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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사람은 죽을 앞에 두고 죽을 운명을 거스른다

죽을

by 진샤



할머니를 생각하면, 흰 죽과 빨간 양념게장이 생각나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그것만 드셨어요. 흰 죽이 주식이고 유일한 반찬이 양념게장이었어요. 그래도 초반엔 게장을 들고 쭉쭉 빨아 드시고 가끔 와그작 씹기도 하신 것 같은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친척 언니가 옆에서 살을 발라 흰 죽 위에 올려 떠먹여 드렸어요. 그러면 주름이 쪼글쪼글한 입술을 벌려 앙 드시고는 우물우물 씹으시고 또 쪼글쪼글한 입술을 벌리셨어요. 씹을 게 무어 있다고 우물우물 씹으셨을까요.

저는 조금은 멀리서 그 장면을 그저 지켜보았어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고 친하지도 않고, 먼저 다가가는 싹싹한 손녀는 아니었어서 언니가 할머니를 먹여 드리는 걸 가만히 지켜만 봤어요. 언니가 빨리 먹여드리고 나랑 놀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

할머니 방에는 늘 된장 냄새가 났어요. 네모나고 세모난 메주들이 벽에 걸려 있었어요. 채널 손잡를 돌려야 채널을 바꿀 수 있는 브라운관 티브이도 있었어요. 양로원에 가지 못하시는 즈음부터 그 방에서 티브이만 보시고 흰 죽과 빨간 게장을 드시며 지내셨어요.

그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신기했어요. 다른 건 거의 안 드시고 죽과 게장만 드시는데도 장수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크게 아프신 곳도 없으셨어요. 거동은 불편하셨지만, 병원 신세를 지실 정도는 아니었어요. '영양 상태가 고르지 않을 텐데' 싶어도 할머니는 오랫동안 꽤 괜찮으셨어요. 연세가 많으셔서 이 곳 저 곳이 조금씩 불편하셔도 생각하시거나 말씀하시는 걸 보면 여전히 건강하셨어요. 죽과 게장 뿐이었는데도요.

그렇게 식사를 마친 할머니를 가끔 들여다보면, 할머니는 저를 옆에 앉으라 하시고는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옛날이야기의 전부를 저는 외울 수 있어요.

"일본 순사들이 가르쳐 줬다. 어머니는 오까아상, 아부지는 오또오상, 할머니는 오바아상, 할아버지는 오지이상이다. 숫자도 배웠다. 이찌니산시고로쿠.. 아이고 오래 되서 기억이 안 난다."

할머니 옛날이야기의 전부예요. 들을 때마다 할머니와 거리는 더 멀게 느껴졌어요. 일본 순사라니. 그런 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건데, 그 세월을 살아오신 사람이 내 할머니라니. 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그런 마음은 티 안 나게 꾹꾹 눌러두고, 그저 할머니 옆에서 오까아상, 오또오상, 오바아상, 오지이상 하며 따라 했어요. 그러다가 나란히 앉아 티브이를 보곤 했어요.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병원으로 가셨고, 얼마 후 돌아가셨어요. 마지막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해요. 두 눈을 겨우 뜨고 저를 보셨어요. 두 눈을 '겨우' 뜨시는 모습을 보고, '눈을 뜨는 것마저 힘을 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병실에서 나와 복도 구석으로 갔어요. 왈칵 쏟아졌는데, 금방 멈추지 않아서 난감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할머니는 병원에서도 죽을 드셨겠지요. 게장은 모르겠지만, 죽음 직전에도 죽을 드셨을 거예요. 그래서, 죽을 생각 하면 할머니부터 떠올라요.







얼마 전 일주일 내내 첫째를 시작으로, 저 그리고 막내와 둘째 순서로 장염 치레를 했어요. 거의 매일 병원을 가고 약을 받아오고 죽집을 들렀어요. '가능하면 죽을 먹이시고 어머님도 죽으로 식사하세요'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 때문이었어요. 그래도 아이들 먹일 거니 흰 죽보다는 이것저것 들어간 죽을 샀어요. 소고기 야채죽, 전복 버섯죽, 게살죽. 아이들이 배도 아프고 죽을 좋아하지 않아 먹이는데 애를 먹었어요.

먹고 남은 죽을 버리려다 슥 휘저어 봤어요. 몸에 좋은 것들이 골고루 들어있었어요. 그리고 떠오른, 할머니와 죽. 할머니께서 이 죽을 드셨다면 좀 더 건강하게 지내실 수 있으셨을까. 이 죽을 드셨다면 좀 더 기운 있는 눈빛으로 나를 보실 수 있으셨을까. 생각 하고 보니 바로 고개가 저어졌어요. 아마 할머니는 그 죽을 안 드셨을 거예요. 할머니는 흰 죽을 드셨어요. 하얀 찹쌀가루 보글보글 끓은 죽. 순수한 맛에 빨간 살점 하나 올린 수저 앞에서만 관대한 입술을 가진 분이셨어요.

할머니 때문인지, 저는 '죽'하면 '죽음 앞에서 선 자의 음식'으로 생각되어요. 죽음을 앞둔 자의 생명줄, 죽음으로 가는 길의 먹거리.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죽이 있기에 죽음은 바로 오지 않아요. 죽 덕분에 죽음은 최대한 천천히 오거나 또는 함부로 올 수 없게 되요. 죽을 먹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을 지연시키는 행위였어요.

그렇기에 죽을 쑤는 사람도 애를 써야 해요. 죽을 먹는 이를 위해, 그의 생명이 죽음으로 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시간을 제물로 바쳐 대신 죽여 가며 죽을 쑤어야 해요. 정성이 들어가는 만큼 죽을 먹는 이는 더 기운을 차릴 수 있고 죽음에서 멀어질 수 있어요.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장염에 고생이어도 하루만 죽을 먹으면 좋아질 수 있어요. 장염이 아니어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죽을 먹어요. 사실 흰 죽은 많은 재료가 필요 없어요. 쌀과 죽 쑤는 이의 정성만 있으면 돼요. 먹을 때 간장 정도만 곁들이면 돼요. 우리 몸은 예민해서, 딱히 맛이나 영양가도 없는 죽에 담긴 '정성'을 알아차리고 금방 좋아져요.

'정성', 이것을 먹고 싶어서 우리는 아프면 죽부터 생각이 나는 건가 봐요. 결국 죽음과 통증을 멀리 밀어내는 것은, 곁에 있는 이의 마음과 수고가 하나로 스민 '정성' 그것이었어요.


아, 이제서야 할머니의 비밀이 풀리는 것 같아요. 할머니는 흰 죽과 빨간 게장만 드신 게 아니었어요. 죽을 쑨 마음과 곁에서 먹여준 그 마음, 그 안에 들어간 '정성'도 함께 드셨던 거였어요. 당신의 오랜 일생의 마지막에, 죽과 정성의 손길이 있었음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참 다행이에요.






*이미지와 시의 영감은, '로사'님의 블로그에서 빌렸습니다. 로사님께 허락을 구하고 사용하였습니다.

(시필사 모임의 sunflower님, 감사합니다.)

https://blog.naver.com/3721rosa/222437715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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