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0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모비딕 당구장 [10. 결]

ep_10

by 섭이씨 Jan 11. 2025
아래로

 
  밤 12시가 넘었지만 대학 여자 후배한테 전화를 건다. 후배는 논술 과외를 다니는데 지금이 한참 일하거나 막 마칠 시간이다. 내가 이 후배를 좋아라 하는데, 아는지 모르겠다.


  “실버니? 내다 니 선배님”


여자 후배는 이름에 ‘은’ 자가 들어가서 실버라고 애칭을 붙여 불렀다.


  “오.. 송선배. 웬일이야? 이 시간에? 술 꼴렸어?”

평소 여자로 보는 후배인데다가 술도 한잔했고 달콤한 목소리에 다른 것이 꼴렸겠지만 이 판국에 그 말까진 못 하고,


  “실버야. 나 과외 한 개만 해주라.”
  “참 나.... 그렇게 해준다 해도 안 하더니 오늘 왜 이러셔. 알았어. 마침 아주 부잣집에서 착실한 남자 국어 샘 알아봐 달라더라. 내가 선배 이야기 해줄께.”


  사교육에 대한 밀도 높은 나의 오랜 아집이 내 숨골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가 허공에 뭉쳐져서는 ‘진짜냐?’

하고 마지막으로 묻는 듯 나를 내려다본다.
당면한 카드청구서를 처리해야 하고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방 건너에서 들리는 고단한 어머니 코 고는 소리에 맞춰서 점점 커지는, 현실적인 자아가 슬며시 일어나서는 허공에 두리뭉실 떠 있는 내 아집을 손으로 홰홰 저어 날려 보낸다.
  내일은 책상 아래 깊숙이 넣어둔 책가방을 꺼내 들고 대학 선배가 하는 학원에 가 볼 것이다. 그리고 후배가 소개해 줄 과외 집에 인사를 갈 것이다.
 
  실버 후배가 소개해 준 집은 정말 고급 아파트였다.
  ‘그 집이 80평이래. 화장실 갔다가 길을 잃을 뻔했어. 조낸 크다구’
실버는 그렇게 말해줬었는데 과연 그랬다. 구조가 꼭 미로 같았다.
  내가 가르칠 남자 학생은 여드름이 막 나기 시작할 것처럼 피부가 번들거리는 중학생이었다. 내가 가르친다고 얘가 더 공부를 잘하게 되어서 부를 세습해 나가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그런 거에 일조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모님이 봉투를 건네준다.


  “선불로 드리구요. 잘 가르쳐 주세요. 우리 애가 선생님 재밌다고 좋아하네요.”


돈이다. 실버가 뭐라 말해 놓았는지 백만 원이나 들었다.


  고급 아파트를 나서는데 선배에게서 전화가 온다. 이번 주말부터 주말 보충반을 좀 맡으라고 한다. 진도 따라가는 것이 부진한 몇몇 애들 앉혀놓고 지루하지 않게 농담이나 섞어가며 하면 되는 수업이니 준비할 것도 별로 없단다. 토, 일 수업이라 특강비도 더 주겠다 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배.’

 보는 사람 없는 절을 전화기 잡은 채로 했다.  
 


  슈웅- 하고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나의 가을은 그렇게 지나갔다.
찬바람이 가을이 붙잡고 있는 남은 온기를 쑥쑥 밀어내고 겨울을 불러들이고 있다.
부산에서는 드문 눈이 오는 날 밤, 요양원에 모셔다 놓은 아버지같은 내 당구장을 찾았다. 두호가 지방에 직업교육을 받으러 가는 바람에 당구장은 한 달째 잠겨 있다.

  소형 자판기 전원을 꺼놓지 않아서 아직 뜨거운 커피가 나왔다. 한참을 소파에 앉아서 당구장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가 식은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일어섰다.
아! 저거라도 챙길까.... 전축 장식장 서랍을 열어 화투랑 카드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내었다. 이 당구장 다음 사람이 권리금을 주고 들어오면 이거라도 있어야지 하는 생각에.
자판기에 연결된 콘센트를 뽑았다. 좀 전에 뽑아낸 커피가 혹시 이 기계의 마지막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구장 문에 색 바랜 점포세 종이를 갈아붙이고 계단을 내려서니 아까부터 내린 눈이 제법 쌓였다.
내가 들어올 때 난 발자국마저 지워져서. 새하얀 태고의 숯 눈을 보는 것 같다.  
하기야 원래부터 이 언덕 꼭대기는 사람이 잘 안 다녔다.

  몇 해 전 현석이와 소주 한 잔을 나누던 가게 미닫이 문 사이로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던 날이 있었다. 내가 하얀 똥떵거리 어쩌고 하며 너스레를 떨고 있는데 석이 놈이.


  “눈이 오는 누운 길에 눈을 주니 눈이 녹아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네. 눈을 들어 눈을 보니 어느새 눈이 내 눈에 들어가 누운 길에 흐르는 저 눈물처럼 눈물이 되어 흐르네”  


오. 내가 엄지를 치키며 공고 출신이 국문과보다 낫구나!
 
  당구장 언덕 아래로 길게 누운 길에 하늘에서 내린 눈이 켜켜이 쌓여간다. 언덕길 가장자리로 녹아내린 눈이 제법 물길을 만들어 내며 흐르고 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함박눈 한 송이가 눈에 들어간다. 분홍빛 흰자위에서 눈이 녹은 눈물이 언덕을 따라 흐르는 눈물처럼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작가의 이전글 모비딕 당구장 [9]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