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항아리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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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다있소

인생에 안 끼는 곳이 없다. 누가? 돈이

by 채송아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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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어어.. 삭신이야.....”

 

곧 양쪽 팔부터 등, 다리, 심지어 정수리까지 지끈지끈하기 시작한다.  


“아오.. 몇 년 만에 바닥에서 자서 그런가... 온몸이 배기네...”


그래도 일어나 대충 짐을 정리한다.

도망치듯 나오느라 거의 없는 짐이지만, 집이 좁아 그런지 그것도 한 자리 차지한다.


“차라리 다행이네. 집도 작은데 짐까지 많았으면...”  


상상만으로도 골이 아프다.

그나마 옵션으로 있던 옷장이랑 선반이 꽤 유용하게 쓰였다. 그거 없었으면 짐이 바닥에 질서 없이 쌓여서 정말 쓰레기장 같았을 텐데. 그리고 수납장 사느라 추가 지출까지...


미니 냉장고를 열어본다.

생수 말고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

먹을 것만 없는 게 아니다.

식기류, 주방 도구도 없다.


매일 밖에서 사 먹으면 식기류가 필요 없지만, 백수가 된 이상 밖에서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사치다. 라면이든 뭐든 1인분 사다가 때에 따라 집에서 두 끼는 해결해야 한다.     


“일단, 생필품 좀 사야겠다.”     


통장, 가방 탈탈 털어 현금이 얼마나 있나 확인하는데. 동생이 준 돈 말고는 진짜 1,000원 한 장이 없다. 카드값과 월세로 다 빠져나갔다.     


“헐... 저번 달 월급이랑 실업급여 들어와도 카드값 나가면 끝이네. 막내가 돈 안 보내줬으면 어쩔뻔했냐, 진짜...”


어제 뱀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간다.   


“으악, 깜짝아! 아니, 여기는 왜 인도가 없어!? 사람이 사는데!”


부아아앙~! 1층에 나오자마자 바로 앞에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사방으로 원룸, 빌라가 빽빽한데 인도가 한 줄 없다.


처음 독립할 때도 이런 동네에 살았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난한 동네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그땐 조용한 분위기보다 시끌시끌 사람 소리에 기름 냄새 좔좔 풍기는 맛집이 좋던 때였다. 빽빽한 빌라촌 어딘가 콕 박혀있던 3평짜리 카페를 우리 동네 카페라 부르며 신나 하던. 집 앞 노점상에서 팔던 1,000원에 2개 꽈배기가 그렇게 맛있었다.     


“아~ 주언니랑 살 땐 차에 치일 걱정 없이 돌아다녔는데.”


지하에 주차장이 있는 아파트에서 한 번 살아보니 인도 하나 없는 이 무례함이 왜 이렇게 싫은지.


“그러고 보니 여기는 의자도 없네?”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 타러 들어가는 문 앞에도 의자가 있었는데. 신도시는 걷다가 딱 앉고 싶은 자리에 의자 딱 놓여있던데. 여기는 한참을 걸어도 앉을 데가 없다.


그렇게 어디서 또 차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도착한 곳은 ‘다있소’. 저렴한 가격으로 세상 모든 생필품, 사무용품 다 파는 곳. 통장 잔고 부실해도 맘 편한 곳은 여기뿐이다.


“꺄~ 양치컵 귀여운 거 봐~! 이건 또 뭐야. 비누가 젖지 않는 받침대? 오, 이런 건 사야지.”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하자, 눈앞에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뜬다.     


[[ 하늘색 세숫대야 산다 VS 안 산다, 당신의 선택은? ]]

[[ 똥색 화장실 슬리퍼 산다 VS 안 산다, 당신의 선택은? ]]

[[ 곰모양 주방 수건 보조 걸이 산다 VS 안 산다, 당신의 선택은? ]]


산다, 산다, 산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바로 물건을 바구니에 담는 류나.     


[[ 바디 샤워 젤 산다 VS 안 산다, 당신의 선택은? ]]

[[ 얼굴 주름 쫙 크림 산다 VS 안 산다, 당신의 선택은? ]]     


그런데 뜬금없이 화장품 코너에서 멈칫한다.     


“가격이 싸도 너무 싼데...”     


컵이니 슬리퍼니 몸에 잠깐 닿고 마는 거라 싸구려도 괜찮은데, 화장품은 피부가 먹는 거니까 차마 싼 거에 손이 가지 않는다. 화장품은 왕우아가 챙겨준 샘플이 있으니 그걸로 최대한 버텨보기로 한다.


“가만~ 또 뭐가 필요하더라?”     


곰돌이 모양에 눈코입이 뻥 뚫린 비누 받침대, 고양이가 그려진 밥그릇, 귀여운 국그릇, 텀블러 등등~ 담다 보니 어느새 바구니가 꽉 찬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신나게 옷걸이, 수납 바구니, 수건 등을 더 담는다.     


“3천 원짜리 요고 마음에 드네~”     


그러다 컵 진열대 앞에 멈춰 서는 류나. 묵직하니 안정감 있는 꽃무늬 컵이 영 마음에 든다. 그런데 옆에 그럭저럭 쓸만한 2천 원짜리 컵이 눈에 자꾸 걸린다.     


“컵 2개는 있어야 하는데. 그냥 2천 원짜리 사...?”     


1,000원이라도 싼 걸 사야 하는 처지지만, 3,000원짜리 컵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류나야... 1,000원 아낀다고 인생 안 바뀐다! 어차피 곧 취직할 거니까~ 기분 좋게 사자, 이거야~ ㅋㅋ”     


3천 원짜리 하나, 2천 원짜리 하나를 담는다. 그렇게 비구니 안에 물건들은 총 10만 원. 겨우 10만 원으로 1인 살림살이 대충 장만했으니 거저 아닌가.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쇼핑, 이거야말로 세상 최고의 항우울제 아닐까.     


집에 오자마자 짐을 그대로 내려놓고 슈퍼에서 산 우동을 끓인다. 몸이 좀 안 좋을 땐 우동을 푹 끓여 먹는 편이다. 4분 끓이라고 되어있으면 8분 정도 끓여서 아주 퍼지게 한다. 그러면 죽처럼 돼서 목 넘김이 좋다. 겔겔 거리던 몸에 뜨거운 거 들어가니 해장하는 느낌도 나고.     


“냠냠. 냠냠.”     


그것도 쇼핑이라고 허기가 졌는지 이게 다 맛있다. 그릇이 싹 비워지고 아까 산 물건을 하나둘 꺼내 나름 정리를 한다. 장롱에 쑤셔 박혀있던 옷들을 죄다 꺼내 새로 산 옷걸이에 걸고 선반에 쌓아놨던 물건들은 3,000원짜리 정리함을 이용해 깔끔하게 치운다.     


보기만 해도 갑갑한 좁아터진 집에 새 물건을 채워 넣으니 그럭저럭 기분이 새롭다.     


“어째 내가 가진 건 알곡 없는 쭉정이뿐이냐. ㅎ”     


얼추 정리가 끝나고 철퍼덕 바닥에 앉아, 잘했나 살펴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죄다 싸구려뿐이다. 비싼 거라고는 비싸게 산 카디건 하나고 나머지는 당장 버려도 손색없다. 그래도 오래된 태블릿, 노트북, 낡은 충전기, 세일 왕창 받은 건강식품과 화장품, 낡은 옷들, 명품백 2개 이런 건 살 때도 돈 좀 들였는데.    


“이거 다 팔면 100만 원은 되려나...?”


그동안 나의 능력으로 일궈낸 살림이 이게 전부라니. 괜히 위축된다. 만약, 출신이라도 좋으면, 그러니까 명문대라도 나왔으면 덜 위축되려나?      


“아니지. 명문대로는 안 되고~”     


언제든 연봉 8천 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지금 이 현실이 그럭저럭 괜찮을 거 같다. 돈 벌어서 나가면 되니까. 근데 보통 연봉 8천 넘는 사람은 처음부터 이런데 안 들어온다. 그리고 다있소도 안 간다.  


그러고 보니 다있소에 간 게 정말 오랜만이다.

쇼핑이 취미였던 주언니 덕에 나는 백화점에서 파는 샴푸, 바디워시, 식기... 정말 원 없이 썼다. 호강에 빠져 살던 날들이었다.


“그땐 가격에 품질 다 포함된 거라고 저렴한 거 살 바에야 몇천 원 더 주고 좋은 거 사는 게 낫다고 그랬었는데. ㅎ”


그 집에서 쓰는 좋은 건 다 남의 것이었으면서 좋은 거 좀 쓴다고 주둥이에서 그런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다있소에서 왜 물건을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했다. 첫 독립 때 그곳에서 받은 위안과 도움은 고스란히 까먹고.     


“설마... 신이 그때 그 기억 다시 떠올리라고 이런 시련을 주신 건가...?”


지금은 여기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아찔하다. 돈 좀 없는 사람도 새롭고 깨끗한 생활하고 싶다. 철마다 새 물건 좀 쓰고 싶고, 때가 지지 않는 플라스틱 바가지는 제발 좀 버리고 싶다. 생각해 보면 나 학생 때만 해도, 그러니까 다있소가 없던 그때만 해도 엄마는 반찬통이니 뭐니 닳다 못해 구멍 날 때까지 썼다. 3,000원이면 반찬통을 살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다있소에서는 1,000~5,000원이면 다 된다. 반찬통도, 욕실용품도, 심지어 휴대용 가방까지도. 돈 좀 없어도 플라스틱 반찬통에 지지 않는 때가 끼면 버리고 새 걸로 바꿀 수 있다. 나름 아기자기하게 방을 꾸밀 수도 있다. 여기서는 겨우 10만 원이면 1인분 살림은 거뜬히 마련할 수 있다.


빠듯한 생활에 살림까지 구질구질하면 진짜 속 터지는데 적은 돈으로 이렇게라도 숨통을 트일 수 있으니 어찌나 고마운지. 물건을 들고 나올 때는 다있소 사장님한테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다있소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적은 돈으로나마 나의 삶을 조금 더 깨끗하게 좀 더 예쁘게 가꿀 때, 그때 받는 위안이 꽤 크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나와 같은 의안을 받지 않았을까.


짐 정리도 끝났겠다 이제 슬슬 일자리를 찾는다. 다만,  아침부터 바삐 움직여서 그런지 몸 컨디션은 여전히 꽝이라 오늘은 워밍업으로 슬쩍 구인 사이트를 훑어보기만 하는데.     


“음...”     


딱히 끌리는 곳이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쉬는 데 집중하기로 한다. 일도 일이지만, 컨디션 조절도 중요하니까.     


“푸에취! 아오... 아까부터 왜 이렇게 기침이 나냐.”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침이 더 심해진다.

맑은 콧물도 줄줄 흐르고.     


“열은 없는데.”     


인터넷에 찾아보니 알레르기성 비염 증상이라고 나온다.     


“하아.. 나 알레르기 같은 거 없던 사람인데... 이 집에 와서 생겼나?”     


한 해가 지날수록 뚝뚝 떨어지는 체력 때문일까? 아니면, 근래 무리해서 그런가?     


“뭐 괜찮겠지. 쿨쩍. 일단, 한숨 자야겠다.”     


자고 나면 체력이 회복되니까 증상이 말끔히 사라질지 모른다. 류나는 먹은 걸 대충 치워놓고 바로 누워버린다. 그리고 3시간 뒤.     


“흐아암~ 역시 자고 일어나니까 몸이 좀 개운한 게 콧물도 안 나는 거 같... 푸에취! 쿨쩍쿨쩍!!”     


오후 5시 30분, 기침이 아까보다 심해졌다.

10분이 지나니 콧물도 다시 줄줄 흐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빨리 병원에 가지 않으면 오늘 밤 굉~장히 후회할 거 같은 아주 쎄~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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