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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마에 흐르던 서사는

퇴고의 과정

by 진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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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낸 이야기를 쓰고 나면, 기운이 달린달 까요. 집이라면 일단 벌러덩 누워야 해요. 카페나 도서관이라면 달달한 것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혹은 빠르게 씹어야 해요. 창밖을 한 번 바라보고 삼킨 것의 맛이 남아있는 혀를 굴려보며 다음 것을 입안으로 넣어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소위 구성이나 플롯 같은 것을 생각해 내고 문장으로 실재화하다 보면, 나는 이야기와 글의 도구가 된 것만 같아요. 그래서 억울하고


기쁘죠.


이 정도의 이야기, 그 탄생을 위해 나는 버려진 것인가 소용된 것인가


이야기와 문장이 맘에 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쓰레기예요. 아, 토나와, 냄새나, 역해.


역한 구역질이 시작되는 순간, 다행히도 시가 왔어요. 퇴고를 하기 싫어하는 내게, 그렇게 퇴고보다 한 발 빠르게 시가.



나는 아직 초고의 몸



시는, 이 구절을 내 이마 어디 즈음 불친절하게 쏟아부어요. 아직 제대로 받아 적지도 못했는데, 다음 구절이 주르르 주르르. 손 위에 헝클어진 시어들을 잘 나열해 보아요. 맞아요, 이미 시는 떠났어요. 나의 할 일은 나열과 정리정돈과 기억을 더듬어 배치. 실패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쉽지만 안녕, 다음 기회에.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참으로 뻔한 비극임을 알고 있는 시가, 이야기 속에서 당신을 덜어내래요. 당신을 오려낸 나의 이야기는, 슬픔마저 사라진 비극. 이제는 그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하게 된 이야기,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몰골을 가진 이야기가 되었어요.

당신만 있다면 비극도 상냥하기만 할 텐데, 우리 사이에서는 고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어떤 혀 위에서도 문학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존재 그 자체로서 가능한 일. 당신을 중심으로 흐르는 '이야기'는 당신만큼 탁월하지 못해요. 문장은 어수룩하고 표현은 촌스럽죠. 소설적 묘사와 우주적 거리를 가진 나의 묘사는 별의 죽음처럼 사그라들어요. 퇴고는 어느덧 등 뒤에서 속삭여요, 어서 시작해야지, 쓰레기 같은 글에 어울리는 흐리멍덩한 퇴고를.


퇴고를 할 만한 명징한 영혼이 내게는 없어요. 지금의 나는, 시가 흘리고 간 시어와 어휘들을 재배치하기에도 너무 바빠요. 퇴고라니요, 당신이 없는 이야기인데. 자판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나의 손가락들 사이에서 당신이 해맑게 나를 보고 있어요. 기다릴게, 너의 시가 마무리될 때까지. 너는 언제나 나보다 시가 먼저였으니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당신 그렇게, 자판 속으로 가라앉았어요. 그렇게, 풀 한 포기 피어나지 않는 나의 자판이 당신의 자리가 되었어요.


퇴고를 다 했어요. 마지막 퇴고를 위해 프린트를 하고 빨간 펜을 집어 들었어요. 펜은 괜히 들었군요, 펜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했어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글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다 갖추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태어나지 말기를 완성할 것. 파쇄가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실패의 완벽한 성공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




퇴고와 거의 동시에, 시어의 재배열도 끝났어요.


마지막 퇴고는
언제나처럼
최초의 파쇄



그러니 당신,
이제 일어나요,
키보드에서 일어나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줘요,

한 개의 기념비적 미래로 태어나 줘요.*







* 심보선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중 '심장은 미래를 탄생시킨다'의 마지막 구절 인용






The last polishing is,

As always,

The first shredding.


브런치 최용훈 작가님께서 시를 영문번역해 주셨습니다. 제 시로는 세번째입니다. 늘 기울여주시는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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