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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빨판 아래 희망을 허락받으며

문어의 장래희망

by 진샤


첫째 아이의 자연관찰 유튜버 중에 '문어 관찰'이 있었어요. 자연스레 넘어간 다음 장면은, 대왕문어 먹방 유튜버였어요. 그녀는 문어가 있는 어시장의 수족관에서부터 촬영을 했어요. 다리를 들어 올리면 자기 키보다 훨씬 큰 문어를 보며 꺅꺅 소리 지르다가 어느새 주인아주머니 도와 내장을 꺼내고 있더라고요. 그녀를 따라 우리 아이들도 꺅꺅 소리 질렀어요. 엄마, 문어 다리가 엄청 길어요!

문어의 검은 먹물이 어시장 바닥에 가득했어요. 다리의 움직임이 조금씩 둔해지더니 속이 텅텅 비어버린 문어는 뜨거운 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잠시 후 화면이 바뀌고 어시장 수족관 주인아주머니는 숙회가 된 문어의 다리를 잘라 유튜버에게 건네주었어요.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연하지?' 물었고, 유튜버는 '진짜 부드럽네요!'라며 온갖 오버스러운 표정으로 답했어요. 그걸 보는 첫째 아이도 말했어요. 우와, 정말 맛있겠다.






어린 시절, 강에서 다슬기를 잡아왔어요. 잡을 때는 그냥 재미있었는데 집에 와서 꼼지락대는 그 녀석들을 뜨거운 물에 넣으려 하자 너무나도 불쌍해서 혼자 구석에 가서 울었어요. 나는 절대 먹지 않을 거야, 저렇게 만들려고 잡아온 게 아닌데, 미안해, 골뱅이들아. 그 살아있는 것을 뜨거운 물에 넣는 엄마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느껴졌어요. 엄마가 저런 사람이었다니, 골뱅이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그러나 잠시 후, 저는 동생과 엄마 사이에 앉아 다슬기를 파먹고 있었어요. 늘 그랬듯이 참 맛있었어요. 방금 전 울었던 눈물은 도대체 무슨 눈물이었는지,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고 다 먹고는 미련 없이 껍데기를 버리곤 했어요.


움직이는 생명이 나로 인해 희생되는 모습 앞에서는 유난히 참담해지고 슬펐어요. 나의 생명을 위해 저 생명의 아스러지는 것을 보는 것, 이게 삶의 올바른 모습이 맞단 말인가. 그러나 늘, 그 희생도 잠깐이었고 그 희생 앞에서 서글픈 마음도 잠깐이었어요. 소의 동그랗고 검은 우직한 눈망울 앞에서는 육식이고 뭐고 생명의 순수함이 가득 차오른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두세 시간 후면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서 정육점을 기웃거려요. '닭장' 같은 아파트, 라는 말을 듣고 닭장 안의 닭들이 불쌍해서 평생 닭고기는 안 먹고살 것 같은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가, 그런 날 저녁은 유난히 치킨이 생각나요. 제게 있어 이 것은 어린 시절부터 평생의 난제이자 언행일치와 불일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일치에 패배한 사건들이에요.

그래요, 사건. 매번 사건의 원인도 알고 매번 일어나며 매번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만 그저 '반복'되기만 하고 종결될 수 없는 사건. 마무리되고 나면 '나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라고 뻔뻔하게 수치심과 죄스러움을 덮어버리는, 불행의 심리 상태가 지속되는 사건.

그런 치욕적인 생각을 덮어버리는 엄마의 불순한 행위를 보고 배워서인지, 나의 아이는 '생명(生命)'의 소중함에 무디게 자라는 것 같아요. 할머니가 문어숙회를 해주신다고 살아있는 문어를 사 오시면, 검은 비닐 속 문어를 보며 '우와, 다리 보세요. 엄청 부드러워 보여요. 맛있겠다'라고 말해요. 문어 삶는 법을 보고 배우라는데, 눈물이 차올라 못 볼 것 같은 저를 보고 아이가 '엄마 왜 울어요'라고 물으면, 그 눈빛이 너무나도 순수해서 더 참담해지는 기분이에요.

문어 다리 안의 생명력보다는, 그 연한 쫄깃함을 먼저 떠올리는 아이.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엄마 탓에 아이도 그렇게 된 것만 같아 아이와 희생된 생명 모두에게 그저 미안해요. 우리에게 먹거리로 와준 모든 생명을 앞에 두고 감사하는 마음, '자연의 순환'이라고 일컬어지는 미안함에 대해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어요. 슬픈 눈망울 속 영혼을 느끼고 안아주는 마음을 키우는 아이로 자랄 수 있게, 엄마가 먼저 영혼의 때 묻은 곳을 찾아내 닦아야겠어요.






서구 문화에서 문어의 이미지는 '악(惡)'에 가까웠어요. 인어공주의 '우슐라'도 문어의 모습이고,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을 떠올리면 해적선을 감아도는 문어의 다리가 먼저 생각나요. 그러나 그건 순전히 '이미지'일뿐이었어요.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를 보고 나면, 공감 선생님으로 집에 문어를 데리고 오고 싶은 생각마저 들어요. 뛰어난 지능으로 인간과 교감하는 장면들, 사람 손에 자신의 다리를 가만히 올리는 장면들을 보노라면 경건한 마음마저 들어요. 그런 문어를 그저 '연하다', '부드럽다' 같은 형용사로만 대체하는 영상들이 품고 있는 '생명에 대한 폭력성'을, 아이에게 어찌 알려주면 좋을까요. 문어 역시 너와 똑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어떻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을까요.

생명이 먹거리가 되어 오는 과정, 그 과정을 보이지 않게 숨겨둔 야만적인 문화를 아이가 받아들이게 이해시켜 주는 것 또한 엄마의 일임을 먼저 인정해야 해요. 그 인정을 바탕에 깔아두고, 아이와 '생명'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려 해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알려주신 작가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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