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도시 베를린으로 간다
퇴사 후 첫 여행지는 당연히 베를린이다.
선택지에 베를린 이외의 도시는 들어있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저 언제 갈 것인가, 얼마나 머물 것인가란 질문만 있을 뿐.
직항도 없고 멀고 먼 베를린은 어쩌다 나의 애착도시가 되었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연극일을 하지 않았다면 베를린이 그렇게 매력적인 도시였을까.
10여년 전, 막연한 기대로 처음 혼자 찾았갔던 그곳의 첫인상은 어디서나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와 사람들의 거침없는 무단횡단으로 요약된다.(이게 내가 꿈꾸던 베를린, 베를리너라고?)
하지만, ‘여행자’였던 나에게 베를린은
지나치게 친절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무심하지도 않은
지나치게 세련되지도 않고, 지나치게 투박하지도 않은
지나치게 편리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불편하지도 않은
무엇보다 어떤 공연장을 찾아가도 기대 이상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베를린은 지상에 존재하는 나의 최애 도시로 자리잡았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베를린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예스러운 로망을 갖게 되었다.
물론 어느 도시, 나라나 그렇겠지만 방문자인 내가 느끼는 베를린과 살아본 또는 살고있는 이들이 느끼는 베를린은 다르고, 같은 한국인이라도 베를린에서 어린시절과 성장기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과 성장한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베를린은 또한 다르다.
하지만, 이런들, 저런들. 난 여전히 방문자, visitor다.
하지만!
드디어 베를린에서 ‘살아보고자’ 했으나, 타협.
행정적 이슈(그래봐야 비자 문제) 없이 허락된 3개월이라도 ‘머물고자’ 했으나, 역시 타협.
(결과적으로는 머물 수 있게 되었으나, 이미 변경은 물건너간 상태. 이건 꼭 기록을 해놓아야겠다. 결국 나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요인이 있었음을)
결국 나는 3주간의 베를린 여행을, 그리고 며칠간의 암스테르담 체류를 결정했다.
그것도 참 춥고 해가 짧다는 겨울의 한가운데에.
마지막 출근 후, 남은 휴가를 소진중이던 2023년 12월의 어느 날에 베를린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나무늘보 처럼 지내기. 그리고 연극 두 편 정도?
(나는 연극인 껍질을 벗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몸에 칭칭 감고 있었다. 그래도 그 기간 동안 두 편만 계획한 것이 어디인가. 여느 때 같았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공연장과 공연을 찾아 매일 저녁 들락날락 했을 거다. 다행히도(?) 유럽이 크리스마스 휴가 시즌인 것도 한 몫 하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혼자하는 유럽행이라 모든 과정에서 설렘보다는 긴장이, 기대보다는 걱정이, 그리고 자유로움보다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압박이 더 컸다.
심지어 베를린 도착지가 기존의 자그맣고(?) 오래된 테겔공항이 아니라 공사중이라고 말만 들었던 브란덴부르그공항이라는 것까지도.
너무나 처음이라서.
덧. ‘처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 긴장감이 있다. 그 긴장감이 설레는 일이라면 다행인데, 긴장감이 두려움으로 오는 것은 달갑지가 않다. 처음 또는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 어느새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커졌음을 직면하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미치도록 변화와 함께 여행을 희망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