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4
지난주 금요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였습니다.
부모님 댁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싸가지고 온 날짜 지난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어딘가 현수막이라도 걸렸을 텐데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코로나19 이전의 세상과는 다른, 기존의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라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썼으나 보내지 않은 편지에 적었었는데, 정치는 제가 애정하는 관심분야가 아닙니다. 이렇게 선언을 하고 나서 생기는 부끄러움을 제 몫이겠지요. 뭔가 잘못되었던 정치 과목 수업을 그 시작으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봅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열렬히 지지한다거나, 누군가를 속속들이 알고 비판하는 거시적, 미시적 시각과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다 거기서 거기고, 특별하다던 이도 소위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다 똑같은 정치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게 현실이라고 느껴지거든요. 엇!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얼마나 각자의 공유성과 이상향을 가지고 가치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그런데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싸잡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갑자기 반성타임. 진하게 가졌습니다.
돌아가서, 그저 저와 주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수준에서의 관심과 의견 정도입니다. 이 마저도 사안 별로 동의하게 되는 대상이 달라집니다. 저는 그렇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분에 대한 정보나 사진을 접하면 감동을 느끼거나 반성하게 되는 때가 꽤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제 주변을 지배하는 알고리즘이 저에게 그런 정보를 이따금 주는 덕입니다.
정치 자체보다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생을 마감했던 날의 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날은 군대 간 동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회하러 간 날이었습니다. 신기한 건 면회를 갔으니, 분명 동생을 만났을 텐데 만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단 한순간의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같이 갔던 부모님 심지어 누구든 반가웠을(과연?!) 동생조차 제가 면회 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구요. 세상에.
소중한 주말 시간을 할애해 집을 나선 그 아침은 잠이 덜 깬 채 차 뒷자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라디오에서 작게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설핏 잠이 들까 말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봉화 자택 뒷산에서 추락했다는 속보가 나왔습니다. 일단 잠에서는 깼는데, 속보가 잠 속의 꿈인지, 현실인지, 연일 방송되던 뉴스로 인한 말도 안 되는 혼자만의 상상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차 안은 충격의 멍… 하지만 이어지는 뉴스를 통해 실제 발생한 사건이라는 걸 깨닫게 됐지요.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하지만 뉴스를 통해서만 아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벌써 10이 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깊이와 울림으로 그분의 생애와 죽음이 여전히 남아있겠지만, 세상은 시계를 따라 정박으로 굴러갑니다. 잘 이라고는 못하겠네요. 올해는 5.18이 40주기, 6.25 전쟁도 70년.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이곳도 기념할 만한 *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마음이 급합니다. 역사 속에나 등장하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대를 난생처음 살고 있는 우리는 계획과 준비가 얼마나 무력한지 이미 체감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일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요즘 ‘아름다움’ 그리고 ‘대통령’과 관련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는 자발적인 거지만, 주제는 비자발적 선택입니다. 아름다움은 내년에 있을 O연출님과의 프로덕션, 대통령은 3개년으로 이어온 사업의 올해 주제입니다.
지난주에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쓴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끝냈습니다.
덤말로, 지난주 20회 국회 임기가 끝나고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은퇴를 한다는 기사가 났더라구요. 6선이라는데, 우리나라 국회의원 임기 4년을 고려하면 그는 무려 24년을 국회의원으로 살았네요, 기간을 보고 그야말로 제대로 직업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에 앞서 집적거리기만 하고 끝내지 못한 다른 책들을 생각한다면 더욱.
책에서 몇 구절을 적어놓았는데, 그중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내용을 조금 들려드리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국가는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는 세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통일의 꿈이 무지개처럼 솟아오르는 세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 골고루 잘 사는 세상, 반칙과 특권이 없는 공정한 세상’을 꿈꿨다. 그들은 온 힘을 바쳐서 그걸 이루려 애썼다.”
말과 글은 성격을 기반으로 할 텐데 김대중 대통령은 꿈꾸는 세상을 상당히 낭만적으로 표현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상당히 담백하고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권과 반칙의 구조를 해소하는 것은 이 시대의 역사적인 과제입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정통성 있는 정부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언론이 정확하고 공정한 언론, 책임 있게 대안을 말하는 언론, 보도에 책임을 지는 언론이 될 때까지, 그리고 스스로 정치를 지배하려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견제와 균형을 위한 시민의 권력으로 돌아가고, 사주의 언론이 아니라 시민의 언론이 될 때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2007년 노무현 대통령 신년연설 중에서)
반복되는 특권과 반칙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입니다. 작년인가 읽었던 책에서 90년대생들이 추구하는 세상과 닮아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아마도 그분은 평생을 이 신념을 가지고 사셨겠지요. 어쩌면 너무 이른 시기를 살다 가신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책을 읽은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폭넓은 연령대의 사람들과 밀접하게 일을 하면서 90년대생들을 만나게 되는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사회적 이슈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탓인지 덕분인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때문’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특권이라는 단어를 작년즈음부터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나의 특권, 또는 그들의 특권인가 생각해 보는 경우가 많아지고, 누구를 탓해야 하는 일인가, 어디까지 탓할 수 있는가, 그들과 나의 생각 그리고 행동을 되짚어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좋은 공연의 완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예술이라는 대의명분과 무대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는 감동의 순간이라는 절체절명의 가치로 인해, 그 과정에 있어 부지불식간에 개개인이 겪어내거나 감수해야 하는 불편과 어려움은 조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어떤 분야에서보다 더 치열하고 극심한 고통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숙이 덜한 탓인지 그럴수록 소심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세대나 마찬가지겠지만, 윗 세대와 아랫 세대, 같은 세대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과 가치들 안에서 반복되는 혼란과 망설임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편지가 감동이라는 마음을 드러내주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매주 한 편의 편지를 보내는 건 저에게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회신을 1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미 월요일 오전이면 답메일을 받아보는 것이 저에게도 기다리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합니다.
많이 웃고 다음에 만나요.
덧. 의견을 구합니다. 다음 브런치에 글을 올려볼까 생각합니다. 그중에 '나래에게 보내는 편지'를 시리즈로 올려도 될는지요. 일부 직접적인 내용들은 수정을 해야겠지만. 생각해 보고 의견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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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과 응원을 받아 설레는 마음으로 브런치 문을 두드렸으나, 브런치팀으로부터 담담하고 짧은 메시지를 받았다. 거절의 내용을 담은. 아니 뭐 이런 걸 내치고 그래! 아니고자 해도 나름 약간의 상처를 받고 말았다. (2024.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