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낮은 해, 그리고 비와 바람
내가 애써서 만들어내지 않은, 하지만 내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하얗고 바스락거리는 호텔의 침대에서 자유를 느낀다.
살짝 풍기는 특유의 락스냄새도 과도하지만 않다면,
깨끗하게 소독된 그래서 이전에 머물던 사람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나만을 위해 새롭게 준비된 공간에 와있다는 증거이니 반갑다.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시차적응 완료인 걸까, 느지막이 일어나 비가 조금 살랑거리는 날씨이기도 하고 해가 뜨기 전이기 때문이기도 해 아직은 희끄무레한 창 밖을 충분히 즐긴다.(간단히 말해 멍 때리기)
이러한 때의 적막이 좋다.
적당한 온도 조절을 하며 나오고 있는 히터의 바람소리(피곤했다면 이마저도 거슬렸겠지만),
아마도 조식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가끔 들리는,
집의 적막과는 또 다른 호텔방의 적막이 좋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 속에서 나는 나에게 집중하게 될까, 아니면 혼란스러움을 느낄까.
굳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고, 알아들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그저 소리로 존재하는 말들.
이틀간의 타지 적응기를 미떼 지역의 호텔에서 보낸 후, 지인의 빈 집에서 남은 기간을 머물기로 했다. 짧지만 살아보기를 흉내내기에 매우 제격이다.
근처 공원을 산책한다.
겨울이라 침엽수의 초록을 제외하고는 앙상한 가지와 마른 잎만 남아있는 높고 낮은 나무와 넝쿨들이 가득한데, 이 공원은 자연 그대로를 컨셉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관리가 되지 않은 공원처럼 보이지만, 그 모습이 관리되고 있는 곳이라고. 계속해서 뿌리는 비와 바람 때문에 꽤나 추운 겨울 아침인데,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머무는 동안 정말 다양한 크기와 종의 개들을 보았다. 그곳의 개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서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서거나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별로 믿지 않았지만, 지내다 보니 믿고도 남을 만큼. 좁은 길에서 커다란 개를 만나도 안전함을 느낀다. 개, 비둘기, 벌레 등 인간 이외의 생명체에 거의 공포를 갖고 있는 나조차도.)
동네에 있는 작은 공원이라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아도 3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지만,
첫날 아침 산책하며 비에 젖은, 맑은 공기를 흠씬 들이마시고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내쉬고…
쨍! 한 공기가 몸 안으로 후욱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면 거짓말일까.
서울이 아닌 다른 땅에, 다른 하늘 아래 있음이 확실하다.
굵은 기둥을 땅에 박고 서서 그 끝은 하늘에 닿아 하염없이 흔들리는 높은 나뭇가지들만큼이나 안전하지만 자유롭고 싶다고, 무념의 상태에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나를 잡아매둔 것도 아닌데… 다소 어이가 없어 너무 감상적인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나저나 해가 떨어지면 귀가하는 것으로 프로그래밍 된 나에게
아침 8시 넘어 뜨는 해가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 베를린의 겨울은 다소 난제다.
(해가 길다한들 비루한 에너지로 긴 시간 밖을 여기저기 쏘다니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게다가 베를린의 겨울 날씨는 매일 비, 비… 바람 또 비.
초반 며칠 동안 개인 하늘을 10분 본 게 실화라면 말 다했다.
그곳 사람들은 당최 우산을 쓰지 않는다. 우산 쓰는 사람들은 관광객이라는 공식이 있다지만 세탁이 용이하지 않은 겨울옷을 입은 나는 우산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비가 미스트처럼 공기 중을 떠다니거나 줄기가 있어도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 때문에 우산을 써도 젖고,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산이 시야를 가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기가 여간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게다가 풍속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는 19m/s로 주의보가 떴고, 어떤 날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16m/s, 보통 10m/s 이상을 오갔다. 머무는 동안 외출할 때에는 그날의 기온과 함께 풍속을 확인하고 얼마나 껴입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날씨 덕에 앞 코가 지저분한 운동화는 베를리너의 상징이란 말을 우스갯소리로 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말과 퇴사라는 이유로 몰아친 약속들을 감사히 즐기고 감기까지 치르고 드디어 방문한 이곳은
여전히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몰라도 괜찮고, 이유 없이 애정하고,
여행할 때마다 방문하는 친숙한 곳(극장과 카페와 향수매장)이 있다는 위안과 함께
바쁜 와중에도 반겨주는 친구와 운 좋게 머물게 된 지인분의 집 덕에
순간순간 뭘 볼까, 뭘 먹을까, 어딜 걸을까 등 기초적인 것들만 생각하면서
반갑게, 여유 있게, 때로 조금은 외롭게 안팎을 오가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덧.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한 달 전까지 함께 했던 이들을 떠올리는 건 아마도 오래된 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