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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Oct 22. 2022

미래를 기억하라

이토록 평범한 삶을 위해

한동안 깊은 패배감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는 일은 코로나 팬데믹에 직격탄을 맞았고 개인적으로도 여러 좋지 않은 일들을 겪었거든요.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저를 짓눌러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기가 힘들었습니다.


젊어서부터,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책 속에서 길을 찾거나 해답을 얻곤 했는데 근 2년 동안은 그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잡으려 책을 펼쳤지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딴생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단순해지려고, 생각이란 걸 멈추게 하려고 미친 듯이 걷기만 하며 지내는 동안 감정선 둔해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렸습니다. 지금의 내가 자연의 작은 변화에 놀라움을 느끼고 감동했던 예전의 내가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든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 책을 붙잡고 감흥 없는 책 읽기라도 계속하고 있던 중에 김연수 작가(이하 김연수로 씀)의 신간 발매 소식을 들었어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처음엔 아무런 기대도 없었습니다. 김연수의 감성적인 문장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답답하던 숨통이 좀 트일 것 같았거든요.


먼저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역시 읽기를 잘했구나!"

입니다.

저는 결국 책 속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덟 편의 단편 중 첫 번째 단편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으며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난주의 바다 앞에서"를 읽으면서 어느새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을 읽을 때는 묵은 설움이 복받쳐 오르기도 했습니다.

"진주의 결말"에 아래 부분이 나오는데 저한테 해주는 말 같아서 한참 머물렀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85쪽)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서부터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86쪽)


이해되지 않는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서운함과 배신감, 원망의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어요. 은연중에 내 생각을 드러낼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겁이 났거든요.


털어내지 못하고 속 좁게 구는 제가 싫어서 날마다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저를 들여다봤습니다. 이성과 따로 노는 마음 들썩임은 좀처럼 다독여지지 않았어요. 몇 달 동안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 체념과 맞바꾸고 나서야 잠잠해졌습니다.

회복이 아닌 체념이라니..


이제 저는 고요해졌습니다. 지금도 가끔 머릿속에서 안 좋은 생각이 일어서곤 하지만 이제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줄을 긋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김연수는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

냉혹한 현실에 내몰려 길을 잃은 당신에게

관계의 회복을 원하지만 방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있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30쪽)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32쪽)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34-35쪽)


김연수는 이런 말도 합니다.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60쪽)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를 '세컨드 윈드'라고 한다지요. 제게도 두 번째 바람이 불어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바람은 고통을 견뎌온 우리 모두에게  불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미래를 포기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김연수는 신학생이었던 한 남자가 수녀 청원 중이던 누이동생을 잃고 환속한 뒤 사십사 년이 지난 어느 날, 누이동생을 죽인 사람이 기차 안 옆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억눌렀는지 들려주며 이야기를 맺습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 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245쪽)


아들에게나 가족에게 냉담했던 그 남자가 어느 순간 다정해졌는데 위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해요.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242쪽)


저 또한 이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래를 잊지 않고 살아오도록 했던 신께... 앞으로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신께...  감사드리며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빛을 선택하기로, 더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이 책에서 소개된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시련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료안. 료안은 산골짜기를 홀로 건너가고 있었다. 봉우리에는 새까맣고 탐욕스러운 바위가 차가운 안개를 뱉어내고도 시치미를 떼고 있어 힘들게 올라가도 기댈 데 없이 쓸쓸했다. 험준하게 파인 길을 따라 걷느라 힘이 든 료안이 스르르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그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너의 세계야. 너에게 딱 어울리는 세계야. 그보다 더 진실은, 이것이 네 안의 풍경이야.'


료안은 꾸벅꾸벅 졸면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눈을 뜨고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정상에 섰을 때, 골짜기의 안개가 모두 걷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료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분명 험난하고 지독한 곳을 건너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거기에는 새하얀 목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료안에게 외쳤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 또한 료안이라고 말했는데, 료안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자신들이 서 있는 고원의 평평함에 대해 얘기했다.


"이곳은 정말로 평평하군요."


"네, 평평합니다. 하지만 이 평평함은 험준함에 대한 평평함입니다. 진정한 평평함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건너왔기 때문에 평평한 것입니다."


그 평평함을 안 뒤에 료안은 자신이 지나온 골짜기에 목련이 가득한 것을 다시 보았다. 그 사람은 목련나무를 가리키더니 그게 바로 '부처의 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료안의 말인지 그 사람의 말인 지, 혹은 두 사람 모두의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끝난다.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선입니다. 부처의 선은 절대입니다. 그것은 목련나무에도 나타나며, 험준한 봉우리의 차가운 바위에도 나타납니다. 골짜기의 어두운 밀림과 강이 계속 흘러 범람하는 곳의 혁명이나 기근, 역병도 모두 부처의 선입니다.(49-50쪽)


-미야자와 겐지의 「목련」을 바탕으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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