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을 좋아해요. 멍을 때리고 딴생각을 하고 잡스러운 생각을 해요. 안드로메다 끝까지 갔다가 20년 전 그 공중전화기 앞에서 머물기도 하고 홉스와 롤스의 대담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지난주에 본 드라마 주인공 대사에 피식 웃기도 하고. 발만 지상에 있지 사실상 머릿속은 내가 발 디딘 곳을 제외하고 모든 곳을 날아다녀요.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생만큼 밖에 알지 못해서, 종종 나의 미래를 생각하다가도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멈칫하게 돼요. 내 과거의 어느 부분이 미래에 뒤섞여있는 걸 발견할 때 그래요. 사실상 아무 무늬도 없어야 할 미래에 얼룩을 보면 '이건 도대체 어디서 온 건가' 싶어 지는데, 어쩔 수 없이 지난 삶의 흔적들이 묻어온 거예요. 미래라고 한껏 펼쳐놨더니 과거에서 흘린 오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꼴이라니.
고개를 휘휘 젓고 현실감을 찾으려 샤워를 해요. 씻는 내내 공상의 주제는 '글쓰기'. 이런 제목, 저런 문장들이 부지런하게 튀어나와요. 왜 꼭 이렇게 메모할 수 없을 때 팡팡 튀어나오는 건지. 수필의 머리카락이 빠진 자리에 시만 허락할 수 있는 어휘들이 채워지고, 그 옆으로 소설의 문장들이 새로 돋아나요. 내가 쓰고 싶은 것이 에세이인가, 문학'작품'이라 불리는 것들인가 아니 '문학' 근처를 어슬렁거릴 깜은 되는가.
한껏 눅진해진 채 머리를 말리면, 그 와중에도 글감이 곁을 스쳐 지나가 꽤나 난감해져요. 낡은 드라이기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은 몇 살일까, 드라이기로 나오는 바람은 진짜 머리를 말리고 싶긴 할까, 마치 엄마이지만 엄마이고만 싶지는 않은 나처럼. 이런저런 생각 속을 헤짚다 보면, 머리를 말리는 내내 '내 머리 속도 좀 말랐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거예요.
커피를 타고 창가에 서요. 창가의 색들은 어제보다 조금 더 옅어져 있어요. 계절이란 게 이런 건가, 로 시작해서 공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요. 17살의 이 계절에서 26살의 같은 계절로, 그 시간에 함께 했던 이들 몰래 혼자 점프, 점프.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평면적인 것이던가, 어느 작가님 말대로 시간은 편도로만 흐르는 것인가, 유턴이 가능한 시간이라면 그건 우주의 어느 공간에서 가능할까, 우주에서 시공(時空)이란 단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긴 할까, 공간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일까 시간이 공간을 점령하는 것일까.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실존'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감각은 실재하는가 실존하는가. 존재는 감각으로 증명이 획득되는가. 어느새 비어있는 커피잔은 내 손에, 언제 주차되었는지 모를 앞 동 이사 차는 눈앞에. 사다리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이에요.
이 시는 지난해 여름의 종점에 쓰였어요. 어제보다 붉은색이 더 입혀진 나무 아래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어요. 두 팔을 앞가슴에 모으고 다리는 곧게 편, 조신한 자세로 죽은 사마귀. 빛바랜 초록 풀잎 위에 영롱한 자신의 초록을 눕혀놓고 죽음을 전시하고 있었어요. 어쩌다가 저런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을까, 죽고 난 후 무료로 구경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증오하고 있을까, 여름의 끝에 자신의 생명의 끝이 놓이게 될 걸 알고는 있었을까.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오는 길에 보니, 아이들과 사마귀와 풀잎이 모두 없어졌어요. 미물의 종국(終局)은 이토록 희미한 절망뿐이구나, 라는 회한이 가을보다 일찍 물들었어요.
집에 오니 과일 선물이 배달되어 있었어요. 제주에서 올라온, 이름만 바뀌고 맛은 비슷비슷한 '~향'. 얼른 하나를 까서 아이들의 입에 넣어주고 내 입에도 넣어주었어요. 우리 앞에 배정된, 비슷비슷하게 맛있는 주황빛 과육은 6개. 더 먹으려 초록창에 물어보니, 이번 달 통장의 마이너스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대답 대신 돌아왔어요. 아니, 감당할 수 없어. 20분 전까지만 해도 실존과 감각의 경계에서 서성이다가 제주산 과일 앞에서 쓴 침을 삼켜요. 이게 원래 이렇게 쓴 맛이었나.
핸드폰이 울려요.'... 시세 차익을 보실 수 있습니다. XX역 oo힐 타운하우스, 므델하우스 방문 시 예약 필요합니다. 김ㅇㅇ차장 꼭 찾아주세요.'저기요, 김 차장님, 므델하우스라니요, 아무리 힘들어도 밥은 드시면서 영업하세요. 가족이 보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전화를 할까 하다가, 괜한 예약만 잡고 실없이 웃으며 전화를 끊을 게 뻔해서 하지 않아요. 친절함 앞에서 웃음은 헤퍼지고 마음은 쉽게 물컹해져요. 모델하우스 현장에서는 몇 억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라가지만, 계약서라는 종이 한 장 앞에서는 이름 석자가 결코 아무렇지 않아요. 그 미안함이 육중해서 문자는 삭제되고 수신은 차단되어요. 비로소 나는 현실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어요.
160이 조금 넘는 신장. 길지 않은 이 길이가 무한히 길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많아요. 머리는 공상과 망상과 허상의 영역을 서성이고, 발은 대한민국 경기도 어딘가를 딛고 있어요. 머리와 발의 거리가 한없이 늘어나는 날은 여지없이 시를 써야 해요. 모든 상념을 빚어 문자로 만들어내야 해요. 그렇기에 저는 종종 '현실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요. 아이들을 씻기면서 문장을 떠올리고, 깍둑썰기를 하면서 플라톤에게 따져요. 혼자 '뭐하는 짓이야'라고 웅얼대지만, 어느새 잡념들은 청소기 속 먼지처럼 돌돌 말려 머릿속을 돌아다녀요.
띵동, 어느 방향에서인지 알람이 울려요. 어설픈 생각들이 시의 외양을 하고 걸어와요. 제가 할 일은 받아 적는 일뿐이에요. 그렇게 쓰인 시예요. 잡념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시적 허용'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행과 연을 나누었어요.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어요. 시가 제 뒷머리채를 잡아끌고 나무란다 해도 제대로 써낼 생각은 없어요. 발만 땅을 디디고 있을 뿐, 머리는 현실을 살지 못하는 제가 쓸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시임을 숨기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꽤나 큰 간극을 겨우 160센티미터에 욱여넣고 사느라 피곤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이런 사람이에요. 모델하우스 김 차장을 응원하는 마음, 죽은 사마귀를 애도하는 마음, 앞 동 이사 정리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 정도의 현실감을 갖고, 시를 떠올리며 살래요. 마이너스 통장이 노려볼 때 외면하지 않을 거리에서 문학을 떠벌리며 살래요. 이것이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만 같아서요.
현실감 없이 사는 저도 가족이 아플 때만큼은 몸과 마음이 현실이 붙어있게 됩니다. 간절한 기도와 도움의 손길로 현실을 채워나가는 문우님이 계십니다. 블루애틱 작가님 가족분의 빠른 쾌유와 완치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A형 혈소판 지정 수혈, 현실에 발 굳게 딛고 저 역시 계속 찾겠습니다. 바라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