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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30. 2022

공구함의 산문집



  일종의 동질감이었다. 나는 그의 공구함을 힐끗거렸고 비슷한 횟수만큼 그는 나의 식탁에 눈길을 두었다. 


  이사한 집은 손볼 곳이 많았다. 나는 하루 걸러 한 차례씩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고 수리 담당분은 ‘입주자께서 직접 하셔야 하는데’ 하면서도 잊지 않고 들러주었다. 오래된 거실 등을 LED 등으로 교체하러 온 날 늙은 수리공은 고등학교 기술 시간에 배우고 이십 년 동안 떠올릴 일 없던 각종 공구가 가득 담긴 공구함을 거실 한가운데에 두었다. 공구함을 열자, 둔탁한 공구 위로 보란 듯이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가 놓여 있었다. 나는 책을 한 번 보고 수리공을 한 번 보았다. 수리에는 어울리지만 소설가의 산문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나의 식탁에 쌓인 책들을 훑었고 특히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과 소설가가 쓴 에세이집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별말 없이 전등 교체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전등을 교체하는 그의 손을 유심히 보았다. 역시나 거칠었다. 다시 보니 책도 주인의 손을 닮아 거칠게 낡아 있었다. 지저분한 표지의 왼쪽 윗부분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공구함을 들고 아파트의 이곳저곳을 바삐 다니다가 잠시 틈을 갖는 그를 상상했다. 사무실이나 아파트 단지 가운데 정자 혹은 아무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쥐고 있는 그를 떠올렸다. 더럽혀진 작업복을 입은 그가 책을 읽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산문집과 수리공, 조화롭지 못한 조합이라는 생각에 나의 상상은 빠른 속도로 힘을 잃어갔다. 

  그는 익숙하고도 자연스럽게 전등을 교체했다. 두꺼비집 스위치를 올리고 전등 버튼을 누르니 거실은 세련되게 밝아졌다. 사용한 공구를 공구함에 넣을 때 그는 책을 집어 올리고 공구들을 넣고 다시 책을 올려 책이 맨 위에 오도록 했다. 나의 식탁에 가볍게 눈길 한 번 주더니 ‘그럼 수고하십시오’ 하고는 미련 없이 나갔다. 


  그가 닫은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은퇴의 나이를 넘어선 수리공이 공구함에, 반복해서 읽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상태로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은 꽤 긴 시간 동안 마음에 어떤 무늬를 남겼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과 수리공, 그 둘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 내 안에서 일정량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민원 사항이 없는 시간에 책을 펼쳤을 그를 다시 떠올리며 나는 조금 숙연해졌다. 책을 쥔 그의 투박한 손을 생각하니 눈가가 뜨거워졌다. 평생을 문학과 관계없는 일을 하며 쉼표의 순간에 문학 안에 웅크렸을 그는 불행했을까, 행복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알 방법은 없었지만 해진 책의 표지는 내게 약간의 힌트를 주었다. 


  남편 근무지 따라 자주 이사하며, 터울이 크지 않은 세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모유 수유하며, 나는 부지런히 엄마와 아내가 되었다. 막내가 어린이집을 가면서부터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엄마와 아내가 아닌 ‘내가’ 될 수 있었다. 그 또한 그랬을 것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수리공이었다가 누군가의 남편과 아버지였다가 책을 읽을 땐 본연의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의 나처럼 순수한 자아로 돌아갔을 것이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렇게 자신 안에서 책을 통해 고치고 바꾸고 새로워졌을 것이다.


  도서관 앱을 켜 ‘연필로 쓰기’를 상호대차 신청했다. 이틀 후 문자를 받자마자 밝은 거실 전등을 끄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내 손에 들린 산문집은 깨끗하고 반듯했다. 몇 번을 읽어야 그렇게 해질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거친 손이 떠올랐다. 그 손이 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 이렇게 정갈했겠지. 도서관에서 나오자 늦가을의 바람에 괜스레 콧등이 시렸다.

  산문집을 방금 막 다 읽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김훈 작가의 글은 전등을 교체하는 수리공의 손길처럼 군더더기가 없고 단정했다. 오래 산 사람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절제와 옅은 감동이 있었다. 사연 많은 시절을 지나 편안한 시선을 갖게 된 소설가와 거칠지만 작업에 있어 자연스러웠던 손을 가진 수리공이 어쩐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긴 시간이 매만져 부드러워진 손과 눈길에서 배울 것이 많은 나이이다. 




오래됨에서 전혀 낡음을 찾아볼 수 없는






'월간 에세이'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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