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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같이 붉은 하늘이 운명을 애도한다

콩나물의 장례

by 진샤

늘 그랬듯, 눈을 뜨자마자 '오늘 뭐해먹지'부터 생각해요. 먹고사니즘은 지치지도 않아요. 그 부지런함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냉장고 안을 복기해요. 그저께 장 봐온 것들 중에 콩나물만 유일하게 생존해 있어요.

콩나물국을 끓여야겠다. 아이들을 위한 메뉴예요. 막내를 위해 맑은 국이 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사실 제가 먹고 싶은 건 무침이에요, 고춧가루 넣고 팍팍. 그럼 무침도 해야지, 아이들을 위해 안 매운 무침도 하고. 다행히 콩나물을 넉넉히 샀어요. 국도 끓이고 무침도 종류별로 할 수 있어요. 오늘은 콩나물 파티를 해야겠다.


콩나물을 꺼내어 씻다가 하얗고 매끈한 몸을 한참 봐요. 가라앉은 콩나물 대가리를 손으로 훑어봐요. 이것들이 어쩌다 이리되었나. 나는 그리 세게 흔들지도, 씻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처참한 꼴을 보일 일인가. 흐르는 물소리를 배경으로, 공상에 빠져요.

공상은, 시와 현실 사이의, 일종의 경계선인 셈이에요. 그 공간을 거쳐야만 시를 쓸 수 있어요. 저에게 시를 쓰기 위한 필수 조건, 공상이라는 관문 지나기.


어린 시절 사온 콩나물. 검은 봉지 안에 한가득 들어가고도 괜히 한 주먹 더 얹어주었던 그 손. 이상하게도 그 손의 주인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손의 쪼글쪼글했던 주름은 기억이 나요. 그리고 떠오르는, 나의 노부부.

대학 시절, 학교 앞 육교가 있어 늘 건너야 했어요. 화요일과 목요일, 하교 시간에 맞춰 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노부부를 볼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땅을 보며 걷는 노부부. 전 그들이 스쳐 지나가고 난 후에도 돌아서서 그들이 내려가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처음엔 그저 걱정이 되었었나 봐요. 잘 내려가시려나, 넘어지시면 안 될 텐데.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의 뒷모습이 보내는 무수한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어떤 때는 막연하게 그들의 삶이 보이기도, 들리는 듯도 했어요. 안갯속 같았고 웅얼거림으로 다가왔지만 분명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이야기를 알려준 주체는, '옷'이었어요. 그냥 보기에 걸음이 더 불편해 보이는 건 할머니였는데, 할머니의 옷은 매일 바뀌었어요. 자주색에 꽃이 있는 외투였고, 옅은 쑥색 카디건도 있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의 옷은 대부분 같았어요. 같아 보이는 다른 옷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20대의 젊은 내게는 그저 같은 옷으로 보였어요. 옷자락 끝이 남긴 여운에, 인생의 마무리 그날들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게 되었어요. '돌봄'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무슨 케어, 어떤 센터, 가족 같은, 정성을 다하는, 이런 휘발성 강한 용어가 아닌 '돌봄'의 묵직한 뜻 말이에요.

그들의 이미지가 강했었나 봐요. 시를 쓸 때, 종종 그들은 제 시에 등장해요. 시의 주어가 애매할 때 그들은 불쑥 뒤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시의 배경이 되어 주거나 갑자기 시구(詩句) 하나를 던져 주고 사라지기도 해요. 그 시구를 붙들고 있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시가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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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육교의 노부부는 분명 따뜻한 느낌인데, 제 시 속의 노부부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곁에 두고 있어요. 제 시 속의 노부부들이 갖는 퀴퀴한 냄새가, 죽음이 그들을 거세게 흔들어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그 때문이에요. 그래서 내 시의 노부부들은 죽음 앞에 조금은 처연한, 그런 이유로 더 서글프고 안타까운 이들이에요.

그나마 다행인 걸까요. 생의 마감의 자리에서 그들은 늘 함께 해요. 역시, 육교의 노부부의 이미지가 강한 탓이에요. 할머니의 손을 잡아준 할아버지의 손이 제게 건넨 힘이 큰 까닭이에요. 그래서, 서글픈 마감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끝까지 함께 해요. 그래서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보기보다 서글프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목요탕에서 미끄러진 건지 계단에서 넘어진 건지 저도 몰라요. 시 속의 할머니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할아버지가 며칠 째 일어나질 못하고 있어요. 눈도 잘 뵈지 않고 맛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이를 왼쪽 다리에 감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콩나물무침을 하려고 절뚝거리며 콩나물을 한 봉지 사 왔어요. 마트 점원이 '날씨가 추워지니 국이 좋겠다' 해도 할머니는 무칠 생각뿐이에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무침을 해놔야 할아버지가 일어나 먹을 거니까요. 할아버지가 먹는 걸 보고 난 후에야 할머니도 같이 잠들 수 있을 거 같으니까요. 이제는 더 살지 않아도 되니까, 죽기 전에 영감이랑 같이 한 끼 하고 싶은 마음뿐이니까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콩나물을 씻다가, 오래전 제 젊은 날을 스쳤던 이들을 떠올리다가, 젖은 손을 닦고 앉아 시를 썼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함께 그렇게 손을 잡고 있길 바라면서요.


걱정은 덜 해도 될 것 같아요. 노부부가 아닌, '콩나물'의 장례예요. 할아버지가 일어나 달달한 콩나물무침을 먹을 수 있길, 할머니가 우묵한 눈으로 그걸 지켜볼 수 있길 바라요. 그래서 그들의 장례는 좀 더 미뤄질 수 있길 바라요.





저도 이제 콩나물국을 끓이러 가야겠어요. 새끼들의 입에 들어갈, 시(詩)만큼 애틋한 맛이 나는 무침을 하러 가야겠어요. 시만큼, 어쩌면 시보다 더 중요한 일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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