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다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라는 메모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두 잔의 커피를 마셨고, 뇌는 밤하늘의 별처럼 깨어나고, 심장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대변하듯 거칠게 뛴다. 두 손은 미처 끄지 못한 카톡 알림의 진동처럼 울리고, 두 발은 허공을 걷는 것처럼 꿈꾸듯 움직인다. 즐거운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실수인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커피와 함께 찾아온 불안의 길을 걷는다. 온 세상이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자꾸만 덜덜 떨린다. 난기류를 만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비행기처럼.
-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언제나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걷는다. 불안을 담요처럼 두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언가를 가져가는 버릇이 있다. 불투명한 봉투에 초록색의 정직한 글자로 '취침 전'이라고 쓰인 약을 먹지 않았던 다음날, 나는 돌을 차며 집으로 걸어갔다. 발로 차고, 굴리고,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보려 애쓰지만 계속해서 제멋대로 튀어나간다. 언제든 버리고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짧은 찰나의 순간, 이미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어쩌다 눈에 들어온 이 작은 돌을 멋대로 달래고 달래, 결국 집까지 데려간다. 나는 돌에게 불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불안을 차며 걷는다. 내 방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일상과 이상, 세상, 그리고 불안.
커피 두 잔을 마신 오늘은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가벼움이 발걸음 진다. 금방이라도 발뒤꿈치에 날개가 자라 땅으로부터 몇 센티미터 위로 떠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바뀌지 않는 신호등이 유독 초조하고, 흰색 페인트로 칠한 횡단보도는 유난히 냉정하다. 시장을 향해 바쁘게 걷는다. 내 몸의 삼 분의 일 정도 되는 키를 가진 고무나무를 고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그리워하듯 처음 보는 고무나무를 오래전부터 지켜보았다. 오늘은 식물을 끌어안고 싶은 날이다. 온몸으로 껴안아 나를 판단하지 않는 생명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날이다. 두 팔로 삼만 원짜리 생명을 꼭 붙잡는다. 설렘과 불안이 뒤섞이도록, 둘 중 어느 것이 이유인지 알 수 없도록. 무거운 화분은 헬륨 풍선처럼 자꾸만 떠오르려는 나를 묵묵히 땅으로 누른다. 그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
프루스트가 그랬듯 사물에 담긴 기억이 있다. 이를테면 어떤 날의 공기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어디쯤에 있던 그때의 공기와 닮았다. 가로로 놓인 침대와 그 옆의 낮은 협탁,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던 그때의 공기. 창문을 열어놓고 차가운 나무 책상의 감촉을 느끼며 침대에 기댄다. 책장을 넘긴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플라스틱 박스에는 코코넛 오일 냄새가 나는 인형과 인형의 옷들이 가득하다. 밖에서는 공사장 포크레인 소리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리던, 선선함에 조금씩 눈이 감기고 잠이 쏟아지던, 그때의 공기. 가을과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기억을 잘 흡수하는 소재로 만들어진 걸까. 그래서 가을에 접어드는 지금 수많은 기억이 떠올라 숨이 막히도록 차오르는 걸까.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무겁게. 의미와 무의미는 적절한 비율로 섞여 들어간다. 적어도 그렇길 바랐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그 모든 것은 사실 말뿐이고 너무 무거워 불편하게 하거나 너무 가벼워 서운하게 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누군가를 존중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의 불안은 어디서 오는 걸까. 커피로부터, 혹은 계절로부터.
-
알약 두 개를 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긴다. 점차 추를 단 것처럼 무거워지는 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차분함과 안정감. 커피와 신경안정제의 조합은 끔찍하다. 심장은 계속해서 뛰며 생명의 춤을 추고, 뇌는 끝없이 가라앉아 가장 어두운 밤을 이야기한다. 그 사이에는 앉을 수도, 설 수도, 날 수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가 있다. 나는 언제나 모순적이라 어떤 것이 나인지 알 수 없다. 무엇이 되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해도 내가 될 수 없으며, 영원히 나에게로 돌아온다. 잠이 오지 않는다. 불안과 위안을 가만히 쓰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