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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쿠르 코치 김지호 Oct 13. 2023

5. 파쿠르로 살아있음을 느껴

17살의 '나'

고등학교 때 나는 존재감이 없었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며 앉아 있기만 했고, 운동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체력도 부족했다. 그런 일상이나, 내 몸에 불만이 전혀 없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다. 땀의 기쁨을 몰랐다. 내게 영화 <야마카시>를 보여줬던 친구가 갑자기 조회대 난간을 넘어 훌쩍 반대편에 매달리더니 풀썩 뛰어내렸다. “지호! 너도 해봐. 재밌어”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들과 구름사다리 위에서 누가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지 시합하고, 탄천의 다리 난간을 균형잡아 걸어가고, 높은 곳에 매달렸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나도 모르게 친구를 따라 난간을 붙잡았다. 그 날 우리는 야간자율학습 시작 종이 울릴 때 까지 끊임없이 조회대를 오르내렸다. 쉽지 않았다. 양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매달려서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막상 점프하려 하니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회대에서 운동장 바닥까지 온전한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자세와 타이밍에 착지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의 강렬함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게임에 몰두할 때의 그것과는 달랐다. 고작 조회대에서 운동장으로 뛰어내리는 행위였지만, 계속 남이 시켜서 하는 일만 하다가, 내가 정한 길을 걷는 느낌에 해방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온몸에 땀이 흘렀다. 저녁 공기는 시원했고, 이 느낌을 내일도 느끼고 싶었다. 


열일곱살의 나는 서서히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태어나보니 해야 할 일들이 모두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성적을 내서 좋은 대학에 간 뒤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소유하고,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내야 하는 세상. 심지어 장례식장과 관짝까지도 좋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는 세상. 탄생부터 죽음까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모든 것들이 정해진 삶에는 인간 '김지호'의 삶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목표를 성취해 나가는 기쁨도 삶의 소중한 의미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정해진 삶을 거부할 용기는 없으면서 하루하루 세상에서 낙오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내가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은 게임 밖에 없었다. 누군가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고고학자라고 답했지만 그게 진심인지는 확신이 없었다. 내게 닥쳐오는 모든 상황을 부정하고 나의 몸과 마음, 내 존재 자체를 함부로 했다. 


게임 중독과 우울증. 이 두 단어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파쿠르였다. 학교 조회대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었던 그 날 저녁부터 나는 변했다. 단 한 번 느낀 그 감정이 나를 살렸다. 모든 것이 정해진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인간 '김지호'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것이 변해왔지만, 20년 동안 단 한번도 변하지 않은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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