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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Aug 26. 2021

트램펄린 위의 기분

SHAED x ZAYN _ Trampoline


그는 매일 아침 트램펄린 위에서 눈을 뜬다. 미동 없이 잔잔한 표면.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다. 잇새로 미처 숨기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누가 보면 실 없이 웃는다 할지 모르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웃고 싶었다. 이제 조금씩 쌀쌀하게 느껴지는 초가을의 공기가 잠이 덜 깨어 멍한 머리를 두드린다. 밤새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속을 벗어난다. 피부에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 잔잔한 표면이 출렁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신나게 뛰는 트램펄린 위에 홀로 누워있는 사람처럼, 표면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넘실댄다. 가벼워진다. 그는 점점 떠오른다. 위로, 더 위로. 허공으로 붕 뜬 몸. 그대로 멈춘다.


보드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선다. 뒤를 돌아보며 아직 아무도 깨지 않은 집을 향해 경쾌한 인사를 던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안녕, 좋은 아침!


6시 42분. 일찍 일어난 탓인지 거리는 한산하다. 택시 몇 대가 오가고, 간혹 이르게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나둘씩 켜지는 가게의 전등과 태양의 움직임으로 점차 살아나는 거리.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은 기분이다. 그는 보드 위에 발을 얹고 건물과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음률을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휘파람을 분다. 깜빡이는 버스 정류장의 안내판. 현재고등학교 방면, 남은 시간 3분. 횡단보도 건너를 뚫어져라 본다. 무언가 새로운 게 필요하다. 일상을 벗어나 지금의 기분을 담을 수 있는.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에 충동적으로 반대편 버스를 탔다.


삐빅.


학생입니다. 버스 카드를 찍고 뒤에서 두 번째 좌석 창가에 앉는다.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불안감과 그보다 더 큰 홀가분함. 매일 가야 할 학교가 없었다면 학교를 벗어나는 불안과 홀가분함의 뒤섞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머니에서 한쪽이 망가져 들리지 않는 줄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어느 지하철역에서 만 원을 주고 사서 이틀 만에 고장이 난. 음질이 좋지 않아 귀가 아프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익숙하게 플레이리스트의 스크롤을 내린다. 선곡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어쩌면 하루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노래.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런 느낌이다. 조용하고 푸른 선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바빠지는 이 노래의 길이는 16분 26초. 노래가 두 번 순환하고 끝나는 때에 내리기로 혼자 마음먹는다. 창밖을 내다보며 멜로디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인다. 느리게, 빠르게, 다시 느리게. 창문을 두드리며 투명한 막에 머리를 기댄다. 휙휙 사라지는 바깥 풍경은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커피를 마시고 잠든 후의 꿈처럼.


같은 노래가 두 번 흐르고, 두 번째의 마지막 음표가 정확한 지점에서 자기의 할 일을 끝내자 잠시 정적이 찾아온다. 잠깐의 기다림 후 흘러나오는 안내방송. 이번 정류장은 ……입니다. 이번 정류장은…… 여기저기서 빨간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정류장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사실 길을 잃는 데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버스가 조금의 금속음과 바람 빠지는 소리, 고무 쓸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계단 아래로 뛰어내린다. 모르는 장소에서 헤멜 시간은 있어도, 반듯하고 더러운 계단 하나하나를 밟아 내려갈 시간은 없기 때문에. 곧 버스가 출발한다. 그는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고, 보드를 든 채 골목 안으로 접어들었다. 방향을 틀자마자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꽃집. 흰색 바탕에 그리 세련되지 않은 두껍고 빨간 정자체로 적힌 ‘꽃’ 한 글자. 그런 촌스러움을 극대화하는 간판의 커다란 크기.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이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오고,  유리문 양쪽으로 이름 모를 꽃과 식물들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다. 몇 개는 집에서 키웠던 것 같기도 하고.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구경하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앞치마를 두른 오십 대 후반의 여성이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손님.”

“안녕하세요!”

“어떤 식물 찾으세요?”

“찾는 건 없는데, 구경하고 싶어요.”


그는 진열대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꽃들과 아직 포장되지 않은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살핀다. 저마다 이름 텍이 붙어있다. 안개꽃, 수국, 목화와 장미, 로즈마리, 애플민트. 포장을 하기 위한 포장지와 비닐, 리본과 가위 같은 것들도 나와 있었다. 찬찬히 하나하나 살펴보고 싶지만, 들뜬 기분과 빠르게 뛰는 심장 탓에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기가 힘들다. 빠르게 움직이는 동공과 그 동공의 시선이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 위로 미끄러진다. 모든 것을 보고 있지만 사실 하나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손톱을 물어뜯으며 포장된 꽃들과 식물들 사이를 오가던 그는 문득 눈에 들어온 식물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예요?”

“유칼립투스예요. 마음에 드세요?”

“꽃말도 있어요?”

“유칼립투스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이건 시네리아예요. 꽃말은 ‘항상 즐거움’이래요.”


항상 즐거움. 마음에 쏙 든다. 그는 유칼립투스 한 다발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온다. 잠시 코를 대고 냄새를 들이마신다. 기분이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는 골목 사이사이를 내키는 대로 걸어 다니며 원하는 곳은 어디든 들어갔다. 외진 곳에 자리한 음반가게에 들어가 LP를 듣고, 눈에 띄는 편집 샵에 들어가 구경을 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유칼립투스 가지를 나누어준다. 길을 잃어버려 우는 꼬마 아이, 근처에서 산책을 하던 어르신, 공강 시간에 잠시 편의점에 들른 대학생, 그를 흥미롭게 쳐다보던 작은 구멍가게 주인과 주변 가게의 사장님들까지. 어느새 유칼립투스 다발은 가지 하나를 남기고 전부 동이 났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예감. 복잡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머릿속이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리된다. 이제 전부 괜찮다. 그는 가방과 유칼립투스 가지와 보드를 잠시 내려놓고 가방 안에서 작은 통 하나를 꺼냈다. 하수구의 철창 같은 구멍, 그 앞에 앉아 통 안에 든 것들을 쏟아 넣는다. 동그랗고 하얀 알약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잘 가, 친구들. 고마웠어. 작별인사를 건네고 빙그레 웃는다. 다시 한번 찾아온 불안하면서도 홀가분한 느낌. 짐을 들고 임대상가 건물의 가장 위층까지 올라간다.


옥상 문을 연다. 유독 크게 들리는 바람소리와 환풍기 무동력 벤츄레이터의 요란한 소리. 버스에서 내리며 꺼둔 휴대폰 전원을 켠다. 이어폰을 빼고 음량을 최대로 올린다. SHAED X ZAYN의 Trampoline. 교복 마이는 바닥에 내팽개친 지 오래. 팔을 움직이며 조용히 박자만 타다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부드럽기도 하고 절제되기도 한 근육의 움직임. 멜로디와 리듬에 따라 빠르게 끊기고, 무중력 상태에서 부유하듯 느려진다. 몸을 움직이며 점점 상기되는 얼굴과 빨라지는 호흡. 지나치게 생기가 도는, 마지막 생명력을 태우듯 삶으로 가득한 표정.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오른다. 탄성에 의해 움직임을 멈추지 못한다. 공기저항을 받은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기분. 덜컥, 겁이 난다.


언제부터였을까?

기분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경기를 일으키듯 계속해서 몸을 떨며 알림을 띄우는 화면. 부재중 전화 열일곱 통, 문자 네 통. 그의 움직임이 멎는다. 옥상 아래로 떨어지는 시네리아. 중력에 의해 곤두박질치는 몸. 옥상 벽면에 기대어 앉는다. 머리를 감싸 쥔다.


사라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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