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항아리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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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고시텔 첫날밤

인생에 안 끼는 곳이 없다. 누가? 돈이

by 채송아 Feb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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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대충 한쪽에 쌓아놓고 바닥에 앉아 김밥을 먹는 두 사람. 내일 조그마한 탁자 하나는 꼭 사야겠다.


“왜 이렇게 못 먹어. 맛없어?”

“아니. 좀 피곤하네... ㅎㅎ”


청소된 집이라 바로 식사할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입맛이 너무 없다. 3일 동안 밤에 잠도 못 자고 하루 종일 집 계약 못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더니 혓바늘이 돋았다.


“나 갈 테니까 푹 쉬어~”


잠시 뒤, 왕우아가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류나. 대충 먹던 걸 치우고, 짐을 한쪽으로 더 밀어 넣고, 대충 씻고, 대충 이불을 깔고 눕는다. 근데 영 잠이 오지 않는다.


진짜 피곤해 죽겠는데, 몸은 천근만근인데...


“하아... 내가 지금 여기 누워있을 줄이야...”


4일 전만 해도 나는 방 4개짜리 아파트에 누워있었다. 주언니가 버리려던 이불, 알프스 빙하수 마시고 자란 거위털 이불속에서. 몸이 피곤한 날이면 냉장고에 쌓인 과일과 상부장에 처박혀 있던 유기농 쌀로 만든 누룽지 끓여 먹으면서.


목이 따끔거리는 거 같으면 뉴질랜드에서 직배송한 마누카꿀을 따뜻한 물에 타 마시고 백화점에서만 파는 쿠키로 허기를 달래며 연예인 누가 먹는다는 100% 땅콩버터로 영양 보충했다. 그러다 방에만 있는 게 답답하면 거실 소파 위에 누웠다. 고시텔보다 큰 천만 원이 넘는 소파에서.


“그러고 보니까 그 소파가 이 집보다 비싸네. ㅎ”


문득 주언니는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하다. 집이랑 카페는 날렸어도 통장에 돈이 없지는 않을 테니 당장 잘 곳은 있을 거다. 무엇보다 50L 쓰레기봉투에 잔뜩 담아갔던 명품만 팔아도...


“번호 바꾼 거 같던데. 그래도 친척들 다 부자라고 했으니까 금방 해결되겠지.”


주언니는 가는 곳마다 친구를 만드는 인싸였다.

그래서 나도 처음 취직한 출판사에서 친해졌는데 2년 전, 집을 구하고 있다고 얘기하니 대뜸 자기 집에서 하숙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방 하나랑 화장실 하나 줄 테니 들어와 사는 거 어떠냐고. 보증금 없이 관리비 포함 월세 60만 원으로.


그녀는 외출 후 들어왔을 때 빈집에서 도는 냉기가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개나 고양이를 키우자니 돌봐줄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또 명품 가득 찬 집에 아무나 드릴 수도 없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완벽한 인프라에 조경, 안전, 거기다 쾌적한 공간까지. 청약 당첨 같은 행운이었다.


“그동안 언니랑 지내면서 외롭지 않고 좋았는데.. ㅎ”


한 달 중 절반은 혼자 지냈지만, 둘이라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즐거울 때가 더 많았다. 특히 시답잖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미세먼지가 너무 심하더라는 그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게.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저걸 사는 게 아닌데...”


구석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명품백이 눈에 거슬린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명품백을 살 수 있었던 건 주언니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좋은 집을 관리비, 공과금 없이 월세 60만 원으로 깔끔하게 끝내준 덕분에 나는 더 쉽게 지름신을 받아들였다. 그 여유가 진짜 나의 능력인 줄 알고. 진짜 내가 저런 가방을 사도 되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줄 알고.


“으휴, 내가 미쳤지... 으휴!!”


첫 할부도 시작되지 않은 구찌백을 향해 바닥에 있던 옷을 집어던진다. 그건 아무리 던져도 백에 스크래치를 내지 않는다.


“330만 원만 더 있었어도 평수가 쪼금 더 넓지 않았을까...”


저 가방만 안 샀어도, 지난주에 호캉스만 안 갔어도, 기미 확 지워준다는 저 앰플만 사지 않았어도... 이번 일에 나는 집에 대한 걱정을 좀 덜 수 있지 않았을까?


‘하아... 이번에 취직하면 돈 좀 모아서 집 옮겨야지. 근데 어디로 가지? 월급 한 푼 안 쓰고 6달을 모아도 돈 2만 원이 안 되는데...’


오피스텔 형태에 복층 원룸 가려면 월세가 비싸진다. 아니면 보증금이 비싸지거나.


“가만, 지금 내가 34살이니까 빨리 취직하고~ 마흔 전까지 빡세게 돈을 모으면...”


매달 150만 원 6년 모으면 딱 1억 800만 원이 생긴다. 근데 그 돈으로는 서울은커녕 경기도, 그러니까 서울 직장과 가까운 곳에 방 2개짜리 아파트 하나 못 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생활비가 130만 원 남는데... 60만 원은 월세 나가니까 남은 70만 원으로 6년을 살아야 하는 거네.”


근데 그렇게 해도 결국 갈 수 있는 데가 원룸 아니면 빌라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솔직히 취직 후 1년 정도 여기서 버티고 악착같이 모은다 해도 600만 원 이상은 불가능할 거 같다. 청년임대주택은 언제 될지도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그것도 마흔 되면 자격도 안 되고. 아무리 계산해 봐도 답이 없다.


“역시 돈을 더 버는 게 답인데. 뭐라도 배워야 하나...”


투잡을 뛰자니 체력이 자신 없고 이제 와서 뭘 배우자니 막막하다. 토익이니 뭐니 대학생 때 매달리던 건 요즘 연봉에 도움도 안 된다. 기사 자격증 정도는 있어야 더 나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데...


“내가 그거 딸 정도 됐으면 S대를 갔지...”


이러다 마흔에도 여기 누워서 똑같은 걱정 하며 사는 건 아닐까?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는 현자들 말이 오늘따라 의미 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10년 전, 내가 먼 미래라고 부르던 그 시간이라.


‘10년 전 34살에 어떻게 살지 고민하지 않아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냐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8만 시간 이상이 흘렀지만, 그건 마치 어제 내린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어느덧 나는 아주 먼 미래였던 오늘에 와있다.


그런데 만약, 지금도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흔은...


‘그때도 지금과 변함없다면... 진짜 살기 싫을 거 같은데...’


몸을 살짝 옆으로 굴리니 세탁기, 냉장고, 싱크대, 화장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몸을 한 번 살짝 움직이고 발을 쭉 뻗으면 다 닿을 수 거리에 있다.


지난주만 해도 첫 시야에 들어오는 건 가전제품이 아니라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이었는데. 마음이 갑갑하니 폰을 본다.


“그러고 보니까 나 3일 동안 SNS 한 번도 안 봤네?!”


SNS 중독자라 하루도 못 끊을 줄 알았는데 막상 살길 막막해지니 그거 볼 마음이 전혀 안 생긴다.


“에혀.. 문자나 정리하자.”


연락을 하나둘 지우다가 누군가와의 대화창에서 한동안 멈칫하는 류나. 그동안 지인들한테 보낸 문자에서 안달복달하던 나의 모습이 보인다. 


주언니 집에서 쫓겨 나와 추위에 떨며 놀이터에 앉아있을 때 지인들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안부 문자를 보냈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찹쌀떡처럼 적은 안부 속에는 분명 고추냉이처럼 매콤한 나의 이슈가 들어있었다.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하나둘 도착한 답장에는 그들이 거절하기 위해 고민했을 흔적이 보였다. 고추냉이 냄새 풀풀 나는 찹쌀떡을 물지 않으려는...


‘막판에 도와달라는 문자는 하지 말 걸 그랬나...’


거절하는 마음도 편치 않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괜히 불편을 준 거 같아 미안했다.


“그래도 막내 고모는 바로 집으로 부를 줄 알았는데...  ㅎ”


투룸에서 혼자 사는 막내 고모. 어려서부터 류나네 가족과 가까이 지낸, 나와는 살짝 격 없는 고모조카 사이다. 하지만 나의 그날 이슈에 고모는 한참 답이 없었다. 그러다 지낼 곳이 생겼다는 소식에 문자 하나 보냈을 뿐.


- 친구 집에 있다고? 다행이네. 지낼 곳 잘 찾아봐~~


엄마는 나의 얘기를 듣자마자 집으로 오라고 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아빠의 잔소리와 부정적 감정 폭격을 맞으며 들들 볶이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갔으면 하루도 못 버티고 모텔 갔을 거다.


엄마는 아빠한테 이번 일에 대해 아예 얘기도 안 꺼냈다고 했다. 듣자마자 딸 욕이나 할 테니까.


“주언니는 별일 없겠지? 친척들 다 부자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려던 순간 띠링 오랜만에 남동생에게 문자가 온다.


- 집 구했다는 얘기 들었어. 100만 원 보냈어.


나는 한참 그 문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답을 보내야 할까. 부모도 안 주는 돈을 동생이 보냈는데.


“엄마가 결국 말했구만. 이럴까 봐 말하지 말라니까... 으휴...!”


나는 오빠 하나, 남동생 하나가 있다.

남동생은 대기업에 다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부모를 만난 탓에 결혼 비용, 자기 생활비, 공부할 돈, 집 마련 비용까지... 모두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불평불만 없이 조용히 자기 할 일 잘하며 지내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늘 장남 노릇까지 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


미안한 마음과 달리 나는 돈을 다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당장 궁하다 보니 체면 챙길 여유가 없어서. 대신 소액 대출받은 걸 갚고 남동생에게는 고맙다는 문자 하나 덜렁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대로 폰을 바닥에 엎어놨다.


“아... 진짜 피곤하다... 그나마 내일 회사 안 가는 덕에 늦게까지 잘 수 있으니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멍하니 누워있으니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긴장과 피로가 슬슬 온몸에 퍼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곧 왕우아가 주고 간 이불을 덮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평일에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뜨니 좋다. 눈 앞에 화장실과 주방, 작은 세탁기에 현관문까지 다 보이는 게 짜증나서 그렇지... ㅎ


“으어어어.. 삭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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