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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쿠르 코치 김지호 Oct 13. 2023

4. 파쿠르를 정의하는 '틀'

파쿠르는 위험vs안전 대신 효용가치로 봐야한다.

파쿠르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성은 단연코 '자유로움'이다. 자유의 의미와 용법은 개인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파쿠르는 파쿠르를 하고 있는 개개인마다 그에 알맞은 자유를 선사해 준다. 그 이유는 파쿠르가 규칙, 기준이 없는 무(無)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운동보다도 자유롭고, 수련자 모두가 각자 고유한 자기자신의 길을 추구할 수 있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스포츠가 기준, 규칙, 점수, 경쟁, 대회, 형식에 의해 비교, 평가, 판단의 결과중심적 활동인 반면에 파쿠르는 활동과 과정 그 자체를 즐기고, 도전과 성취 또한 개인 스스로 결정한다. 쉽게말해서 스포츠는 규칙 안에서 개인이 움직여야하지만, 파쿠르는 개인 스스로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무형식을 띈 파쿠르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파쿠르를 예술활동으로 보아야하는지, 익스트림 스포츠로 보아야하는지, 무술로 정의해야하는지, 청소년들의 모험놀이로 봐야하는지 정체성이 애매모호해서 미디어 및 언론매체들은 자신들이 편리한대로 언어 속에 파쿠르를 정의내리고, '틀'을 씌워 왔다. 그리고 그 틀을 통해 파쿠르를 접하게 된 대중들은 파쿠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뇌리에 집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틀이 '위험 vs 안전' 이다. 파쿠르는 위험감수(Risk-taking) 움직임이기 때문에 '위험 vs 안전' 틀에서는 당연코 위험하다라는 여론과 인식에 매몰될 수 밖에 없다. 위험성을 띈 교통수단인 비행기, 오토바이, 자동차 뿐만 아니라 건강에 위험이 있는 흡연, 패스트푸드 등이 '위험 vs 안전' 프레임으로 자신을 홍보하거나, 알려지게 된다면, 과연 지금처럼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애용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위험이 발생할 확률과 크기보다도 효용가치가 높을 때 그 선택을 지속한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위험 vs 안전'보다 '획일성 vs 다양성' 틀이라면, 기존의 획일성을 띈 스포츠와 달리 다양성을 띈 파쿠르의 장점과 매력이 돋보일 것이다. 나쁜 코치는 수련생의 약점을 지적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반대로 좋은 코치는 수련생의 강점을 강화하고,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파쿠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왜곡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파쿠르를 즐기는 사람들이 파쿠르의 약점을 강화하느냐, 아니면 파쿠르의 강점을 강화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틀에 갇혀있는가? 혹은 어떤 틀을 생산하고 있는가?




 파쿠르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지배권을 점유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권에서는 유효할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신과 관련된 위험 행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는 전능감 자체가 파쿠르 수련자의 활동범위와 자유도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선택한 위험이 그다지 적절치 못한 경우에도 '그 행동을 결정한 것은 나'라는 자존감이 가져오는 전능감이 부적절한 위험감수로 인한 피해를 넘어설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지배한다는 전능감'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문화권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이 그렇다. 많은 한국인들은 '정부, 사회, 책임자, 보호자가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개인은 자신의 위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편이다. '위험한 게 아닐까?'하고 두근두근하며 파쿠르 코치를 찾아갔는데, 코치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흔한 쉬운 방법을 설명하면 그것만으로도 벌써 반쯤 위험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위험에 대해 걱정하는 주체가 자기자신에게서 코치한테로 넘어가면서, 위험에 대해 고심할 책임에서 풀려난 것 같은 안도감이 파쿠르를 연습할 때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는 파쿠르 수업이 참여자와 코치, 장애물이라는 세 주체가 참여하는 일종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가지 패턴이 있다. 

 예를들어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면, 참여자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한 결과라 생각하는 코치가 있다. 그런 코치에게는 참여자가 곧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보인다. 그래서 "실패한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이다. 자기 책임이다."라고 참여자를 몰아세운다. 참여자는 반박할 수 없으므로 풀이 죽어 삶의 의욕을 잃는다. 

 이와달리, 장애물을 우주 바깥에서 온 '에일리언'쯤으로 설명하는 코치도 있다. 이를 상대로 코치와 참여자가 한 팀이 되어 싸운다는 이야기를 채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참여자와 코치는 동료로서 함께 '장애물'과 싸운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참여자의 자격지심이나 심리적 부담이 크게 줄어들고 참여자는 코치의 피드백에 최대한 협조하고자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가능하다. '장애물'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과 함께 살아가기'라는 독특한 철학이다. 이것도 또 하나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아는 한,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실패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건강하다. 

이 중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지는 개인의 자유다. 어떤 이야기가 결과적으로 참여자의 삶의 질을 가장 높일 수 있을지는 코치가 판단할 수밖에 없다. 

 위험에 대한 감수성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에서 도출된 것이다. 세계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적용될 수는 없다. 예를들어 미국은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하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을 인간의 이상형으로 내건 사회이므로 미국에서 '미국형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은 코치로서 적절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ps.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읽고 문득 떠오른 생각.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파쿠르는 장애물과 마주할 때마다 이러한 보편적인 진실을 드러낸다. 진실을 덮는 가장 쉬운 방법은 책임을 묻는 것이다. "떨어지면 누가 책임지냐" "보험은 가입했냐" "건물주에게 미안하지 않냐" 계속해서 타인과 세상에 책임을 물음으로써 자신의 안전, 자신의 불안을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가 목도하는 '재난사회'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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