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기대와 나의 희망과, 그리고(2)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어느새 날짜상 끝을 향해가는 2월 중순, 드디어 우리의 가게가 문을 열었다. 상가번영회 이름을 단 화환이 가게 오픈 전부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옆 좁은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을 맞았다.
꽤 친하다고 할만한 단골들이 첫날부터 가게를 찾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 끊임없이 홀을 메우고, 중간에 성이가 기타 반주를 곁들인 노래를 부르며 우리가 차지한 온전한 하나의 공간을 기꺼이 즐겼다.
테이블마다 소주, 병맥주, 또는 1000CC 생맥주를 돌리며 사람들의 기뻐하는 소리를 만끽했다. 이전보다 시끌벅적한, 조금은 낯선 분위기에서 상가번영회장님은 생맥주를 홀짝이며 이따금 우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첫날부터 찾아준 단골들 중에는 당연히 지영과 동주 일행도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 한 명이 입대를 했고, 이제 지영, 동주, 그리고 두 남자가 남았다.
지영은 손님이 아닌 아르바이트로서 분주히 홀을 누비고 다녔지만, 종종 틈이 날 때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 나와 성이도 그랬으니, 지영이라고 안 될 것도 없었다. 우리는 조금 들떠있었고, 꽤 많이 인자해진 상태였다.
지영과 동주 일행은 밤이 늦도록 자리를 지켰다. 11시가 넘어서자 많은 손님들이 찬 바람을 귀가를 서둘렀지만, 아르바이트가 끝난 지영이 합류하기까지 그들은 여전히 다음 학기 수업에 대한 고민과 머지 않은 현실로 다가온 군대 문제를 긴 시간 이야기했다.
“잠깐 담배 한 대 할래?”
썰물 빠지듯 손님들이 떠난 테이블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동주가 다가와 말했다.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는 서로 이전처럼 존대를 했지만, 다가온 그녀는 반말로 우리의 관계를 불러들였다.
동주는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가게 문을 나서 바깥으로 나가는 지하 계단을 올랐다. 나 역시 특별한 대답을 준비하는 대신 서너걸음 떨어져서 그녀가 간 길을 따라나섰다. 처음에는 서너걸음 차이였지만, 조금씩 우리의 틈은 벌어졌다. 내 걸음은 그녀보다 조금 더뎠다. 계단을 걸어 올라 바깥에 나왔을 때, 동주는 이제 막 담배에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깊게 숨을 빨아들이며 달아오른 담배의 불끝에 잠시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이윽고 뿌연 연기로 보일듯 말듯 가려졌다. 그 잠깐의 순간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어딘가 건조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그녀 옆에 다가섰다. 그녀는 내가 서 있는 반대 방향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말했다.
“왜 연락 안 했어? 아주 잠깐만이라고 했잖아.”
그녀가 말한 건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긴, 이건 어떻게 대답했는지에 따라 책임 여부가 갈리는 일은 아니었다.
“미안해.”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그녀가 정말 싫어할 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또 미안하다고 하면 죽는다고 했지?”
동주가 내 어깨를 밀치며 말했다. 가볍게 툭 치는 느낌이 아니라, 힘으로 전이된 감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내 몸은 살짝 휘청였지만 충격을 받진 않았다. 그러나 가슴에서 퀭한 느낌을 동반한 통증이 일었다.
“조만간 연락 한다며? 기다려 달라며?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대체 나한테 못한다는 말이 뭔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동주가 말했다. 처음은 단단했지만, 추위 탓인지 어느 어절에서부턴가 떨림이 느껴졌다. 그녀와 나는 모두 외투를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왜? 딴 여자라도 생겼니? 꼴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니면 뭐 어쩌다 자기라도 했니?”
그녀의 말 끝에서 화를 죽인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고갯짓에 동주의 표정은 눈이 커짐과 거의 동시에 얼어붙듯 굳어버렸다.
“어, 잤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얼어붙은 그녀에게서 멈춰버린 상호작용의 순간을 본 것일까. 그 어색한 단절을 이기지 못해 반사적으로 뭐든 해야했던 것일까. 그래서, 해서는 안 되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 말을 내뱉고 만 것일까.
“미친 새끼. 넌 사회성이라는 게 없니? 아무리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지만, 어떻게……. 야, 이제 우리 그만 하자. 뭐가 됐든.”
담배를 입에 무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그렇게 첫모금 이후로 나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그러나 유독 짧은 그 한 모금 후 연기를 미처 내뿜기도 전에 태우던 담배를 길 옆에 쌓인 눈더미로 던져버렸다.
동주는 곧바로 몸을 돌려 가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투와 가방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와 길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상 오산 보다는 지영의 집으로 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내 앞에서 계단을 오르던 때보다 더 서두르는 걸음으로 그녀는 그렇게 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동주의 뒷춤을 잠시 살핀 나는 천천히 걸어서 가게로 내려갔다. 홀에서 계단으로 우리가 신중히 고른 음악들이 흘러나왔지만, 더는 흥이 나지 않았다. 가게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영과 그 일행이 모두 가게를 나갔고, 성이와 나는 남은 손님들을 응대하며 새벽 1시까지 가게에 남았다.
동주와 있었던 일을 알게 된 성이는 그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잠시 자리를 떠났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게 충고를 하면서도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영에게 듣기로, 동주는 그날 밤을 지영의 원룸에서 보내고 아침에 오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원래 거의 지영의 원룸에 머물고 이따금 집에 들르는 식으로 새학기를 준비할 계획이었지만,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 동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며칠 뒤 우리는 지영을 통해 동주가 학교를 휴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올 계획이라고 했다. 원래 전공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고, 일단 어학연수 먼저 좀 갔다올까 고민하던 중이긴 했어요. 지영은 동주의 소식을 전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미심쩍은, 혹은 불편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성이는 그 후 따로 동주와 통화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동주는 환송회 따위도 없이 그렇게 어딘가로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