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아주 잠깐만(3)
하루를 더 쉬고, 다시 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이 마냥 시간만 흘려보내게 둘 수도 없고, 나도 이를 핑계로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대신 이번은 과거의 휴지기와 다르게 바로 가게 문을 여는 데 초점을 두지 않았다. 상가번영회장님과의 대화, 그리고 이를 통한 가게의 인수가 더 중요했다. 언제까지 엄밀히 이야기하면 불법적인 이런 사업을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다. 돈을 어느 정도 모으면 가게를 하나 차리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회장님의 제안은 그 시점을 빠르게 앞당겼다.
오랜 낮잠을 깨우듯 지루하고 느슨한 시간을 걷어내고 다시 세상에 발을 디뎠다. 평소 가게 문을 열 때보다는 이른 낮시간이었다. 장사는 다음 날부터 재개하기로 하고, 이날은 번영회장님과 가게 인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목적으로 나왔다.
친숙한 눅눅함 속에 나와 성이는 회장님을 마주보고 앉았다.
“성이 청년에게 이야기는 들었지?”
회장님이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쪽 주방 앞에서 어딘지 시무룩해 보이는 사모님이 우리 쪽을 건너보고 있었다.
“네, 저희에게 가게를 넘기려 하신다고…….”
내 대답에 그는 여전한 미소와 함께 몇 차례 입술을 움찔거렸다. 마음은 먹었지만, 이곳에서의 세월을, 정을 정리하는데 잠시 망설임이 드는 듯했다.
“나도 이제 좀 쉴까 하고. 이 상가는 내 소유야. 그 동안 벌어놓은 것도 있고, 자네들한테 세를 받으면 먹고 사는데는 별 지장 없을 테고. 뭐 장사가 무척 잘 되는 가게도 아니니 권리금도 다른 상가보다는 적게 얘기했고.”
한참 같은 잠깐이 흐르고 회장님이 비로소 입을 뗐다. 월세와 보증금, 권리금으로 얼마나 제안했는지는 이미 성이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네, 네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가끔은 들를까 해. 내 상가이기도 하고, 내게는 소중한 곳이었기도 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인테리어를 하긴 해야겠지만, 조금은 이 가게 분위기를 이어 받아줄 수 있을까?
메뉴나 다른 부분들은 어차피 자네들 가게니까 알아서 할 테지만, 가끔 나도 와서 맥주 한 잔 하고 쉴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는데. 자네들이 젊다고 쉽게 꼬드겨서 내 욕심 채우자는 건 아니고, 그냥 자네들이라면 여기 분위기나 내 마음을 좀 알아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의 말처럼 가게를 넘기면서 하는 이야기라기에는 내용이 선을 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또는 말을 시작하기 전, 그리고 잇는 동안 조금씩 멈칫하고 생각을 곱씹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실제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공간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큰 고민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교적 저렴한 권리금과 보증금도 부담을 좀 덜어주었다.
다음날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회장님과 함께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 계약서를 정리하기로 했다. 가진 돈은 가게 권리금과 보증금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있었고, 어머니가 남긴 통장도 있었다. 당신의 병원비도 넉넉히 쓰지 않고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다.
인테리어나 기타 경비는 성이가 일부 투자하기로 했다. 사실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오래된 수전을 고치고 주방 설치를 점검하는 정도였고, 벽체와 마루는 손대지 않기로 했다. 눅눅하게 습기를 머금은 그곳의 목재 바닥과 벽, 그리고 거기서 새어 나오는 냄새를 우리는 이곳의 분위기이자 이미지로 여겼다. 대신 오래된 영화 포스터는 떼고 우리가 좋아하는 사진이나 그림을 걸고, 조명이나 몇 가지 장식을 더하기로 했다.
성이와 적당히 협의를 마치고 가게 문을 열었다. 아마도 이 가게의 수명은 앞으로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 일요일에는 함께 패리를 찾아가 지금의 상황을 알려주기로 했다.
이제 막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을 살피고 있을 때, 지영이 가게에 나왔다.
“오랜만이에요. 방학 아르바이트인데 너무 많이 쉬었죠? 죄송해요, 저 때문에.”
지영에게 말했다. 그러나 지영은 손사래를 치며 그런 소리 말라고만 말했다.
“근데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많이 힘드셨을 텐데.”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깔며, 지영이 물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주방을 둘러본 후 지영이 옮기던 테이블을 같이 들며 대답했다. 지영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다행이네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왠지 남은 말을 삼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깊이 숨을 들이켰다.
“동주 얘기에요?”
적층된 플라스틱 의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나는 말했다.
“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지영은 당황한 듯 눈이 동그래졌다가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아, 네, 저 혹시 동주랑 연락해 보셨어요?”
“아니요. 아직.”
“저도 연락 안 한 지 몇 주 되긴 했는데, 동규 씨 연락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중간에 문자로 한 번 혹시 가게 언제 여는지 물어보더라고요.”
“네, 한 번 연락 해볼게요.”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마음의 정리가 안 되어 있었고, 동주와 대면하는 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나는 지영의 말을 웃으며 받았다. 어느새 나도 사회적 언어에 길들어 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쏟은 그 말을 계기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진 듯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와서도 바로 잠들지 못한 나는 아침 7시 정도가 되어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그러고 한참을 바라봤다. 이 시간이면 전화를 걸어도 되는 시간일까. 무슨 말을 해야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봐야 정리되는 건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동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여보세요’라고 들리는 깊이 잠긴 목소리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도 나는 몇 초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 동안 밀린 잠은 다 잤니?”
잠깐의 침묵을 깨고 그녀가 먼저 말을 던졌다.
“어, 어. 난 줄 알았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달되지 않는 건 아니야. 숨소리라든가, 머뭇거림이라든가. 뭔가 켕기는 게 딱 너던데?”
그녀가 여전히 잠긴 목소리로 피식거리며 말했다. 목을 풀려는 듯 뱉어낸 가벼운 기침이 낯선 상황과 어색함 사이에 작은 틈을 그었고, 나는 그 틈 사이로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넌 잘 잤어?”
“잘 못 잤어. 방학인데 요즘엔 늘 일찍 일어나느라. 너 때문이잖아. 너 전화 올까봐. 문자라도 한 번 했으면 이 고생 안 하잖아. 짜증나.”
동주는 핀잔처럼 말했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조금은 무던해진 마음으로 동주에게 말했다.
“미안해.”
“넌 나한테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진심으로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 모든 말이 ‘미안해’라는 한 마디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너한테 늘 고맙고 미안해. 근데 지금 당장은 그 외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 너한테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있어서.”
“너가 나한테 미안할 게 한 두 개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또 미안해, 하면 죽는다, 진짜.”
다시 영화 약속을 잡아야 할까, 언제 가게에 들를지 물어볼까, 아니면 뭔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해볼까. 아침 7시 무렵에 나눌 대화라기엔 좀 어색하지만, 나누고 싶었던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건넬 자신이 없었다. 아직 내게는 어머니를 잃은 후의 충격과 혼란하고 부끄러운 기억의 잔향이 남아있었다.
“조만간 다시 연락 할게.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
눈을 감고 한참을 고민하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동주는 깊은 한숨에 이은 한 마디를 전해왔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