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서촌에 살 때에 집 앞에 코 모양의 간판을 가진 가게가 있었다. 어떤 가게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향수를 만드는 공방일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자주 길을 잃는 나는 그 간판을 표지 삼아 길을 찾았다. 사람들과 약속을 할 때는 말했다. "코앞에서 만나요." 꽃의 영혼은 향기라는데, 어쩌면 사람에게도 향기가 존재하지 않을까. 저마다 다른 영혼의 향기가.
나를 끓이면 무엇이 나올까. 한 방울에 농축해 담는다면 어떤 향이 날까. 오늘은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입을까. 나는 언제쯤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을까. 사람과 세계,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나를 꼭꼭 닫는다. 마음껏 황홀해질 수 있는 시간적 공간. 불순물을 몰아내야지. 체취를 만들어 담요처럼 덮어야지. 코앞에 도착하면 취향껏 재료를 골라 향수를 만들기 시작한다.
탑노트 : 웃음, 토마토, 엉뚱하고 별난 꿈.
미들 노트 : 엽서와 깃털, 닿을 수 없는 이상에서 긁어낸 눈물 한 방울, 회의적 낙관.
베이스 노트 : 우울, 고립, 무기력, N극과 N극, 커피와 수면제.
#주의사항#
1. 향이 짙을수록 지겨워진다.
2. 단독으로 뿌리는 것보다 침묵과 레이어드 할 때 위험요소가 적다.
3. 탑과 미들의 향이 다 날아갈 때까지 남아있지 말 것.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특별한 향기가 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런 향이 없어 매일 아침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 입는다.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라나 델 레이, 닐루시, 선우정아, 마분지와 노끈, 몬스테라, 비 오는 날. 취향이란 무엇일까.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자 정체성. 타인과 나를 구분 지으며 존재를 증명하는 일종의 증명서.
사람이란 사랑을 하며 평범해진다. 사랑하면 할수록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간다. 그게 두렵다.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될까 봐. 만약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행동을 하며 나의 존재가 지워진다면, 나는 왜 존재해야 하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 이상하더라도 구별되는 편이 나았다. 사람들이 흔하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드문 취향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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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조금 신기한 사람이었다. 처음 본 날 대뜸 자기소개를 하고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내가 이야기한 사소한 비유와 은유를 기억하며 인상적이라고 말해주는, 이상형을 말하는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내 이름을 말하는, 신기한 사람.
나는 낯을 많이 가려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12월이 다가오고 날씨가 쌀쌀해졌지만, 누군가 내 생일을 축하해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굳이 아쉽지도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내 생일은 특별한 날이 아닐뿐더러,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사람들이 안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네 손의 온도로 만들어진 레몬청의 차가운 유리병이 내 손의 온도로 데워질 때.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너의 온도를 느낄 때. 그날 너에게 연락이 왔다.
1. 모레 정도까지 상온 보관. 설탕이 너무 아래에 쌓이면 가끔 흔들어주세요.
2. 그 뒤 냉장보관 3일 정도. 냉장 보관한 뒤 먹으라고 하네요.
3. 겨울엔 차로 많이 드시겠지만 맛은 장담 못합니다. ㅋㅋㅋ 정성을 받아주세요.
편지라도 써서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 ㅋㅋㅋ
레몬청 먹는 방법을 적어 유리병에 붙여놓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자주 들여다보았다. 너는 편지라도 써서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지만, 작은 유리병에 담긴 레몬청 한 병이 나에게는 너의 언어로 적은 편지처럼 느껴졌다. 너와 나의 언어는 달라서 해석할 수 없지만, 언어란 언제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지만, 어쩐지 냉장고 속의 차가운 유리병이 따뜻하다는 생각만은 지울 수 없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거닌다. 나는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고 생각보다 무관심하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은 것들은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존재하니까. 너는 나에게 얼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얼굴이 내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거니는 세계에서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세계로 넘어오는 순간. 그런 순간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때 찾아온다. 이를테면 설탕이 가라앉아 잘 흔들어줘야 하는 레몬청이나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늘 같은 노래, 불현듯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주는 손길이나 청포도 타르트의 묵직하고 상큼한 식감과 함께.
너는 내 세계에 불쑥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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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너에게 연락이 왔다. 장난처럼 너에게 비 알리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해서, 눈 오는 날을 좋아해서, 그런 날 연락이 오는 네가 좋았다. 어느 날 너는 조금 외롭다고 했다. 반복되는 일상에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나는 편지를 쓰겠다고 했고, 너는 주소를 보내주었다. 너는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고, 나는 겨울잠을 잔다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만약에 본인이 지금이랑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어떤 이름이었을 것 같아요? 너는 겨울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너랑 연락은 은근 힘이 된다.
챌린지를 시작했다. 네 일상에 기대할 만한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주 연락이 늦지만, 이번만큼은 '매일매일 랜덤 시간대에 랜덤 질문'이라는 규칙을 지키기로 했다.
1일 차
만약 살면서 겪었던 사건 중 세 가지 사건을 선택해 꿈을 제조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재료로 선택할까요?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 만들어진 꿈은 어떤 내용인가요? (단, 선택한 사건들은 현실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2일 차
길을 가던 도중에 어떤 사람이 다급하게 뛰어와 뜬금없이 당신을 잡고 어디론가 달립니다. 한참을 달리다 어느 골목에서 멈추는데 얼굴을 보니 모르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은 숨을 고른 후 무언가 말을 꺼냅니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요? 이 사람은 누구이며 무슨 말을 했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3일 차
길을 걷다가 어느 공방에 도착합니다. 들어가 보니 공방 주인이 인사를 하고 간단히 설명합니다. 이곳은 성격을 테마로 향수를 만드는 공방, 이제부터 베이스 노트, 미들 노트, 탑노트에 들어갈 향을 직접 고를 거예요. 베이스 노트는 나의 근본이 되는 성격적 요소 다섯 가지, 미들 노트는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때 사용하는 요소 세 가지, 탑 노트는 나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 두 가지를 넣어 제조합니다. 향수가 완성되면 향기를 맡는 사람은 탑노트의 향기를 가장 처음 느끼고, 첫 향이 휘발되면 자연스레 미들 노트를 지나 베이스 노트가 잔향으로 남습니다. 재료를 고르고 만들어진 향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4일 차
자고 일어나 보니 이곳은 영화 속입니다. 어떤 영화이며 내 역할은 무엇이고 어떻게 행동할까요?
5일 차
어느 날부터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사진 속의 인물, 사물, 동물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며, 생명체의 경우 현실에 살아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자아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점은 사진을 찍을 당시입니다.) 무엇을 해볼까요?
6일 차
https://www.youtube.com/watch?v=jB5m_TcGLYc
당신이 날린 종이비행기 끝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람일 수도, 꿈일 수도,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어요.
7일 차
최근 들어 도플갱어에게 사람들이 바꿔치기당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내 도플갱어가 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자신만의 특징적인 부분을 적어주세요. 특정 질문으로 구분,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으로 구분 등 내용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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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만나자고 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을 잡았다. 수업과 수업 사이 세 시간의 공강이 있던 날 네가 찾아왔다. 나는 수업을 듣고 너는 토익 공부를 했다. 마들렌과 스콘을 주문하고 이상한 단맛의 음료를 마셨다. 마들렌을 보며 너는 친구의 취향을, 나는 프루스트를 이야기했다. 산책을 했다. 오르막길을 걸었다. 구두를 신은 내가 불안하게 휘청거릴 때마다 네가 팔을 뻗어 잡아주었다. 나는 꼭 연행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라며 장난을 쳤다. 너는 물었다. "연락을 늦게 보는 이유가 있어?"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다시 수업이 시작되고, 너는 공부를 하다 일어났다. 네가 떠난 자리에는 충전기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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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지갑, 열쇠, 핸드폰,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잠시 충전기를 바라보다 가방 안에 넣었다. 나는 일찍 도착했고, 너는 정시에 도착했다. 개찰구 앞에서 기다리다 횡단보도로 마중을 나갔다. 버스에 올랐다. 나는 밤을 새웠지만 책을 읽었고, 너는 잠을 잔다고 했지만 자주 깨는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시장에 가서 실컷 먹고,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 갔다. 청포도 타르트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루프탑에 앉아 바다를 보기로 했다. 네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조금은 의아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네가 이야기하면 나는 웃었다. 사실은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났다. 너는 두부를 싫어하지만 그것을 알기 전부터 나는 너를 순두부 씨라고 불렀고, 우리는 순두부 젤라또를 먹었다.
청량리의 어두운 밤거리를 한참 걸었다. 마스크를 썼지만 오랜만에 하는 밤 산책이라 그런 건지, 너와 있어서 그런 건지 나는 모든 것이 좋았다. 원래 목적지인 서울역이 아닌 청량리에 내린 것도, 마땅히 들어갈 만한 음식점이 보이지 않는 것도, 가게들의 문이 전부 닫은 것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산한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도, 조금 머쓱해 보이는 너의 얼굴도.
너는 내게 말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유난히 힘든 날이면 편의점에 들러 웰치스와 새우깡 한 봉지를 샀다고. 당시에는 탄산음료 중에 웰치스가 제일 비쌌다고. 집에 가서 웰치스를 마시고 새우깡의 부스럭거리는 비닐을 뜯으면 나름대로의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금은 탄산음료 중에 웰치스가 제일 싼 편이 되어버렸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너는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나는 탄산음료를 좋아하지 않는다. 새우깡이 있으면 먹지만 사서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독 우울하고 외로운 날이 찾아오면 웰치스와 새우깡을 사서 가만히 바라본다. 타인에게 말하지 못하고 물건에 담겼을 너의 짙은 밤을 헤아려 본다. 감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웰치스와 새우깡으로 인해 내 견고한 취향의 세계에 틈이 생겼다.
너는 종종 요즘 듣는 노래나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 말하곤 했다. 좋아하는 분위기의 영화나 진로에 관해서도. 그러면 나는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정보를 검색해보고, 네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보았다. 취향의 범위가 넓어졌다. 네가 신기했다. 나는 그저 들을 뿐이었다. 무언가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곧바로 그 말이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심으로 듣고, 들은 이야기를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표현이라는 건 어려워서, 어떤 것에 대해 설명하려는 순간 목에 솜을 욱여넣은 것 같다. 결국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지막에 남겨지는 것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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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라일락이 피어나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매번 라일락의 향기에 대해 묻고, 모른다는 대답을 돌려받기를 습관처럼 반복하는. 이제 여름 라일락을 보면 네가 떠오른다.
누군가의 얼굴을 인식한다. 이야기를 나눈다. 레몬청, 바다, 순두부 젤라또, 웰치스와 새우깡, 라일락. 압축된 대화가 상징과 기호 속에 담긴다. 특별한 이야기가 의미 있는 상징이 되어 구체화된 대상에 깃든다. 그렇게 취향이 만들어진다. 시니피에를 가리키는 시니피앙으로 존재하며. 타인의 취향은 나만의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재구성한다. 타인의 취향이 나의 취향이 되는 순간, 나의 취향이 타인의 취향이 되는 순간. 그 순간들이 교차되는 지점. 서로에 대한 이해의 단서로 존재하게 될, 타인의 취향을 받아들이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내 존재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는 것. 너와 함께라면 평범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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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안녕, 그냥 전화해 본 거야?
비가 와서요.
그쪽에 비 와?
네... 잘 지내요?
난 잘 지내지. 너는?
잘 지내기도 하고 못 지내기도 해요.
그리고 말한다.
좋아했고, 포기했고, 좋아하고, 포기하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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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는 내게 물었다. 혼자만 깨어있는 거 억울하지 않아? 나는 대답했다. 안 억울해요.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잘 자면 좋죠. 그게 순두부 씨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익숙하거든요. 너는 대답했다. 멋진 사람이네.
나는 멋진 사람이 아니라서, 혼자 깨어있는 밤이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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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건 보내지 않은 내 편지다.
*아녜스 자우이, <타인의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