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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Jul 17. 2024

단어의 감각

2020년 8월 #2

비가 내리는 밤입니다.

어제, 오늘 오랜만에 비가 오지 않는 낮을 보냈는데, 다시 시작인가 봅니다. 방금 전 갑자기 물걸레질 청소를 했습니다. 애정하는 하지만 너무 오래된 티셔츠를 버려야겠는데, 마지막으로 값진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걸레질이란 결론을 내렸거든요. 눅눅한 날인데 말입니다. 


대학 다닐 때 한 친구가 미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사다 준 티셔츠입니다. 그때 친한 친구들이 6명이었는데 하나씩 서로 다른 색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당시 한창 유행이던 폴로 얇은 브이넥 반팔 면티 분홍색, 연녹색, 레몬색.. 우정템이랄까요. 다른 색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저는 분홍색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래도록 매년 여름마다 입다가, 짧은 허리길이 때문에 한동안 안 입는 바람에 잠시 잊었다가, 다시 꺼내 입었다가, 실내복으로 입다가… 이제 이별을 고했습니다. 20년은 족히 된 티셔츠가 이제는 목에 때도 잘 안 지고, 면이 오래되서인지 빨아도 청량한 냄새가 나질 않아서 아쉽지만 이별해야 할 순간이 온 것 같아서요. 


그 옷을 볼 때마다 그 친구들을 생각합니다. 

멋모르고 어른이 된 줄 알았던 20살 과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이들. 여전히 연락도 하고 가끔 만나기도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안부만 전하거나 아예 만나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난 기억도 많고, 각자의 성장통에 대한 기억들도 있는 그 친구들이 저의 빛나던 때와 질척거리던 순간들을 함께 한 이들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다가 갑자기 핑계김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일과 결혼, 자녀 등 살고 있는 형편이 각각이라 지금은 예전과는 다른 형태의 친구이지만, 서로의 과거를 깊이 공유했다는 점에 있어서 생애주기의 어느 시점에 다시 연결되지 않을까요. 그즈음이 되면 느슨한 관계여도 타이트한 관계여도 상관없습니다. 


밤중의 난데없는 센치한 감성과 달리

몸은 오른쪽 팔을 힘차게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에서 따악딱 소리가 나고,

꿇고 앉은 무릎은 이러다 나가버릴 것 같은 예감이고, 

샤워한 게 무색하도록 땀이 쪼옥 나면서 걸레질은 끝났습니다. 


지난 약 2-3주는 열정적인 한 사람 때문에 결론도 나지 않는 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해외 한 극장과 공동제작하고 양국 창작자들이 참여하는 프로덕션이 8월 마지막주에서 9월 첫 주까지 워크숍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해외팀이 한국에 와야 하는데 예외 없는 14일 격리기간이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자가격리가 아닌 시설격리.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격리면제 케이스가 있다 해서 알아보고 애를 썼지만 결국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연출님과 저희는 12일간의 워크숍을 위해 방문하는 해외 예술가들이 어느 지역, 어떤 환경으로 배정받을지도 모르는 시설격리를 감당하게 할 수 없다, 개인들에게 충분한 시간도 없는 게 현실이고, 그러니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얘기했지만 해외 극장의 대표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당 국가 외교부, 현지 한국외교부 등에 연락을 하고, 시간을 들이고, 결국은 우리가 시도했던 방법 밖에 없는데 계속 다시 시도해 보자고 하고… 그 와중에 유럽의 확진자는 다시 증가추세입니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맞게 대안을 준비하고,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원안 대신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최선이라는 것이 저희의 입장입니다. 차선책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도록 준비도 해야 하구요.  

그분의 입장과 심정도 이해하지만 필요 이상의 시간과 에너지를 계속해서 같은 방안에 쏟아붓고 있자니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계획은 확정이 안되고, 창작자들은 불안하고, 대안에 대한 준비도 안되고 이래저래 답답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대표가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지… 결국은 코 앞까지 시간이 닥쳐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열정적이란 수식어가 절로 떠오르는 그를 보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그가 나의 상사라면, 또는 내가 저 모습이라면... 그것 또한 정답은 아닌 같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됩니다. 어쩌면 열정이라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일을 하며 사람들을 경험하고 저를 경험하면서, 적절한 완급조절이 퍽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아직 실천은 잘 못하기 때문에 내적 갈등과 분노, 자책을 느끼는 것도 필수 코스구요).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하는 프로덕션에 애정과 공을 들이는 거니 고무적이라는 사실을 위안 삼아 마음 한켠에 챙겨둡니다. 


그런 부글부글한 경험과 달리, 지난 목요일에는 정말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편물 때문에 O작가님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지난밤 빗소리로 밤새 꿈과 현실을 왔다갔다한 것 같다고 했더니, 

"네… 이상한 여름이에요."

라고 답이 왔는데, 그 문자메시지에 그분의 어조가 음성지원되면서  

이상한… 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생경하고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겁니다. 

다중적 의미의 '이상한'이 제목에 들어있는 공연을 준비 중인지라 이 단어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 작품과 무관한 작가님의 짧은 문자에 들어있는 '이상한'이라는 단어가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단어에 아우라가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 단어만 공기 중에 뭉근하게 존재하는 그런 느낌.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올 해는 정말 이상한 여름입니다.


흠! 저는 이제 참 이상한 “사이코지만 괜찮아” 오늘 방송분이 넷플릭스에 올라왔는지 보러 가야겠습니다. 이번주가 마지막 방송입니다. 

 

많이 웃고, 다음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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