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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콤플렉스 48화(3부 15화)

너의 기대와 나의 희망과, 그리고(3)

by 이정석

나는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일에 익숙한 사람인 줄 알았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떠났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영원히 볼 수 없고, 엄마는 영원히 볼 가능성이 없었다. 기다림이 전제되지 않은 완벽한 이별에 가까웠다.


패리는 내게 불행 앞에서도 담담할 수 있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 나를 남겨두고 떠나는 일도 그 불행의 범주에 있을까. 너무 어렸을 때 영원, 혹은 그에 가까운 이별을 경험한 나는, 분명 쉽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견뎌냈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사실 그 시점 나의 마음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분명 힘들었을 테지만, 그 뒤의 삶이 내게는 더 중요했고 그 시간에 머물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금 이별의 시간을 마주한 지금, 나는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 이별들이 큰 시간 차이를 두지 않고 연이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내 삶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했던 어머니를 잃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내 삶에서 가장 특별하고 강렬했던 감정을 느꼈던 동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절을 고했다. 그것을 영원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질도, 훗날에 대한 기약도 없는 단절은 사실상 그에 버금가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포장마차를 접고 제대로 된 가게에서 장사를 시작한 뒤로도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를 떠나 보낸 후 방황의 시간을 정리하기 위해 보다 안정적이고 책임이 필요한 형태로 우리의 일하는 방식을 전환했지만, 현실은 마음과 같지 않았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시련만이라면 어쩌면 그 결정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 동주와의 단절까지 겹치면서, 혹은 동주와의 단절을 겪으면서 나는 여전히 일을 하면서도 혼란스럽고 마음 한 켠이 퀭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게 매출은 포장마차를 하던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나름대로 거액의 보증금을 넣고, 싸게 준 거라고는 하지만 포장마차 때 상가번영회에 내던 찬조금보다는 그래도 많은 월세와 기타 관리비를 고정비로 지출하고 있으니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당연히 세금 문제도 고민해야 했다.


성이는 어차피 집에서 숙식하며 크게 돈 나갈 일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집안 형편상 돈이 궁할 것도 없었다. 나 역시 스스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고 해도, 딱히 돈 쓰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한 몸 건사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큰 맘 먹고 시작한 가게의 매출이 기대에 못미치자 조금씩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 불안감이 의식적으로 인지할 정도로 뚜렷해진 것은 가게를 열고 3개월 정도 지난 5월 초, 술 손님이 뜸해지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이어지던 시점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겪은 3년여의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 그 과정은 또 어느 때보다 운이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조금씩 다가오고 자리잡은 행운과 안정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면서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그리고 연이어 찾아온 이별, 혹은 단절을 마주하며, 마음처럼 되지 않는 가게 상황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그 시간과 운명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집으로 조금은 예상치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입영통지서였다. 입대일자는 7월초였다. 통지서를 받고 일주일은 성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혼자 깊숙하면서도 하잘것없는 고민을 앓았다. 20대 초반 청년에게 입대가 하잘것없다고 표현할만한 사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고민은 하지만, 이미 마음도, 상황도 결론은 정해진 바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하찮은 고민을 일주일을 이어가다 결국 성이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성이는 적잖이 당황한듯 보였다. 여전히 녀석은 주방 일은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안주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 년만에 패리와 내가 모두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는 상황은 전혀 상상도 해보지 못한 듯했다.


“내가 좀 알아봤는데, 너같은 경우에 따로 신청하면 군대를 안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성인이 되고 신체검사도 마친 뒤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긴 했지만 어쨌든 면제 신청은 해볼 수 있다던데?”


입영 소식을 알리고 사흘 정도 지난 뒤 성이가 말했다. 아마도 그 사흘 정도의 시간동안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닌 모양이었다. 웬일로 일찌감치 가게에 나와 기다리다, 출근한 나를 보자마자 뛰어 들듯 다가온 녀석은 꽤 흥분해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현실적인, 그리고 성이 입장에서의 문제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청년에게 입대 면제의 가능성은 누가 봐도 희소식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단, 나는 그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음을 녀석에게 말해줬다. 실망과 당혹이 뒤범벅된 표정으로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어깨를 한번 지긋이 짚어주는 것 뿐이었다.


“우리 한 달동안 잘 해보자. 너도 조리과잖아. 좀만 배우면 잘 할 수 있어.”


나는 지긋이 짚었던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몇 초 뒤, 녀석을 감싸안은 내 가슴팍으로 잘고도 긴 떨림과 함께 천천히 스며드는 축축함이 느껴졌다.


입대를 앞두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이에게 안주 레시피를 알려주고 숙달시키는데 보냈다. 그 동안 게으른듯 보였던 녀석도 그 기간만큼은 한 번의 지각도 없이 평소라면 당연히 모자랄 잠을 뒤로 하고 일찌감치 가게로 나왔다.


성이는 내가 입대한 뒤에도 내 몫을 따로 챙겨 기존에 하던대로 통장에 입금시키겠다고 했다. 우리 사이 무언의 약정과도 같았던, 이익의 50%였다. 물론 내 빈자리를 대신할 고정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기존에 받던 수익과는 차이가 꽤 클 테지만. 녀석은 그것을 내 지분에 대한 권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패리라면 몰라도, 우리에게 지분은 무의미한 개념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같이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것으로 만족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냥,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가게 잘 키워주고, 제대하면 가게로 돌아올 수 있게만 해줘.”


성이의 눈물겨운 제안을 뿌리치며 나는 답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어머니처럼 내 삶을 의지했던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도 인생의 공백을 채워줄 누군가, 일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속도도, 플레이팅도 마음에 드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이는 곧잘 따라왔다. 요리의 세계가 아니라, 조리의 세계라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정해진 레시피를 이해하고 따라하는 건 큰 무리는 아닌듯 싶었다.


성이가 홀에서 맡는 역할이 꽤 컸으므로, 효율적으로 주방에 배테랑 여사님을 한 분 모시고, 성이는 여전히 홀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오가기도 했다. 성이가 아니라 내가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어쨌든 우리 가게고 내가 없으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답했다. 적어도 주방 돌아가는 꼴이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히 알고 장악해야 사장으로서 자격이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홀에 애정이 많은 녀석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녀석은 가게의 온전한 주인이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의 인생에도 비로소 명확한 책임이라는 게 생긴 듯 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응원하며, 어느 정도 주방 상황이 파악되면 여사님을 고용하고 홀 위주로 관리하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저었고, 실제로 내가 전역하기 전까지, 노래하는 시간이나 혹여 단골 손님 관리 때문에 홀에 나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빠듯하게 주방까지 혼자 관리하며 어엿한 사장님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생각보다 빠르게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패리를 한 번 만나 군생할에 대한 조언도 듣고, 앞으로 가게 운영에 대한 부분도 상의했다. 일년 정도만 지나면 그도 전역하고 사회로 돌아와야 할 상황이었기에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몫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손사레를 쳤지만, 성이와 나는 이후로도 그의 의견을 들으며 상황을 맞춰가기로 했다.


7월초, 내 마지막 술자리는 그러한 가운데 아주 조촐하게 이뤄졌다. 가게 영업이 다 끝나고, 지영과, 그 사이에 또 한 명이 군대를 가면서 홀로 남은 남자 친구 한 명이 나와 성이를 제외한 유이한 멤버였다. 지영은 그날도 늦게 시작한 술자리임에도 금세 취해 울먹였고, 성이는 아무렇지 않은듯 보이다 그녀의 울먹임에 갑자기 감정이 올라 한바탕 큰 소리로 눈물을 쏟아냈다. 그 시끌벅적한 광경이 민간인으로서 마지막 술자리를 보내는 내겐 전에 없이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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