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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Feb 28. 2023

어떤 환생

정호승, <타종(打鐘)> -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Gogh)



지갑을 열면 바로 보이는 그림은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었다. 얼마 후엔 '무도회'로 바뀌었고, 며칠 후엔 '배 위에서의 점심'으로 갈아 끼웠다. 르누아르의 발랄한 분위기가 좋았다. 르누아르를 좋아할 만한 나이였다.

'프랑스 미술관 관람' 교양수업 교재를 가위로 잘게 오렸다. 모네의 '수련'이나 '성당' 시리즈도 한가득이었고 드가의 '발레 수업'도 몇 장으로 오렸다. 지갑을 열 때마다 인상적인 그림들을 보는 게 좋았다. 가장 많은 건 역시나 르누아르였고 마네보다는 모네가 좋다고 말하고 다녔고 드가는 발레 시리즈 말고는 인상적이지 않았다. 가장 좋아한 화가는 고흐였지만 평상시에는 르누아르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에게만 고흐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즈음에는 몇 번 물은 적도 있었다. 아를 시절의 밀짚모자 초상 알아요? 상대의 대답이 어떻든 상관없이, 나는 지갑 속 잘게 자른 몇 장의 명화, 맨 밑에 넣어둔 그림을 꺼내 보여 주었다. 밀짚모자를 쓴 초상.



안 좋은 버릇, 예전에야 눈이 나빠서였다지만 지금은 습관이 되어버린.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가면 그림이나 작품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다. 붓칠이나 색감, 재료의 재질을 자세히 보고 싶어 한다. 한 발 물러나 주세요, 직원의 경고를 받고도 자주 가까워져서 쉽게 요주의 인물이 된다. 이 나쁜 버릇은 전적으로 100년을 훌쩍 일찍 살아놓고 지금도 자주 나를 흔드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서 비롯되었다.


눈을 무슨 색으로 칠했을까,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수업 중에 교재에 코를 묻듯이 가까이 댔다. 스무 해를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난감한 침몰이 덮쳤다.

화장실로 뛰어가서 한참이나 세수를 했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감정, 길어 올려지지 않는 영혼, 표현 못할 관통.


눈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100년의 시간을 뚫고 와 나를 검게 가라앉혔던 물컹한 형체를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해 보면, 그러했다. 눈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고흐는 목소리 없는 소리로, 보이지 않는 빛으로 살아있었다. 눈에서 나오는 소리는 색이고 빛이었다. 눈빛 같은 일반적인 단어로 말하기엔, 그것은 너무나도 생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림 속에, 17,500원 교재 속에 움직임 없이 자화상으로 죽어있었다. 살았으나 그림일 뿐인 고흐 앞에서 나의 첫 반응은, 문학적이지 못하게도 고작 눈물이었다.

다시 돌아온 강의실은 여전했다. 강사는 화가의 말년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고 파란색 캔커피는 적당히 차가웠다. 내 자리 옆옆의 건축과 남학생 둘은 비슷한 자세로 졸고 있었고 에어컨 소리는 조금 잦아든 듯도 했다. 변한 것이라곤 고흐의 내밀한 이야기를 건네받은 나뿐이었다. 그 내밀함을 아직 뜯어보지는 못한 채였다. 뜯어보아도 그때의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여서, 감히 뜯지 못한 채 물어보았다. 그 눈 속에 채워진 것은 무엇인가요, 100년 전에 살았다가 지금 다시 살아난 당신, 당신으로 불리는 그 무엇.

수업이 끝나고 과실에 가서 집기류 서랍을 열었다. 가위를 잡아 그림을 오렸다. 첫 난도질이었다.




자주, 그림을 보았다.

 

술이나 담배, 광기, 여자 혹은 남자, 먹고사는 것, 열정, 편지, 인정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소리를 지르고 죽으려다 말고 붓을 들고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한다. 아이를 키우고 밥을 하고 빨래를 개고 커피를 끓이고 장을 보다가 문득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고독을 떠올린다.

다시 써야겠다.

고독이 떠올랐다.

이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지금보다 100년 전에도, 지금도, 고흐의 100년 전에도 그는 그녀는 고독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가 밥을 먹다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자위를 하다가 문득 그리고 자주 고독했을 것이다. 물론 캔커피는 캔커피다운 맛을 내는 데 열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는 다만

고독했을 뿐이다.

나의 몫은 그의 고독을 쳐다보는 일, 그의 고독에 값을 매기는 일, 그러고는 기껏해야 우는 일.



언니, 하루 종일 아기랑 같이 있어서 외로울 틈이 없는데도, 외로워요. 산후우울증인가.

이제는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는 나는 레쓰비가 아닌 라테를 들이켰다. 초록창을 열어 '반고흐 밀짚모자 초상'을 검색했다. 그림을 보여주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군들 외롭지 않겠냐, 다 외로워, 외롭다 보면 어느 순간 귀도 자르고 혼자 종도 치고 그래.

석가도 예수도 인간일 적에는 외롭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기를 쓰고 제자들을 만들어 곁에 둔 게 아닐까.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무교인 친구는 조금 갸우뚱하더니, 그렇죠 다 외롭죠, 저만 이런 거 아니죠,라고 대답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고 옅은 화장을 한 친구의 얼굴을 보며 그 희미함이 왜 희미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희미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네? 뭐라고요?

그러니까, 사람이 외로워서 쓸쓸해서, 그래서,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닐까.

외로움이 바글거리는 카페의 창가에서 친구는 초코푸딩을 퍼먹었다.

아, 그런데 언니, 종을 치는 건 뭐예요?





나는 자주 외롭고 종종 고독하다. 아마도 100여년 전 즈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글을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생각을 합니다 글을 씁니다
그리고
글을 생각합니다 글을 씁니다
가끔 사람을 생각합니다 사람을 씁니다
그리고
외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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