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흰 연기를 뿜는 커다란 철상자에는 여흑막이 낙서를 하는 하얀 판이 붙어 있다. 그 판에는 흑막들이 가르쳐준 '숫자'들이 순서대로 쓰여 있는 부분도 있는데 유독 '11'이라는 숫자에는 붉은 동그라미와 수많은 별들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결혼기념일'이라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있었다. 그녀가 이토록 강조할 때는 항상 무슨 일이 생겼기에 난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난 '결혼기념일'이라는 뜻을 예상외로 쉽게 알게 되었다. 남흑막이 자랑하려는 듯 나에게 네모난 종이를 보여줬다. 그 종이에는 순백의 화려하고 큰 옷 입고 있는 여흑막과 칠흑의 어두침침한 옷의 남흑막이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종이엔 감옥에 찾아왔던 남흑막과 닮은 나이 든 흑막들, 인우 삼촌, 해민 이모뿐만 아니라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날이 바로 흑막들이 나의 감시자로 선정되어 많은 사람에게 축하받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감시자가 되는 게 그렇게 큰 일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결혼기념일'은 아주 대단한 날이었다. 여흑막과 산책 중에 막대기를 세워놓은 모양의 '11'이라는 숫자가 곳곳에 보였다. '11'이 무척 대단한 것인지 천에 다양한 문양과 화려한 색으로 꾸며 놓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매달아 두었다. 예전에는 없던 빨간 상자들, 초록 상자들도 전시되어 있었고 예쁘게 꾸며진 바구니도 보였다. 감옥 근처뿐만 아니라 온 도시에 이렇게 해 놓은 걸 보니 흑막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온 세상이 축하하는 걸 지켜보며 '그런 감시자가 감시하는 나는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둠 속에 갇히기 전의 기억이 없었다. 거대한 흑막의 나라와 싸우는 정의로운 나라의 주요 인물이거나 그들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서 탈출해서 내가 어떤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마침내 '11'일이 되었다. 역시나 다른 중요한 날과 마찬가지로 여흑막은 얼굴에 갖가지 색을 칠하고 남흑막은 나의 연약하고 고운 얼굴을 매섭게 찌르던 덥수룩한 얼굴의 털을 다 제거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남흑막이 나를 감시하고 있는 사이 여흑막은 "윙~윙~" 불길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준비했다. 중독적인 달콤한 향기가 내 코를 자극했다.
흑막들은 최근에 내가 환장하는 '떡뻥'이라는 음식과 함께 위험해 보이는 진득한 검은색과 하얀색 액체를 준비했다. 난 '떡뻥'에 중독되어 손을 뻗어 보았지만 나의 짧은 팔로는 닫지 않았다. 평소 잘 주기만 하던 그들은 오늘은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눈앞에 보이는 '떡뻥'을 먹지 못하자 너무 안달 나 울음을 터뜨렸다. "응애 응애"
그들은 그런 나를 잠시 달라고는 맛있는 '떡뻥'을 보기만 해도 불길한 걸쭉한 액체에 푹 담가버렸다. 순수하기만 했던 '떡뻥'은 액체로 더럽혀졌다. 거기에 더해서 그 위에 색색깔의 가루들을 뿌려 순수했던 '떡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걸 차곡차곡 꽂아두고는 기다렸다. 잠시뒤 질척였던 액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굳어 있었다.
흑막들은 드디어 준비가 다 됐는지 여흑막은 어두침침한 떡뻥을 남흑막은 창백한 떡뻥을 손에 쥐었다. 나도 그 둘 중 하나를 받을 줄 알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나에게는 순수한 떡뻥만 쥐어주었다. 난 다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앞에 아른거렸던 떡뻥을 입에 넣기 바빴다. 내가 입에 넣으려는 순간 "찰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어리둥절했지만 너무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기 바빴다. 내 손에 있던 떡뻥이 다 없어지자 여흑막이 또 새로운 떡뻥을 나에게 줬다. 난 다시 그걸 입으로 넣으려는 그때 또다시 "찰칵". 내 뒤를 돌아보니 흑막들이 나를 놀리려는 듯 나와 비슷한 동작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고 손상자로 기록하고 있었다. '나에게 치욕을 주다니 복수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