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모든 것은 다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아간다.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가 되어야 사랑받았고, 똑똑한 아이여야 칭찬받았다.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품어주는 가족도 있지만, 사실 그 가족한테조차 모두가 공평하게 사랑받으며 자라온 것은 아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를 끝까지 품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나조차도, 온전히 나를 사랑하기가 버겁다. 세상 모두는 다 그 쓸모가 있다고, 이유가 있다고 하는 말들은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하는 까닭을, 그래서 스스로를 붙잡을 수 있는 근거를 계속해서 찾아 헤매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유를 만든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열심히 살고 있고, 원하는 목표도 이루었고, 상처도 극복했고, 이만큼 버티고 살아왔으니 살아 있을 자격이 있다고. 그 모든 말들은 사실상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그러니, 나를 사랑해 줘."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오지도 않고, 오더라도 일시적이다. 인정도, 칭찬도, 내가 상대에게 준 것만큼 그대로 돌아오지는 않는 법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이유를 늘어놓아도, 끝내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순간은 찾아온다. 사람은 그때 무너진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의 이유를 가져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세상 모두는 저마다 그 쓸모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걸까? 나는 반드시 무언가가 되어야만 살아 있어도 되는 사람인 걸까?
삶은 늘 나에게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밝은 사람, 존경받는 사람,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한 사람. 언젠가부터 그 모든 되어야 함이 지치기 시작했다. 마치 끝없는 존재 자격시험처럼 느껴졌다. 내 삶에서 이기고 지는 게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견뎌낸 자리마다 피어나는 나를 지워내고 싶어 했을까. 애초에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그 빈자리를 메우듯 끝없이 의미를 찾지만, 정작 무의미를 받아들이는 일은 외면한다.
나는 한때 우울을 미워했다. 아무 의미 없이 끝없이 의미만을 찾아 헤매다 보면, 그 뒤를 따라 우울이 찾아온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우울을 미워했다. 따지고 보면 이유는 있었지만 그 이유가 내 이유인지도 헷갈렸다. 쓸모가 없다면 없는 대로 이유를 찾았고, 쓸모가 있다면 있는 대로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애썼다. 피하려 해도 더 짙게 따라붙는 것은 감정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모든 무의미를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꽤 오랫동안 진짜 감정을 숨기며 살았다. 어릴 때는 보다 솔직했다. 슬프면 울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말들은 점점 불편한 것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내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부담스러워하며 피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무거운 감정을 감당하는 게 버거워졌다. 감정의 짐을 가까운 타인에게 지운다는 것은 고스란히 그에게 나를 집어넣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살아온 시간만큼 그 무게도 점점 커져갔으니 나도 점점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내 나름의 배려였다.
자라날수록 다들 가면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긍정적인 사람,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 그 겉모습은 마치 남들이 보기에 좋은, 예쁘게 다듬어진 불행을 닮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경계해 왔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그 가면이 내게 방패가 되어준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고, 나쁘다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가면은 단순히 거짓된 얼굴만은 아니다. 내가 만든 허상이면서도, 내 얼굴 중 하나다. 시절인연이라는 게 있듯이, 나도 내 시기에 맞춰 변화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얼굴들이 정말 낯설었다면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하나에서 비롯된 조각들은, 낯설게 느끼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증명하려 하거나, 설득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의미가 비어 있는 자리에는 공허가 찾아온다. 사소한 일에도 이유를 달아놓고, 관계에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오늘의 정의가 내일의 오류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 불안에서 굳이 도망치려 애쓸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내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의미가 없기에 무엇이든 의미가 될 수 있다. 빈 그릇은 빈 그릇이었기에 형태를 낳았고, 여백은 부재가 아니라 단순히 형태의 조건일 뿐이다. 비어 있음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제 모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완성된 틀은 새로운 공허를 담기 어렵지만, 비어 있는 그릇은 언제든 다른 것을 품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의미에는 한계가 없다.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동시에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모든 방향이 열려 있는 그 순간이 자유에 가장 닿아 있었다. 현실이든 비현실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물질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호기심, 감정, 우울, 사색, 글쓰기, 그리고 사랑. 그 어떤 것도 실용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쓸모없지만 아름다운 것들.
우리는 종종 쓸모 있는 것을 위해 쓸모없는 것을 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무용한 것들이 나를 붙잡는다. 현실에서 도망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정중앙으로 이끈다.
살아 있다는 건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삶이 이렇게 긴데, 쓸모에만 매달려 그 쓰임이 다할 때까지 살아가는 건 본래 넓을 수 있던 길을 좁히는 일이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 흘릴 수도 있으며, 설명되지 않는 기분을 껴안고도 하루를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살아남은 하루일 수 있다. 굳이 설명되지 않고도 그냥 있는 것들이 있다. 의미가 없어도, 쓰임이 없어도, 누구의 기대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완전했으며, 그 완전함은 살아 있음 자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쓸모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무의미함 속에서도 그 순간의 의미를 발견해 가며,
하루를 내 삶에 남긴다.
그저 흘러가는 나로서.
끝내 이유 없이,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