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나는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날 봄꽃을 보며 산책을 할 때,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때, 모든 것이 선명해서 내가 흐려질 때. 빛이 들어가 초점을 잃은 사진처럼 풍경이 번지고, 나 역시 풍경과 하나 되어 번져갈 때. 습기 찬 어둠 속에서 녹슬고 곰팡이 핀 감정들을 널어 말린다. 봄날의 날씨는 포근하다. 애써 검열하지 않은 언어의 날을 부드럽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이불처럼 폭신하게 감싸 안아 너에게 닿는 충격을 줄여줄 것 같다. 따뜻함 속으로 스며드는 언어들. 모든 것이 멀어지는 듯 꿈결 같다. 아득한 현재, 꼭 과거 속 기억에 들어온 것처럼 지금을 본다. 윤하의 노래 ‘parade’를 들으며 지하철 창 밖을 내다본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참 걷고 싶은 날이야/ 다 손을 흔들며. 내 일상에 이름을 붙인다면 ‘행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이대로만 지속된다면 나도 평범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 건강하고 안정적인, 그런 사람.
-
누군가를 만나 서로에게 책을 선물했다. 벤치에 앉아 첫 장을 펼치고 볼펜으로 남기고 싶은 말을 적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오늘의 날씨와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길 바라며.
사랑과 애정을 담아 드립니다.
<밝은 밤>
농담과 농담이 만나 웃음이 되던 날, 이비 드림.
농담처럼 살고 싶다. 그 순간 즐거웠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 모든 기억이 기억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웃음이 남았으면 좋겠다. 희미하게 남은 섬유유연제 향기처럼, 기억 대신 존재 대신 네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형태로 남았으면 좋겠다.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건 내가 할게. 네 몫의 그리움마저 가져갈게. 그렇게 너에게 잊힌다면 나는 참 기쁠 거야. 정말 정말 기쁠 거야.
-
이틀 동안 여덟 잔의 커피를 마셨다.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커피 네 잔으로 토요일을 보내고, 커피 한 잔에 기억 하나를 담아 일요일을 보냈다. 헤이즐넛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한 잔, 아인슈패너 한 잔. 헤이즐넛에 일요일 아침, 아메리카노에 이름 하나,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에 모임 하나, 아인슈패너에 다른 이름 하나가 담겼다.
저녁을 먹으러 간 마라탕 가게에 참새 두 마리가 들어왔다. 들어왔지만 나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한다. 한 마리는 나가고 한 마리는 나가지 못했다. 한 마리는 다른 한 마리의 참새를 찾으러 몇 번이고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사랑이란 한 순간 존재를 낯선 곳에 데려다 놓는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녹색 광선 LE RAYON VERT>을 본다. 백수린의 단편 <시간의 궤적>을 읽다가 ‘우리 둘 다 에리크 로메르의 <녹색 광선>과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들을 좋아한다’는 대목에서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Je ne sais pas, je n'ai rien. Les choses ne sont pas évidentes pour moi. 선선한 바람이 분다. 영화 포스터를 침대 머리맡 벽에 붙였다.
파란색이 참 예쁘다
-
다시금 불안이 찾아온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행복 뒤에는 추락이 찾아온다는 걸 안다. 어떤 상태든 영원한 건 없으니까. 원래 세상이란 그런 거니까. 관계는 언제든 길이가 맞지 않는 책상다리처럼 삐걱대고,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구체적인 상상이 되어 쏟아지고, 우울은 언제나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오곤 하니까. 재작년 이맘때 즈음의 나는 오물과 함께 남겨져 침대와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액체로 존재하며 가끔 사람을 만날 때에만 간신히 모양을 갖추었다. 누군가에게 흘러넘치는 건 두려운 일이니. 잠이 오지 않아서 일기를 쓴다. 현실을 볼 수밖에 없어 일상을 산다. 약을 먹는다. 호르몬을 조절한다. 뇌는 통제 안에 있다. 삶은 통제 안에 있다. 꿈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 걸까. 현실을 보게 만들 거라면 현실을 살아갈 능력도 함께 주어야 했던 게 아닌가요. 숨을 쉬고 일상을 들이마시는 일이 왜 어렵게만 느껴지나요. 이불이나 베개커버에 남은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있다. 그 흔적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몸의 부피를 줄여 갈수록 더 작아지고 싶다. 계속해서 작아지고, 작아지고, 더 작아진다면 무엇이 될까.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주 많이 밝았으면 좋겠다. 둘 다도 좋고.
-
빨간 베레모를 샀다. 너무 눈에 띌까 싶지만 언젠가는 써보고 싶다. 이 행복을 잠시 즐겨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쓸 수 없지만 서랍장에 고이 넣어놓고 먼 훗날 꺼내어볼 빨간 베레모처럼, 언젠가는 정말로 행복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어도 되지 않을까. 언제나 다가올 미래를 생각한다면 제대로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으니까. 안정적인 기분, 평온한 마음. 내게 주는 선물이라 해도 괜찮을까. 찬란한 하루는 아니더라도 명랑한 하루를 보내자. 그날 하루가 슬픔으로 가득하더라도 웃으며 털어버리자.
바람에 실려가는 휘파람 소리와 웃음처럼.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의 농담처럼.
*윤하, ‘par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