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기대와 나의 희망과, 그리고(1)
“무슨 한 달에 한 번꼴로 면회를 오냐? 애인도 아니고.”
면회실에서 우리와 마주 앉은 패리의 첫 마디였다. 말의 마무리와 거의 동시에 그는 직접 치킨 포장을 뜯어 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그에게 새로 가게를 열게 되었음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모은 돈과 어머니가 남긴 유산에 부족한 돈은 일부 성이가 집에서 도움을 받아 보태기로 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와 연락이 끊긴 동안 이미 성이는 통화로 상가번영회장님의 제안에 대해 패리와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그럼 내 지분도 주냐?”
패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지분은 무슨, 우리한테 가게 다 넘긴지가 언젠데?”
성이가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농담이야, 인마. 그래도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냐?”
“꼭 성공해서 형이 주신 기회에 보답할 게요. 지분은 돈 벌리는 거 봐서 생각해봐요.”
살을 다 뜯은 다리뼈를 내려놓으며 패리가 다시 한 번 웃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남은 닭다리 하나를 집어 건넸다.
“잘됐네. 난 무엇보다 마루타가 조금 발전한 것 같아서 좋다.”
건네준 다리 하나를 손에 든 채로 패리는 나를 바라봤다. 그의 끊기지 않는 미소는 평소보다 화창해 보였다. 뭔가 한 시름 놓았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전에 본 너는 열심히는 살았는데, 그냥 열심히만 사는 느낌이었달까. 그다음은 무엇이 있을지 보는 사람들도, 너 스스로도 기대가 되지 않는 그런 느낌 말이야. 그저 네 앞에 놓인 상황만 살아가느라 바라는 것도, 가지려는 것도 없는 좀 기운 빠진 놈 같았단 말이지. 심지어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그나마 당장 눈앞에 해야 하는 것도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성이를 만난지 약 2년, 패리를 만난지는 그보다 몇 개월 더 짧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러나 패리의 말을 들으니 꽤 긴 시간이 흐른 기분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너는 축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하고 싶은 건지, 프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은 건지 스스로 명확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래서 당장 축구부를 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자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급식실 조리사에서 무허가 포장마차 주인으로, 그리고 이제 사업자등록증도 낼 진짜 번듯한 가게 주인이 될 예정이지. 심지어 추상적이긴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날 먹여 살리겠다는 말같지 않은 꿈까지 꾸고 말이야.
운 좋게 그때그때 기회를 만난 덕도 있지만, 어쨌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나아간다는 것 자체로 난 네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해. 어머님의 유산까지 털어서 새로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자체가 그 증거고. 너 같은 놈이 무작정 낙천적으로 잘될 거라고 덤벼들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정말 성장한 걸까? 달라진 걸까? 학생 때는 힘도 없었고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성이와 패리를 만나고, 성인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나니 기회가 다가오고 그저 그 흐름을 타고 왔을 뿐일지도 몰랐다. 어머니의 통장을 털어 가게를 열겠다고 생각한 것도 혼란과 단절을 위한 비이성적인 선택이 아닐 거라고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그럼에도 나는 그의 말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회피는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나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어쨌든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달라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렴 어때, 라는 생각 뒤로 어쩌면 그럴지도, 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면회시간이 끝나갈 때까지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성이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루타,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다. 동규야. 이제 다음에 네가 원하는 거, 가져야할 거는 뭔지 잘 생각해 봐. 나도 아직 젊긴 하지만, 사는 건 결국 그런 걸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 막연하게 네 남은 시간들을 공백으로 남겨두지 마.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하고, 나 제대할 때 먹고 살 길은 좀 만들어 놔라. 농담 아니다.”
마지막까지 웃음기를 놓지 않으며 패리는 말했다. 성이는 그에게 인사 대신 핀잔을 남겼고, 나는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꽤 많은 말을 늘어놓았지만, 오늘만큼은 ‘오해하지 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긴 대화를 잇는 동안 그 말을 하지 않았던 건 내 기억에 처음이었다. 모든 게 자연스럽고 평화로워 보이는 날이었다.
처음 2주 정도, 포장마차 운영과 새 가게 개업 준비를 병행하던 우리는 어느 정도 단골 고객들에게 정식 가게 오픈 소식이 전해진 뒤로는 포장마차를 정리했다. 낮과 밤을 모두 써 가며 두 가지 일을 모두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포장마차를 닫은 뒤로도 지영은 틈 나는대로 새 가게 준비를 도왔다. 지영에게는 자꾸 일을 쉬는 상황을 만들게 되어 미안했던 우리는 시급을 높이고, 적은 금액이지만 보너스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한다면 가게 오픈 후에도 남은 방학 동안과 개학 후 주말 등 일손이 필요할 때면 같이 일하기로 했다.
가게 준비는 생각보다 더디게 이뤄졌다. 인테리어 공사도 간단한 수준이었지만, 1월말에 설 연휴가 있어 준비 시간이 상당히 촉박하게 느껴졌다. 설날에도 우리는 가게에 나왔다. 10여년은 족히 묵었을 오래된 영화 포스터와 그림들을 떼어내고, 성이가 좋아하는 밴드들의 사진과 LP를 장식처럼 벽에 붙였다. 그리고 직접 을지로에서 사온 조명으로 천장등을 갈았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TV에서 중계되는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지켜봤다.
우리나라는 새해를 맞이하며 축구계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듬해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처음으로 외국 감독이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그것만으로도 꽤 신선한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그가 1998년 월드컵 당시 우리가 5:0으로 붕괴되던 당시 네덜란드를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였다는 사실이었다. 하필 그를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때는 내 축구 인생이 마무리되기 직전이었고, 그래서 내게 그의 이름과 존재는 유난히 크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성이와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간식거리로 사다 놓은 마른 오징어와 과자에 캔맥주를 곁들여 축구 경기를 지켜봤다. 칼스버그컵 노르웨이와의 경기였다.
한국 축구의 미래로 여겨지던 고종수가 전반에 선취골을 얻어냈고, 이후 노르웨이가 2:1로 역전했지만 후반 김도훈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유난히 유럽을 만나면 위축되는 우리나라 치고는 꽤 선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기는 끝내 3:2, 노르웨이의 승리로 끝났다.
고종수가 첫 골을 넣었을 때였다. 성이가 시선은 TV에 고정한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
“동주랑은 어떻게 되는 거야? 연락은 했어?”
“얼마 전에 잠깐 통화는 했어.”
선취골이었지만, 우리는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성이가 이어 물었다.
“그냥 안부만 물었어.”
“너네는 대체 무슨 사이냐? 뭔가 분명히 해야하지 않아?”
이번에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 성이가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노르웨이가 전반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동점골과 역전골을 넣었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혼란과 피로감, 그리고 대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천천히, 그리고 복잡한 심경만큼이나 어눌하게 그에게 털어놓았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성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두 손을 내리고 난 후 그의 표정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주한테는 얘기하지 마라.”
성이는 그 말을 남기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이후 우리는 말 없이 축구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후반, 김도훈의 동점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웨이가 다시 골을 넣었을 때 성이는 다시 말했다.
“대답해. 얘기 안 한다고. 그날 일은 그냥 잊어버려. 그럴 수도 있어. 너 있잖아. 너무 곧이곧대로, 있는 그대로만 살지 마. 너만 피곤한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피곤해지는 거야.”
나는 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너가 동주한테 상처 주는 꼴 못 본다.”
노르웨이의 승리로 경기가 끝나고, 성이는 그 말과 함께 TV를 끄고 벽에 걸기 위한 액자 하나를 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