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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말 응원만큼 피곤하게 몰려온다

치어리더의 귀가

by 진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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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제게 3월은 봄의 시작이라기보다 프로야구 시범경기의 시작이었어요. 작년의 에이스가 올해의 에이스로 마운드에 설 수 있는가, 도루왕은 올해도 왕좌를 지킬 것인가(도루왕의 100미터는 몇 초가 나올까), 올해 홈런왕은 우리 팀에서 나와야 할 텐데, 외야수 놈들은 껌 좀 그만 씹고 후라이볼 캐치 능력을 더 올리고 와야 할 텐데. 온갖 기대와 설렘이 3월의 훈기보다 더 뜨뜻했어요.

그렇게 4월부터 10월까지, 대부분은 11월 가을야구까지 뜨겁게 야구와 함께 했어요. 야구 없는 월요일이 제게 휴식이었고, 주말은 잠실과 목동과(그땐 고척돔이 없었어요) 인천 문학구장을 부지런히 옮겨 다녔어요. 팀 레플리카 한 장 못 사입을 정도로 월급은 적었지만, 레플리카 입은 관객보다 더 열심히, 목이 터져라 응원했어요. 문학이 홈인 팀을 응원해서 문학에서의 경기는 대부분 불꽃놀이와 끝났지만, 잠실과 목동에서는 달랐어요. 잠실에서 패하고 집에 오는 길은 지하철 환승역에서 쉬어야 할 만큼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목동구장에서 집은 가까웠지만, 지고 오는 길은 일부러 빙빙 돌아서 집까지 걸어갔어요. 패인을 분석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제겐 선수들의 경기력만큼 중요했던 것이, 치어리더들이었어요. 대학시절 동아리는 치어리더였고 저는 여자짱이었어요. 프로야구팀 치어리더와 일개 대학 동아리 치어리더는 어째 뉘앙스부터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치어리더'로서 저는 그들에게도 꽤 많이 집중했어요. 그들의 미소와, 동작과, 눈빛과, 어깨 결림과, 서글픔과 짜증과 분노와 허망함과 돈벌이와 시선을 감당하는 몸, 모든 것을 자세히 봤어요.


그 언니는 유독 예뻤어요. 언니가 아니었을 확률이 더 높지만 치어리더들은 그냥 다 언니예요(식당에 가면 다 이모인 것과 비슷한 거예요). 유독 더 많이 웃고 자세가 좋았고 동작이 컸어요. 괜히 머릿결도 더 좋아 보였고 다리는 더 길어 보였어요.

그날은, 그러니까 비가 올 것 같아서 친구에게 '얇은 옷을 챙겨 올 걸 그랬나' 했더니 친구가 '됐어, 응원하다 보면 더워져'라고 했던 그날은, 그 언니의 시선이 한 곳에 오래 머물렀어요.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가 보니, 어떤 커플, 내내 껴안고 뽀뽀하고 붙어있는 커플. 전 남자 친구인가, 썸 타다 연락 끊긴 사람인가, 그냥 이상형인 건가. 날씨가 쌀쌀해서였는지 그날따라 언니의 동작은 시원치 않았어요. 표정은 자주 없어졌어요(無표정). 언니를 보며 힘내서 응원해야 하는데 언니의 울적한 표정을 볼수록 힘이 빠졌어요. 오늘 경기 지면 다 저 놈 때문이다,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5회가 끝날 무렵 언니의 응원봉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었어요. 언니의 동작들이 쭈그러들었어요. 응원봉에 한 옴큼 달라붙은 머리카락, 그 접착은 껌 때문이었어요. 언니는 계속 웃었지만, 입에만 걸린 미소는 미간의 주름을 어쩌지 못했어요. 제가 올라가서 떼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5회 말이 병살로 순식간에 끝났어요. 옆에 있던 치어리더가 응원봉에 붙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순간 '아' 하고 소리 지르는 걸 들었어요. 먹고사는 일에 쉬운 게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핫도그를 사러 갔어요.

6회 초 경기의 시작과 함께 돌아온 언니의 머리카락은 멀쩡했어요. 6회 말 우리 팀은 연타석 홈런을 쳤어요. 그 언니도 내 친구도 그 커플도 나도 모두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를 때, 어떤 아저씨가 언니의 다리를 잡아당기는 걸 봤어요. 언니는 넘어졌지만 다들 소리를 지르느라 대부분은 보지 못했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저씨를 데리고 갔어요. 저는 그 모든 과정을 보느라 소리 지르는 걸 잠시 멈췄어요. 일어난 언니는 다리를 툭툭 털고 자리를 잡더니 '최 O, 최 O, 최 O' 하며 홈런 선수의 이름을 외쳤어요. 옆 치어리더와 한 두 마디 나눌 새도 없이 관중을 향해 웃으며 홈런 영웅을 띄웠어요. 반짝이는 응원 수술을 높이 던졌다가 받았어요. 저는 조금씩 서글퍼지기 시작했어요. 언니 대신 울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모두가 기쁜 때에 혼자 슬픈 건 싫었어요.

8회 말이 시작되면 우리는 다 같이 일어나 '연안부두'를 불렀어요. 우리 팀의 8회 응원가였어요.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서글픈 노래에 희미한 서해바다의 비릿함이 실리면 이상하게 우리 팀은 이길 것만 같았어요. 어쩐지 바다내음이 느껴지지 않던 그날, 우리 팀은 9회 초 역전을 당하고 9회 말 헛스윙, 루킹삼진, 후라이볼로 깔끔하게 졌어요. 언니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팔을 휘두르고 발을 구르며 야구장을 빠져나가는 우리를 배웅했어요.

바람 빠진 응원봉처럼 한껏 작아져서 지하철을 탔어요. 집에 오는 내내 치어리더의 귀갓길을 생각했어요. 언니는 얼마나 피곤할까, 경기가 지는 날은 유난히 몸이 더 아프지 않을까, 집에 가면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누울까, 아저씨가 잡은 발목은 더 열심히 씻는 걸까, 전에 어느 기사에서 '치어리더도 라면을 먹는다'는 걸 봤는데 라면에 계란을 넣긴 할까, 꿈에서도 춤을 추고 팔을 휘젓고 웃을까, 꿈속의 근육통은 꿈 밖의 근육통보다 덜 아플까, 귀에 박힌 응원가들이 잠결을 방해하진 않을까. 무엇보다, 이렇게 일하고 얼마의 돈을 버는 걸까.

우리가 회사에 영혼을 팔고 야구장에서 치유를 받는다면, 그들은 야구장에서 영혼을 파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치어리더의 영혼은 어디에서 구제받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환승을 하고 친구와 헤어졌어요. 먹고사는 일이란, 어디서든 영혼을 팔아야 하는 거구나. 장소는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입금이지. 그런데 과연 입금이, 우리의 이 모든 수치羞恥를 다 치유해 줄 수 있을까. 발목을 감싼 치욕과 누군가 뱉은 껌을 피하지 못하는 직업과 그 포옹을 내내 지켜봐야 하는 굴욕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냉소, 내 급여의 몇 천배를 더 받는 남자의 이름을 외쳐야 하는 신세, 욱신거리는 근육 안을 흐르는 자괴감.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것은 입금으로 회복되어요. 회복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입금은 다음 날 다시 응원단을 오르게 하니까요. 맞아요, 중요한 건 입금이에요.


저도 그런 시절을 보냈어요. 응원을 하고 이기면 기쁘게 잠들고 지면 밤새도록 패인을 분석해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열정이나 삶에 대한 애정 같은 건 오전 7시 반이면 전원을 꺼요, OFF. 중요한 건 정시 출근과 월급날이에요. 우리는 이걸 '자본주의 내의 지속적인 갈증'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건조한 불안'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계속 말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밀리지 않는 월급은 안으로, 고정지출은 밖으로, 진짜 감정은 안으로, 가짜 미소는 밖으로, 이런 게 중요해요. 중요한 걸 놓치지 않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 거예요.


야구가 있는 한 치어리더들은 계속 사랑받을 거고 춤출 거예요. 저 또한 그녀들의 동작을, 시선을, 귀가를 지켜보려 해요. 그렇게 그들의 삶을 지지하고 조용히 응원하려 해요. 월급, 입금, 일상의 유지를 위한 감정을 숨기는 행위의 중요함이 인생의 껍질이라면,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삶의 바닥에 흘린 땀을 함께 닦아주는 손이니까요. 씨앗은 그렇게 늘 보이지 않는 안쪽에 있어요.

안타를 치고 나가 홈인을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듯이 결국 우리는 손을 부딪히고 잡을 거니까요. 맞아요, 가장 중요한 걸 놓치지 않는 것, 그게 정말로 중요해서 올 한 해도 야구와 치어리더 모두를 응원할 거예요.



바야흐로, 땀을 흘리고 닦을 계절이에요.






이미지 출처: 브레이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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