다르고, 그 다름이 서로를 비추어 더욱 아름답다. 지금의 느린 시간도 결국 다가올 무언가를 위한 준비일지 모른다. 다 피지 않았다면, 아직 겨울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피어남은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남의 시간표에 내 삶을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빨리 피는 꽃이든, 늦게 자라는 나무든, 아니면 다른 그 어떤 무엇이든. 속도가 다를 뿐 모두 제 길 위에 있다.
느림은 종종 무능으로 오해받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빠름이 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변화라 불리는 많은 것들은 실은 이미 오랜 시간 안에서 천천히 숙성된 결과였다. 그것이 외부에서 보기엔 갑작스러워 보일 뿐. 속도는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고, 정말 상대적이다. 그래서 늦은 때, 적절한 때라는 것은 각자의 입장에서는 전부 맞는 말이다. 서른의 시작, 3년의 공백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이렇듯 속도가 외부에서 정해진다면, 방향은 언제나 내부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느림은 빠름의 반대라기보다, 깊이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결과보다 과정을 비추는 빛이기에, 삶은 그 느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들 대부분은 아직 증명해야 할 것이 많은 젊은이들이거나, 그런 젊은이들에게 충고하는 기성세대들이다.
권위 중심의 사회는 아직 보장되지 않은, 불확실한 성공을 대가로 젊은 세대에 열정과 청춘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뜨겁게 달려가는 삶도 분명 의미 있다. 문제는 모두가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젊은 날 더 빠르게, 더 높이 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며 살아갈 테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조금은 느리게, 천천히 세상을 경험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의 속도를 눈치 줄 필요가 없다. 각자 원하는 속도로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서로에게 허락할 줄 아는 세상, 그것이 진짜 여유로운 사회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의 풍경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오랜 친구를 만나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서로가 어디까지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우리 그때 그 일 기억나?" 같은 웃음 섞인 장면들이다.
또 어떤 노래는 그 시절의 공기와 함께 지나간 시간을 불러온다.
그냥 그때 함께 걷던 거리,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던 풍경, 예뻤던 노을,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사람.
삶이 버거울 때 떠오르는 기억 대부분은 그런 순간들이다. 별일 없던 일상 속 장면들이 참 이상하리만치 오래 가슴에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사소한 장면들이 모여, 가장 오래도록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느리다. 여전히 자주 멈추고, 그래서 종종 불안하다. 하지만 그 불안의 끝에서 하나의 진실을 마주했다. 느림은 나를 지킨다.
세상은 바쁘고, 시간은 없고, 기회는 지금뿐이라 말한다. 그러한 말들을 뒤로한 채,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은 속도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결과만을 좇다 보면 어느 순간 방향을 잃는다. 다들 하는 말처럼 정말로, 삶은 방향이지 속도가 아니다. 느리게, 단단히 쌓은 것들은 결국 삶의 끝에서 언젠가 흩어진다 해도 그 안에 남은 나만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느림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늦게 도착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쩌면 도착하지 않는다 해도 그 또한 괜찮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내가 누구였는지이기 때문이다.
끝에서 기억 속에 강하게 남는 건 박수 소리보다 그 무대를 향해 걸어갔던 떨리는 걸음이다.
모든 삶은 전부 하나의 예술이다. 시곗바늘이 가리키지 않는 방향을 향할 때, 그 걸음 하나하나가 예술이 된다.
그러니 당신의 느린 걸음도 누군가에겐 오래 기억될 하나의 무대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