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May 30. 2021

망종(芒種), 직업으로서의 꿈

절기의 일기, 망종(芒種)

  24절기의 아홉 번째 절기, 망종(芒種). 벼 같이 수염 있는 곡식의 종자를 뿌리는 시기라는 뜻이다. 동시에 보리를 베어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날은 더없이 푸르르고, 갓 지나온 여름의 입구를 돌아보기에는 눈이 부신 시절이다. 

  어찌 이리도 적절하게 잘 맞을까. 씨를 뿌리는 동시에 거두어들이는 시기라는 뜻, 이때에 나의 직업 노선에도 새로운 씨앗을 뿌리며 동시에 일말의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발아하지 못한 씨앗들을 품은 채, 꿈의 씨앗이 발아의 시절을 기다리고 있다.


망종






  대만 1년 유학 동안 엄마 아빠가 나에게 보내준 경비는 총 0원이었다. 그것이 유학의 조건이었다. 비행기 비용을 제외하고, 학비와 숙식, 용돈 제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래서 간 유학이었다. 모든 비용을 다 대주는 유학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 경험을 쌓아보고자 갔다. 

  타이베이에서 한 시간 떨어진, 대만 최고(最高)의 학교였다. 한국에서도 해발 최고(最高)의 도시에서 오래 살았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이런 데서 지내야겠냐 싶었지만, 공부도 시켜주고 기숙사도 주고 용돈까지 주니 더 생각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학교의 국제 교류는 한국이 처음이었고 내가 첫 외국인이었다. 학생들은 외국인 티가 나지 않는 외국인을 보러 찾으러 다녔다. 나를 찾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중국에 있을 때도 그 어느 중국인도 나를 외국인으로 알아보는 이 없었다. 대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당시 나의 중국어는 수준급이어서,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유창하게 한국어를 하면 '한국어 몇 년 배웠어?'를 물어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중국어 몇 년 배웠어?'라는 질문이 듣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몇몇 친구들이 개별적으로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그럼!이라고 대답하고 나면, 며칠 지나서 '언제 가르쳐 줄 거야'라고 물어왔다. 난감했다. 나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심이었다. 거의 매일 찾아와 어제 본 드라마와 영화와 '무한도전'에서 나온 말들의 뜻을 물어왔다. 한국 노래 가사를 적어와 뜻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대부분 영어과 친구들이었다. 

  사고의 전환의 일어났다. 아, 외국어를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친구들이구나. 작은 스터디를 운영해도 되겠구나. 바로 국제협력팀에 문의를 했고 허락을 얻었다. 학교 이곳저곳에 '한국어 학습 소조(小組, 소모임, 스터디)' 공고가 붙었다. 약 10명 정도의 친구들이 매주 화, 목 저녁 '한국어 선생님'에게 한국어를 배우러 왔다. 나의 첫 한국어 교육이었다. 

  역시나, 잘 따르고 열심히 했다. 처음부터 열의가 있는 이들이었기에 금방 습득했다. 진도는 쭉쭉 나갔다. 오히려 나의 수업자료 만드는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즐거웠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왔구나. 학기를 마무리하고 새 학기를 맞으며 나는 본격적으로 한국어 교육 자리를 찾아보게 되었다. 한국어 학원 자리는 구할 수 없었다. 5-6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을 고용하고자 하는 이는 당연히 없었다. 우연히 개인 과외를 구하는 이와 연락이 닿았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분명히 저 사람이 맞을 텐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개스톤 이후 그런 팔뚝은 처음 보았다. 무서웠다. 그래도 한국인의 이미지를 위해 약속은 지켜야 했다. 

  "제 이름이 야한(亞漢)이에요. 한국 친구들이 저를 'sexy'라고 불러요. 진짜 섹시 맞아요?"

  "하하하하하하하. 뚜이 뚜이. 정말 섹시 맞네요."

  겉보기와 다르게 그는 예의 바르고 친절했으며 유머가 넘쳤다. 대한항공에서 파일럿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와우. 첫 한국어 과외 학생이 우리나라 대표 항공사의 파일럿이라니! 몇몇 간단한 테스트를 하고는, 그는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첫 수업은 맥도널드에서였다. 실내 자리가 없어 길거리 테이블에서 했는데, 바람이 심했다.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어찌 됐건 한 시간 수업은 끝이 났고, 그는 봉투를 내밀었다. 우리는 과외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조사한 바로는, 시간당 대만달러 500원 정도였다. 300원만 받아도 다행이다 싶었다. 봉투 안에는 2,000원이 있었다. 당시 나의 한 달 용돈이 8,000원이었다. 내가 한 달 받는 용돈의 1/4을, 나는 한 시간 수업료로 받은 것이다.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올래?"

  아, 이렇게 범죄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건가. 지금 바로 도망갈까, 자연스럽게 웃으며 조금 있다가 도망갈까. 도망갈 시점을 고민하고 있는데, 그는 내 머릿속을 훑고 있었다.

  "걱정 마, 우리 집에 여자 친구가 있어. 같이 공부해도 될까?"

  아, 역시 야한 파일럿이 최고다. 안심했다. 두 번째 수업, 그 후 두 번의 수업을 그의 집에서 했다. 대리석 바닥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도 처음이었다. 야한 능력자. 대만 중화항공의 스튜어디스라는 여자 친구는, 수업 갈 때마다 나에게 커피를 사주고 끝나면 빨간 스포츠카로 지하철역까지 태워주었다. 야한 여자 친구만큼 아름다운 중국인을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다. 야한 수업보다 야한 여자 친구와 친해지는 목적이 더 컸지만, 야한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고액 과외도 끝이 났다. 그래도 그는 4번의 수업으로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서로 만족하는 수업이었다. 

  야한 수업은 내 마음속에 꿈을 심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 남은 평생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지.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며, 실로 오랜만에 나의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학생들의 눈빛에서 내가 더 힘을 얻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의 모국어가 발음되는 것을 보고 들으며, 나는 이 일의 가치를 알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꿈'이라는 방향키를 잡아 보게 되었다. 손에는 힘이 있었고, 방향키는 흔들림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는 먹고사는 일에 급급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호시탐탐 대만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노렸다. 석사 이상이 대만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찾기 쉽다기에, 석사 공부를 시작했다. 석사를 마칠 즈음 결혼을 했다. 남편은 군인 외교관 신분으로 대만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말이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따는 과정을 시작했다. 2년이 걸린다고 했지만, 모든 일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어쨌든 나는 2년 후에는 정식으로 한국어 교원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2년 동안 유산을 두 번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마지막 기말고사는 조리원에서 보았다. 조리원에서 조리보다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리포트를 작성했다. 수유 콜을 무시하고 밥도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아이를 키웠다. 동시에 우울도 키웠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에 비해 우울이 자라는 속도는 월등히 빨랐다. 너무 우울할 때면 자격증을 꺼내어 보곤 했다. 처음엔 기분이 좋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격증에서 곰팡내가 나는 것 같았다. 젖내와 섞이자 악취로 변했다. 더 우울해지는 것 같아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자존감은 매일 기록을 경신하며 바닥을 쳤다. 상상 속 육아와 닮은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네 시간을 쉬지 않고 운 날, 다시 자격증을 꺼냈다. 자격증을 컴퓨터 옆에 두고 구인 사이트를 검색했다. 3일 후 나는 남편과 시어머니와 함께 고려대학교에 갔다. 젊은이들이 '중국인을 위한 전화 한국어' 시스템을 개발하고 선생님을 구하고 있었다. 면접 동안 아이는 어머님께 맡겼다. 며칠 후 합격 문자가 왔고, 면접 때 보았던 젊은 친구와 통화하며 선생님 등록 절차를 마쳤다. 8개월 아이는 뒤집기와 배밀기, 기기를 건너뛰고 잡고 서기를 시작했다. 

  도대체 무어가 그리 간절했던 걸까. 나는 매일 아이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며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입히고 젖을 물리고 재우며, 동시에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하고 숙제 검사를 하고 시스템과 학생 모두에 수업 피드백을 올렸다. 학생들과의 교감을 위해, 학생들이 좋아하는 가수-대부분 엑소(EXO)와 트와이스였다-의 신곡과 스케줄도 체크했다. 수업 준비를 하면서 이유식을 만들고, 숙제 검사를 하면서 아이를 재웠다. 아이를 업고 수업을 하다, 아이가 헤드폰 마이크를 잡아당겨 수업이 중단된 적이 많았다. 모유 수유하며 밤에 기본 세 번씩 깨면서 이 모든 것을 했다. 안 그래도 잠이 부족했는데, 절대적 수면부족으로 코피가 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6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3명은 매일 수업이었고, 3명은 월수금 수업이었다. 4개월을 이렇게 지내다가 체력의 한계가 와서 모든 수업을 정리했다. 좀 쉬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안했다. 공허함이 불안을 마구 흔들고, 불안은 나를 마구 흔들었다. 한 달 후면 아이 돌잔치가 있었기 때문에, 돌잔치 준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돌잔치 준비는 대충 마무리짓고, 나의 손은 다시 구직 사이트를 헤매고 있었다. 


  5월 초, '홍콩 학생 초청 단기교육프로그램' 특별 강사 구인 면접장에 도착했다. 3일 후 있을 시강은 자신 있었다. 이래 봬도 한국어 수업 유경험자였다. 온라인, 과외, 대면 수업 모두 가능한 유경험자. 주어진 20분 수업은 완벽했는데, 현직 선생님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얼굴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아... 그건.... 선생님 잘 몰라요. 공부, 다음 시간, 말해요."

  망한 시강의 표본이었다. 기세 등등하던 자신감은 공중으로 뿔뿔이 산화되었다. 내 인생의 한국어 수업은 오늘이 끝이구나. 다음날, 6월 1일부터 수업하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에너지가 좋으셨어요. 수업은 사실 점수가 좋지 않았는데, 에너지가 너무 좋으셔서 학생들한테 잘 전달될 것 같아요."

  내가 에너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살면서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좋은 에너지를 잘 유지해서, 돌잔치를 잘 치르고 운전 연수를 잘 마쳤다. 서른넷이 될 때까지 길치, 방향치, 기계치 3종 세트로 운전을 두려워만 했었는데, 이제는 운전을 해야 할 명분이 생겼다. 한국어학당으로의 출근을 위해서였다. 망종의 햇살이 유난히도 좋았던 날, 나는 공식적으로 대학 한국어학당의 선생님이 되었다. 






  한국으로 치면, '한국어과'를 지망하는 재수학원 학생들의 한국 방문 단기 프로그램이었다. 25명의 파릇파릇한 학생들이 앉아있었다. 수업은, 늘 그랬듯이 좋았다. 앞에 앉은 남학생을 때리며 '아야'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김 선생님, 김 선생님 부르기 시작했다. 

  이튿날까지는 괜찮았다. 두 시간 수업을 위해 만들어야 할 PPT 양은 갈수록 늘어났다. 단모음이 끝나자 복모음으로, 자음에서 거센소리, 된소리로 들어가면서, 받침을 배우면서 PPT는 100장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두 시간 수업을 하고 집에 와서 시간제 보육에 맡긴 아이를 찾아보면서 틈틈이 수업 자료를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나와 함께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다. 하루 두 시간 수업이 네 시간이 되었다. 남은 일주일은 순전히 정신력 싸움이었다. 

  아이를 시간제 보육에 8시부터 6시까지 맡겼다. 일주일만 버텨줘, 라며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맡기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초보운전의 위용을 드러냈다. 두 번 정도 죽을 뻔했다. 그래도 단상에 오르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학생들은 조금씩 격차를 드러냈고, 숫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반 정도는 포기하기 시작했다. 2주 동안 글자 배우고 인사말만 배워도 충분할 텐데, 프로그램의 진도는 숫자와 요일, 날씨까지였다. 학생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는 관광지나 견학 프로그램이 있었다. 학생들에게도 무리였다. 서로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11시부터 1시까지 ACTIVITY 시간에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어고 뭐고, 책상을 뒤로 밀고 풍선을 터트려 가며 홍콩의 스무 살들과 몸을 던지며 놀았다. 꼬리잡기를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 몇 가지 구호와 반드시 해야 할 한국어만 알려주고 7살 아이들처럼 놀았다. 중간중간 수업 평가하러 들어오는 현직 선생님들은 혀를 차고 갔지만, 나와 아이들을 살릴 방법은 이뿐이었다. 이전 두 시간 수업에서 엎드려 자던 친구들이 가장 열심히 놀았다. 김 선생님 최고, 를 외치며 땀을 닦으며 교실 문을 나갔다. 


  수업의 마지막 날, 새벽 5시까지 수업 준비를 했다. 잠을 못 자고 출근을 했다. 그날은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겼다. 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마지막 날만큼은 집에 와서 잠을 못 잔다 해도 아이 곁에 있고 싶었다. 

  마지막 날 수업답게, 홍콩 아이들은 케이크를 준비해 주었다. 김 선생님, 사랑해요, 를 말해주었다.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2주간의 고생이 한순간 보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매일 나와 농담을 주고받던 키 큰 녀석이 안 어울리게 눈물을 보였다. 그래서 나 역시 눈물로 보답했다. 예쁜 꽃다발 모양의 롤링페이퍼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운전이 이제 좀 익숙해졌는데, 수업이 끝이 났다. 



  주차를 하고,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6월의 태양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차 안이어서 금방 더워졌다. 구두와 정장과 초여름 열기에 오래는 못 잤지만, 짧은 단잠을 자고 집으로 갔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이가 나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왔다. 


  일주일 후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9월부터 정규과정 수업을 해주실 수 있냐고 물어왔다. 3개월 계약이었는데, 나는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정규수업은 생각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쳐 있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다시 전화 한국어를 했다. 만삭까지 수업을 했으니, 4-5개월 동안 했다. 그때 한 학생은, 드라마 '도깨비'를 7번을 본 공유의 팬이었다. 둘째를 낳고 얼마 후 그 친구가 한국에 와서 하루 가이드를 한 적이 있다. 학생의 부탁으로 선물을 전달하러 공유의 소속사 회사를 가서 노크를 했다. 물론 공유는 보지 못했지만, 그 친구는 공유가 오르내린 계단이라며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그 이후에도 한국어가 낳아준 인연으로 학생들이 한국에 오면 꼭 만나 함께 밥을 먹곤 했다. 


  그 후로는 지금까지, '엄마'로 살고 있다. 작년부터는 '엄마'이자 '글 쓰는 이'로 살고 있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내 안에 여러 '나'를 지니고 살고 있다. 애셋 엄마이자 글 쓰는 이이자 딸과 누나와 아내와 며느리와 형님 친구.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엄마 자아 뒤에 꽁꽁 숨겨두고 있다. 아직은 '엄마'가 좀 더 힘이 세야 할 때이다. 엄마 자아가 작아져도 될 때, 나는 조용히 내가 뿌려두었던 꿈의 씨앗에 물을 줄 것이다.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직업으로서의 꿈을 발아시킬 것이다. 

  한국어 선생님. 나의 모국어를 배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외국인의 눈과 입을 사랑할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알릴 것이다. '나'를 관통한 한국어가 그들에게 잘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함께 다져줄 것이다. 지금까지 시간만 되면 외국어 공부를 놓지 않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5년 전 망종(芒種)의 때에 내 안에 뿌렸던 씨앗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에 수확해두었던 '한국어 교육의 경험'이 지금까지도 내 꿈의 영양분이 되어 주고 있다. 반드시 이루어질 꿈의 발아,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은 세 아이 성장의 바탕이 되어주고 있다. 

 


*절기 설명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전 09화 소만(小滿),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는 병원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