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쿠르 역사
파쿠르는 1980년대 말, 프랑스 파리 인근의 교외도시 에브리(Evry) 와 사르셀레스(Sarcelles) 에 거주하는 9명의 소년들에 의해 시작됐다.
데이비드 벨(David Belle)
세바스티앙 푸칸(Sébastien)
차우 벨 딘(Chau Belle Dinh)
윌리암스 벨(Williams Belle)
말릭 디우프(Malik Diouf)
얀 노트라(Yann Hnautra)
로랭 피에몬테시(Laurent piemontesi)
갈레인 엔구바 보옉(Guylain N'Guba Boyek)
샤를 페리에르(Charles Perrière)
파쿠르의 출발을 알려면, 이 9명의 소년들이 살았던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당시 프랑스는 이민자들이 대거로 유입되던 시기였고, 그에 따라 파리 주변에 이민자들을 위한 위성도시들을 건설했다. 에브리 역시 그때 만들어진 신도시였다. 무슬림, 힌두교도, 흑인, 아시아인 등 다양한 종교, 인종,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살았다. 그 때문에 사회적 갈등과 충돌이 잦았다. 길거리 싸움, 공공기물 파손, 방화, 도시형 빈곤문제, 범죄가 끊이지 않았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강인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들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무술도장이나 체육관도 갈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 ‘파쿠르’라는 이름도 없었고, 오늘날 우리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 움직임도 없었던 그 시절. 모든 것의 시작은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강해지기 위해 9명의 소년들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 했다.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극한의 상황에 도전했다. ‘내가 저 개울가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여기서 에펠탑이 있는 파리까지 쉬지 않고 달려갈 수 있을까?’, ‘저 아파트를 아무 장비 없이 맨손 맨몸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팔굽혀펴기 몇 개나 할 수 있을까?’, ‘지금 2.5m 높이에서 1,000번 뛰어내릴 수 있을까?’
매우 힘들고, 엄격한 훈련 모습을 상상하기 쉽겠지만 모든 것은 어린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모험적인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끊임없는 도전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실패, 시행착오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육체와 정신을 단련할 수 있었고, 오늘날 파쿠르의 모태가 되는 풀뿌리 움직임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청소년으로 성장하자, 파쿠르 창시 과정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그들의 친인척들과 가족들이다.
데이비드 벨은 아버지 레이몽 벨(Raymond Belle)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레이몽 벨은 프랑스의 전설적인 엘리트 소방관이자 군인이었다. 그는 베트남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되는 바람에 소년병으로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 군 부대에 들어가 군사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프랑스로 송환된 후에는, 프랑스 엘리트 소방연대 팀에 들어갔다.
레이몽을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따로 있다. 프랑스 소방 역사상 최초로 헬리콥터 구조 임무에 투입되어 헬리콥터에 매달려 약 91미터 높이에 위치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깃대에 달린 베트남 국기를 회수한 일이다. 이후 그는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구조 활동들을 성공해내면서 많은 명예훈장과 메달을 받았고, 그의 영웅적인 행보와 용기, 희생정신, 이타주의는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었다. 레이몽 벨은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수련체계 ‘Le Parcours'(길, 코스, 여정, 道)를 만들었고, 이를 자신의 아들 데이비드 벨과 친구들에게 전수했다. 이는 어린 시절 군사학교에서 배우고, 육군 소방대에서 터득한 조지 에베르(George Hébert)의 자연훈련법(la méthode naturelle)에 바탕을 뒀다.
조지 에베르는 프랑스 해군 장교이자 체육 교수 및 학자로서 갑판 생활을 하는 선원 및 해군들이 체력 저하로 고통받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을 관찰했다. 원주민들은 체육교사, 체육관이나 프로그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먼 거리를 창을 던지고, 나무를 타고, 절벽을 오르고, 개울가를 뛰어넘는 등 놀라운 신체능력을 발휘했다. 조지 에베르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달리기, 구르기, 매달리기, 균형잡기, 들어올리기, 던지기, 수영, 자기방어 등 맨손맨몸 운동으로 전신 발달을 꾀하는 체력 프로그램과 장애물 코스를 완성했다. 조지 에베르는 자연훈련법의 철학 및 정신적 가치도 완성하는데, 이는 훗날 파쿠르의 세계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02년,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에서 큰 화산 폭발이 발생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조지 에베르를 비롯한 해군들은 인명구조 활동에 파견된다. 그 과정에서 조지 에베르는 어떤 주민들은 너도나도 살기 위해 서로 밀치고 배를 빼앗고, 생존 경쟁을 벌이는 반면에 어떤 주민들은 아버지가 딸을 위해,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양보하는 이타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화산 폭발의 재난 상황에서 이타주의를 실천한 무리들이 더 많은 생존을 했다.
여기서 에베르는 극한의 위험 상황 속에서는 경쟁보다 공감, 상호연대, 협력, 상생하는 이타주의야말로 위기를 극복할 핵심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타주의는 대단한 용기와 정신적, 신체적 강인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음과 같은 좌우명을 정했다.
에베르는 경쟁의 기풍을 강조하는 스포츠는 자연적인 도덕성을 배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사람들을 신체 개발의 진정한 방법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강인함은 확실한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데 다방면으로 강인해지기 위해서는 어렵거나 위험한 운동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떨어지기, 뛰어오르기, 떠오르기, 가파른 곳으로 내려가기, 불안정한 곳에서의 걷기 등에서 두려움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훈련법의 핵심 가치로서 후일 파쿠르의 이타주의(Altruism) 철학으로 계승된다. 9명의 청소년들이 조지 에베르의 자연훈련법을 계승한 레이몽 벨을 만난 것은 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단순히 개인의 경험과 자기중심적인 ‘강해져라(To be strong)'에서 보다 확장되어 ’어떻게 강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은 것이다. ‘유용해지기 위해 강해져라‘는 개인의 생존뿐만 아니라 공동체, 사회, 세상과 연결되는 언어로 확장된다.
이외에도 1980~90년대 청소년들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것은 건물과 장애물들을 자유롭게 뛰어넘는 성룡(Jackie Chan)의 액션영화, 마블 및 DC코믹스의 스파이더맨, 배트맨 같은 히어로물, 드래곤볼 애니메이션이다. 실제로 9명의 창시자들은 청소년기에 파쿠르 수련을 통해서 불의에 맞서고, 타인을 돕는 도심 속 영웅을 꿈꾸었다. 또 뉴칼레도니아 출신의 ‘얀 노트라’의 가족은 전통적으로 군인들을 배출한 집안으로 엄격한 군사 트레이닝들을 파쿠르에 가져왔다. 세바스티앙 푸칸의 친형은 올림픽 육상 국가대표 선수였으며 그는 형의 영향을 받아 육상 기술과 달리기 주법, 스포츠 트레이닝, 코칭법을 파쿠르에 가져왔다. 1997년, 9명의 청소년들은 ‘야마카시(Yamakasi)'라는 팀을 결성한다. 팀 이름을 정하는데 있어서 구성원들의 고민이 많았다. 그 이유는 9명 모두 인종, 배경, 문화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함께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콩고 출신 갈레인 엔구바 보옉이 팀 이름으로 야마카시(ya makási)를 처음 제안했다. 콩고 링갈라어(Lingala)로 강인한 영혼, 강인한 육체, '초인‘을 뜻하고, 링갈라 부족이 전쟁터에서 전투 시작 전에 외치던 구호였다. 9명 모두 ‘강해지기 위해’ 모였던 만큼 이견 없이 동의했다. 야마카시 팀은 2001년, 뤽베송 감독의 눈에 들어 영화 <야마카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모험놀이, 육상기술, 자연훈련법, 군사훈련 등의 육체적인 요소와 그 시대의 대중문화, 가치관, 사회문제 등이 뒤섞여 파쿠르는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마카시팀은 있었지만, 야마카시팀의 움직임을 정의하는 단어는 없었다.
첫 이름은 '움직임의 예술(L'art du Deplacement)'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파쿠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에 도시 장애물들과 상호작용하는 움직임을 지칭하는 최초의 명칭이다. 그러나 1998년, 데이비드 벨은 자신의 아버지 레이몽 벨의 유산과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움직임 스타일과 철학을 더욱 드러내고,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불어 일반명사로 길, 코스, 여정 이라는 뜻을 지닌 Parcours에서 c를 k로 대체하고 묵음 s를 삭제하여 Parkour라는 명칭을 만들고, 야마카시 팀을 탈퇴하여 독립적인 활동을 지속한다.
데이비드 벨에게 있어서 파쿠르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탈출, 혹은 추적하는 실용적인 이동 기술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파쿠르에 대한 정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파쿠르를 ‘출발지점 A에서 목적지 B까지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이동 기술’이라 정의했다. 2004년 개봉한 영화 <13구역>은 데이비드 벨이 세계적인 배우이자 ‘파쿠르’라는 명칭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파쿠르는 Parcours, Yamakasi, Art du Deplacement, Parkour, Freerunning 등 창시자들의 사상과 대중의 욕망이 맞물려 다양한 이름으로 변모해 왔다.
도시 장애물을 맨손맨몸으로 극복하는 '움직임'과 그 태도에 대해 단서를 제공한 인물은 레이몽 벨(Raymond belle)이다. 그는 프랑스 군대 유격훈련 코스 'Parcours du combattant'(전사의 길)에서 따와 Parcours라 불렀다. Parcours는 일반명사로 길, 코스, 여정을 뜻한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참여했던 전쟁, 그리고 프랑스군 기계체조 선수, 소방특수부대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동네 사물과 환경을 신체단련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이 참여한 문화라기 보다는 그만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에 가까웠다.
첫 이름은 1997년, 야마카시 팀이 창단되면서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세바스티앙 푸칸이 Art du Deplacement(이동 예술)을 제안하고, 야마카시 멤버들 사이에 '야마카시'와 'Art du Deplacement'가 혼용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앙 푸칸은 기존에 사용하던 '전사의 길'에서 파생된 Parcours가 군대식 언어가 강하게 남아있어 야마카시 멤버들의 가치관, 움직임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는 군대 스타일의 맨몸운동, 남성적인 강인함도 있었지만 어린이 같은 놀이문화, 새로운 움직임을 발견하는 창의성, 자유와 사회비판적인 힙합문화, '슈퍼맨', '베트맨'으로 대표되는 마블 코믹스의 영웅서사, 이소룡과 성룡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환상이 녹아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체계적인 기술과 훈련방식은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야마카시 멤버들의 헌신으로 파쿠르의 근간이 되는 기초 이동기술이 빠른속도로 발견되고 개발되던 시기다.
두 번째 이름은 1998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데이빗 벨(David belle)이 Parkour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움직임과 실용주의적 사상을 근간으로 한 파쿠르는 새로운 장르를 접할 때 모호한 것보다 정확하고 생산성이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 그리고 정보화 시대(인터넷)에 힘입어 전 세계로 널리 알려졌다. Manpower Gap으로 상징되는 데이비드 벨의 경이로운 실력과 영화 13구역이 시대상과 잘 맞물렸다.
마지막으로 2003년, 세바스티앙 푸칸은 점프 런던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면서 영미권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접근성을 높이기위해 기존의 파쿠르 대신 '프리러닝'이라 노출했다. 본래 푸칸의 의도는 파쿠르와 상호교차적인 의미로 프리러닝을 사용했으나,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급속도로 생성된 세계 각지의 커뮤니티에서는(특히 Parkour.NET을 중심으로) 파쿠르와 프리러닝을 구분짓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앙 푸칸은 여론에 힘입어 파쿠르에 대한 자신의 사상 'Follow your own way'를 곁들여 프리러닝을 '창시'했다. 데이비드 벨의 파쿠르가 효율성에 중점을 둔 이동기술이라면, 세바스티앙 푸칸의 프리러닝은 예술성과 창조성에 중점을 둔 표현하는 움직임이다.(역설적이게도 푸칸의 움직임은 아크로바틱으로 버무려진 프리러닝보다 실용주의 파쿠르에 가깝다지만 말이다)
이 시기는 파쿠르가 영화, 방송, 게임, 광고 등 여러 대중매체에 소개되면서 10~20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커뮤니티 및 동호인들이 생겨나던 시기다. 야마카시 팀이 초창기 파쿠르를 개발하던 과정에서 어떤 '규칙'이나 '질서' 없이 움직임을 쌓아올린 것 처럼 세계 각지의 파쿠르 커뮤니티도 말그대로 자유분방하게 도시 장애물을 활용하여 새로운 움직임들을 만들어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야마카시 멤버들은 움직임을 '강인함'이라는 아이디어로 생성했다면, 새로운 커뮤니티는 대체적으로 남들의 인정, 유명세, 멋지고 화려하고 어려운 기교를 위해 움직임에 접근하다보니 아크로바틱, 기계체조, 브레이크댄스적 요소가 급속도로 파쿠르 동작에 가미되었다. 이를 종합해 봤을 때, 세바스티앙 푸칸은 프리러닝을 창시함으로써 대중의 욕망을 인정하고 파쿠르의 변화를 열어준 샘이다.
원점으로 돌아와서 데이비드 벨과 세바스티앙 푸칸이 각자의 이름을 들고 이탈한 야마카시 팀은 지금도 Art du Deplacement의 이름으로 이동예술 본연의 태도와 철학, 움직임 스타일을 보존시켜 오고 있다. 이들은 움직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 파쿠르와 프리러닝을 탄생시킨 어머니의 흔적, 전통을 간직하고 프랑스, 퀘벡을 중심으로 가장 조용한, 하지만 가장 뿌리깊은 그룹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된 파쿠르는 올드스쿨과 뉴스쿨, 어떤 창시자의 계보를 따르는지, 개인의 욕망, 사회적 관점에 따라 '파쿠르와 프리러닝은 같은 운동'이다 혹은 '아니다' 혹은 '구분짓는 것은 의미없다' 등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예를들어 파쿠르의 이동기술보다 고난도 동작 및 위험성을 요구하는 프리러닝은 공중기를 잘 못하는 파쿠르 수련자들에게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왔다. '공중기는 파쿠르가 아니야. 나는 순수 파쿠르만 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변화 대신 파쿠르 본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하는 보수적인 사고와 함께 자신은 공중기를 잘 못하기 때문에 공중기를 잘 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리거나 소외시키려는 욕망도 내포하고 있다.
파쿠르와 프리러닝 사이의 관계는 보다 정치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예를들어 데이비드 벨은 2018년 국제체조연맹 초대 파쿠르 위원장을 맡아 스포츠 파쿠르의 시작을 열었다. 그는 기존의 실용주의 파쿠르를 그대로 이어받은 '스피드 파쿠르'와 사실상 프리러닝의 개념과 동일한 '프리스타일 파쿠르' - 이렇게 2가지 종목을 만들었다. 창시자들 입장에서는 파쿠르가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입지가 달라지기 때문에 파쿠르 세계관을 창조한 신들의 전쟁- 라그나로크인 샘이다.
프리러닝은 대중을 사로잡는 쇼 비즈니스, 화려한 기술과 퍼포먼스로 자본주의에 효과적으로 흡수되었다. 또한 프리러닝은 파쿠르의 변질을 거부하는 커뮤니티로부터 기업들의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왔다. 대표적으로 레드불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트레이서들이 참여하고 싶어하는 레드불 '아트 오브 모션(Art of motion)' 대회는 초창기에 상당히 삐그덕거린 이벤트다. 파쿠르 커뮤니티들이 경쟁반대, 상업화 반대를 외쳤기 때문이다. 레드불은 파쿠르가 아닌 '프리러닝'을 사용함으로써 이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회피했다.
결론적으로 파쿠르, 프리러닝, 이동예술 사이의 관계성과 해석의 여지는 명분, 이름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있다. 이름은 길 잃은 존재를 드러내는 '집'이자 욕망을 숨기는 '아지트' - 양가적 기능을 한다. 그러나 낙타는 자신의 이름을 창조하기 보다는 이미 있는 이름 밑에서 자신의 삶을 봉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