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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y 20. 2021

소만(小滿),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는 병원에서

절기의 일기, 소만(小滿)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 소만(小滿),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답게 사방의 자연이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은 그 이름값을 하기 위해 겨울을 지나온 모든 씨앗을 발아시키고 꽃을 피운다. 자연은 자신이 품은 모든 아름다움을 참았다가 이때에 터트린다. 찬란한 아름다움의 자연에 둘러싸여 있으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찬(滿) 행복의 진리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때에, 나의 생 역시 이전과는 다른 채움을 위해 발을 내디뎠다. 결혼식장으로 내디딘 그때의 발은 나를 지금의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소만







  횟집이었다. 돌이켜 보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모두 회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상견례 집은 횟집이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몰랐던 만남이었다. 분명 엄마는 '얼굴이나 한 번 보지 뭐'하며 나와 함께 지하철을 탔다. 두 시간여 서로에 대해 최대한의 예의를 차리며 최대한의 겸손과 소량의 자식 자랑을 섞은 대화들이 오고 갔다. 대화의 마지막 끝에 '그럼 5월 말에 식을 올리는 것으로 하지요'라는 말이 오갔다. 그렇게나 쉽게 나의 결혼이 땅땅땅 결정되었다.

  아직 2월의 눈이 다 녹지 않은 횟집 문턱을 나서며,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뇌의 전기신호 사이를 오갔다. 그러니까, 이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빨리는 아니었다. 3개월 후였다. 비혼이라는 마음을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3개월 후 결혼이라니. 할 게 너무나도 많이 있고, 무엇보다 학자금을 갚느라 결혼비용이 한 푼도 없었다. 하다 못해 500만 원이라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3개월이라니.

  남편은 나의 사정을 알고 모든 비용을 자신이 감수하겠다고 했다. 며칠을 고민하고, 나는 앞으로의 아가씨 생활을 3개월로 단축시키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할 결혼, 늦추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주변에서 결혼 준비하다가 못 볼 꼴 더 본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차근차근 준비할 시간은 없었지만, 하나하나 해 나가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결혼 전 해야 할 일 목록을 만들었다. 크게 7가지였다.

  

  첫 번째, 사직이었다. 남편 근무지 쪽에서 살려면 지금 직장으로 출퇴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마침 나와 중국어 실력이 비슷한 대학원 동기가 취업 중이었다. 다행히 그 친구의 집과 나의 회사 거리도 가까웠다. 나의 후임을 제안하자 고마워하며 받아주었다. 2주간의 빠른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두 번째, 논문이었다. 사직을 일찍 한 가장 큰 이유가 논문이었다. 석사 4학기는 종료되었고 논문학기가 남아 있었다. 일을 하며 논문을 쓰는 게 쉽지 않았는데, 결혼 준비와 더불어 논문을 같이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3월 초, 며칠을 교수님을 찾아뵈며 주제를 잡았다. 쓰고 싶은 주제는 자료 구하기가 힘들었고, 너무 많이 쓰는 주제는 싫었다. 결국은 쓰고 싶은 주제를 선택했다. 나에겐 아직 두 달이 있으니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때부터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살았다. 모든 한국어 자료를 바로 구할 수 있어야 했다. 1차 영어 자료와 중국어 자료, 대만 번체 자료까지 구하려면 정보 접근성이 좋아야 했다. 다행히 친정집에서 지하철로 15분이면 도착했다. 나는 직장인처럼 오픈 시간에 도착해서 문 닫는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지냈다.

  세 번째, 결혼식장이었다. 남편이 석사를 마친 신촌의 대학교에서 치르기로 했다. 주례를 남편 지도교수님께 부탁드렸기에 빨리 결정 내릴 수 있었다. 사실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평생 결혼을 생각해보지 않은 내게 결혼식장은 그저 예뻐 보였다. 내가 이런 곳에서 드레스를 입게 되는구나

  미리 피로연 음식을 먹어보는 날, 토요일이었는데도 남편은 피로연장 바로 앞에서 긴급 복귀 명령 전화를 받고 다시 차로 돌아갔다. 어쩐지 나의 미래의 한 부분을 보는 기분이었다. 시어머니와 친정엄마와 나, 셋이서 처음 한 식사가 남의 결혼식 피로연장이었다. 다행히 맛은 있었다.

  네 번째, 청첩장이었다. 식장과 시간이 정해졌으니 청첩장을 만들어야 했다. 남편은 청첩장은 철저하게 나에게 맡겼다. 이 역시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맘에 드는 몇 가지 문양 중 전통적인 문양의 청첩장을 골랐다. '인연(因緣)이 인연(人緣)이 되어 인연(姻緣)을 맺게 되었다' 이런 글귀를 적었다. 중국어과 출신인 걸 티 내려 한 건 아닌데, 지금 보니 누가 봐도 한자어 놀음인 것 같아 부끄럽다.

  다섯 번째, 흔한 말로 '스드메'였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와, 나도 이런 걸 하는구나. 남편은 스드메도 나에게 다 맡겼다. 식장에 연계된 웨딩플래너를 소개를 받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내 인생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청담동을 가 보았다. 강남이라면, 친구들 약속으로 가봤고 그것도 강남역 1번 출구나 기껏해야 삼성역이었다. 청담동은 내가 가면 안 될 곳처럼만 느껴졌는데, '결혼'을 앞 세워 청담동에 발을 디뎌본 것이다! 드레스 대여점과 한복집, 마사지샵과 성형외과 그리고 고급져 보이는 집들이 많았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0.0001도 없는 날 위해 친정엄마가 같이 가 주었다. 스튜디오와 드레스와 메이크업 숍이 하루에 다 결정되었고, 촬영일과 드레스샵 방문일 역시 당일에 정해졌다. 고민을 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여섯 번째, 신혼여행이었다. 남편의 친구가 여행사에 다니고 있었다. 몇몇 신혼여행 패키지를 소개받았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결혼을 진짜 하긴 하는구나 실감이 났다. 이전의 모든 결혼 준비는 내게 일종의 '해치워야 할 일', '의무'와 같은 것이었다. X표 해나가며 해치웠다. 그러나 신혼여행은 감회가 달랐다. 나도 이런 걸 가보긴 하는구나. 

  친구들은 발리를 가고 몰디브를 가고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란드를 가고 당시 유행지였던 크로아티아, 칸쿤을 갔다. 남편이 받아온 선택지는 하와이와 괌이었다. 나는 비용적인 면에서 빚을 지는 느낌이었기에 괌을 택했다. 남편은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빚을 지는 느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최소 비용의 최대 행복을 따져야 했다. 사실 내게 괌도 과분했다. 영어를 주 언어로 하는 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3박 5일, 즐겁게 다녀오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신혼여행지도 10분 만에 결정했다.

  일곱 번째, 집이었다. 내가 주중엔 도서관, 주말엔 청담동으로 쫓아다니는 동안 남편은 거의 매일 퇴근하고 부동산을 들렀다. 부대에서 제공하는 숙소만큼은, 너무나도 싫었다. 곰팡이로 도배를 한 듯한 집과 욕실, 추운 바깥공기와 온도가 같게 느껴지는 군부대 아파트는 '신혼'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운전도 못하는 내게 걸어서 30분 나와야 버스 한 대가 다니는 위치 역시 '신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편은 그나마 생각해 둔 아파트가 2주 만에 전셋값이 4,000만 원이 올랐다고 했다.

  3월 말부터는 주말마다 스케줄이 가득 찼다. 웨딩촬영을 급하게 마친 후부터는, 주말 내내 집을 보러 다녔다. 남편이 준비한 결혼 비용에 맞는 집은 없었다. 혼자 결혼비용을 해결하다 보니 남편의 예상을 크게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나마 유일한 '저축'이었던 청약 통장을 깨서 집 비용에 보탰다. 신축 빌라의 11평 집이 그 상황에서 그나마 괜찮은 조건이었다. 근처에 새 도서관과 마트와 빵집이 있었고, 남편 부대와도 멀지 않았다. 가전은 빌트인으로 다 되어 있어서 따로 혼수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미약한 시작으로는 걸맞은 집이었다.





  논문이 생각보다 더뎠다. 대부분 자료가 중국어와 영어이다 보니 해독에만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결혼식까지 한 달여 남았는데, 겨우 1/3을 썼다. 잠을 줄이며 써야 했다. 도서관에서 집에 오면 9시가 넘었고, 매일 1시 넘어까지 논문을 썼다. 그 와중에 플래너와 드레스샵, 스튜디오 샵의 전화를 받으며 일정을 체크했다.


  복병이 나타났다. 둘째 며느리를 먼저 보셔서 결혼 과정을 알고 있는 시어머니는 '마사지 같은 거 받아야 하지 않겠니, 5월의 신부인데 반짝반짝해야지'라고 하셨다. 아직 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미래의 시어머니는 역시 시어머니여서 벌써부터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곧바로 플래너에게 피부관리숍을 물어보았다. '그거 왜 말씀 안 하시나 했어요'라며 기다렸다는 듯이 피부관리숍의 전화번호를 넘겨주었다. 어쩜 그리 청담동에만 모여 있는지, 청담동이 불쑥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마 비용이 싼 곳으로 상담을 갔다. 사장은 인조인간 같았다. 레옹의 마틸다 같은 똑 단발과 일자 앞머리에, 얼굴은 청담동을 대표하는 의느님 작품이었다. 피부는 만화 주인공의 그것처럼 흠 하나 없이 반들거렸다.

  "새색시가 얼굴이 왜 이래요."

  매일 잠도 못 자고 주말도 쉬지 못하고, 나름 웨딩드레스 핏을 위해 다이어트까지 하고 있었다. 결혼이 원래 이리 힘든 건가요, 라며 나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정은 하소연이 되었고 '좋은 데 힘들어요'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너무 갑자기 흐른 눈물이라 나도 놀랬는데, 인조인간처럼 생긴 언니가 더 놀라웠다. 로봇 같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었겠네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힘든 결혼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나는 순식간에 투정을 부리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인생 상담실이었던 그곳의 공기는 한순다시 피부관리숍 원장과 고객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 나는 하루 1,500원짜리 김밥 한 줄과 집에서 가져간 커피믹스 두 봉으로 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다이어트도 다이어트지만, 돈이 없었다. 

  그런 내가 그날 피부관리 5회 60만 원을 끊었다. 한 번은 서비스 포함이라며 친정엄마와 오라는 사장을 뒤로하고, 꿈처럼 허무맹랑한 비용이 찍힌 영수증을 손에 쥔 채 옥탑방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었다.


  결혼식이 2주가 안 남은 어느 날, 논문을 쓰다가 잠시 엎드려 자고 일어나 보니 키보드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코피였다. 거의 매일 4시간 정도를 자며 논문을 쓰던 나날이었다. 그날은 집에 일찍 가서 잠만 잤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 감기 몸살이 시작되었다. 5월 말, 초록은 푸르르고 하늘은 더 푸르른데 나는 창백한 얼굴에 코피에 감기를 달고 살았다. 스트레스와 다이어트로 인한 면역력 감소가 원인이었다. 병원에서 약을 받아먹으며 버텼다. 나의 아가씨 시절 마지막 소만이 그렇게 지나갔다.


  5월 말인데도 30도가 넘는 날이었다. 청담에서 메이크업을 마치고 신촌까지 길도 막혀 결혼식 직전에 겨우 식장에 도착했다. 신부대기실 사진을 몇 장 찍지도 못하고 바로 아빠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었다. 평범한 결혼식이었다. 남편이 축가를 부르다 가사를 잊어 다시 불렀지만 또 가사를 틀려 완창 하지 못하고, 친구들 사진에 70%가 나의 친구들이었던 것을 빼고는 지극히 평범한 K-결혼식이었다. 

  식이 끝나고 한복으로 갈아입고 피로연장을 돌았다. 구미와 익산과 순천과 마산과 타이베이에서 친구들이 나를 보러 와 주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고, 남편 친구들과의 어색한 인사도 많았다. 폐백실로 향했다. 폐백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대추를 던지고 그 대추를 입에 물고 사진을 찍었다. 어르신들께 돈이 담긴 봉투를 받고 절을 했다. 남편 등에 업혀 사진을 찍고 나서 '이제 끝났어요,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곤해서 누운 것 같은데, 까무룩 해졌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고, 링거가 내 팔 어딘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남편이 피로연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인생 첫 기절과 첫 링거였다. 다음날 아침까지 깊고 단 잠을 잤고, 아침에 눈뜨고 보니 창밖에 광화문 뷰가 펼쳐졌다. 식장에서 이벤트로 주었던 호텔 1 박권이 떠올랐다. 이제는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괜찮냐고 물어왔다. 개운했다.






  신혼여행 가서도 아침과 밤으로 학과 조교에게 메일을 보냈다. 겨우 70%를 쓰고 논문 심사에 넘겼는데, 부족한 부분을 써서 내고 수정하라는 요청이었다. 메일의 마지막은 '신혼여행 중이라 자세히는 답할 수 없으니 한국 돌아가서 다시 확인하겠습니다'였다. 무사히 돌아와 짐 정리도 제대로 못한 신혼집에서 논문을 마무리지었다. 검은 논문 50여 권을 받아 들고 나니 여름의 한가운데였고, 그 여름의 끝에 석사 학사모를 썼다.


  인생은 보란 듯이 나의 계획을 벗어나고 비웃고 제삼자가 되어 나의 난감함을 관람했다. 석사를 시작할 때는, 석사 학위를 발판으로 대만에 취업하기 위해서였다. 학위가 높을수록 대만에서 외국인이 일자리를 쉽게 찾는다는 말에, 일을 하면서도 무리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석사를 마친 나는, 한국의 군인과 결혼한 유부녀가 되어 있었다. 석사 동기가 맺어준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8년간, 그 이전의 30년의 날보다 훨씬 뜨겁고 차갑고 즐겁고 슬프고 우울하고 행복한 이 많았다. 결혼 이전의 나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고, 입맛도 변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아이에 대한 마음은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모든 진실은 모순이라고 어느 작가가 말했다. 결혼생활 역시 그렇다. 3일을 죽고 싶다가 3일을 이혼을 떠올리다가 3일은 지상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다가 3일은 아이를 키우는 기쁨에서 허우적거리는, 말도 안 되는 모순과 역설이 뒤범벅된 현장이다.

  이런 나의 결혼생활의 시작에는, 역시나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기대도 고통도 없었다. '해치워야 하는' 결혼식의 마무리 끝에 비로소 진짜 결혼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결혼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다. 그냥 하루하루 엄마와 아내로서의 나를 앞세우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렇게 지내다 삶이 무르익은 시절에 돌아봤을 때, 성급했던 결혼식과 그 후의 삶이 내게 준 진정한 의미와 선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갈수록 창대해지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텅 빈 11평 빌라가, 비록 군 관사이기는 해도 어찌 됐든 32평이 되었다. 숫자가 보여주는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지금의 나의 집에는 세 딸의 성장과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푸르름 가득한 5월의 끝무렵, 소만을 지나며 결혼과 부부의 인연과 가정에 대해 가득 찬(滿) 마음을 꺼내어 본다. 

     

막내의 손놀림이 가득한, 우리 집 5월 마지막 주 달력




*절기 설명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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