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기억들이 잃다. 아무리 쓰고 써도 닳지 않고, 덜어내고 덜어내도 덜어지지 않는 기억. 지구를 맴도는 달처럼 내 주변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는 기억. 그건 대체로 우울하지만, 때로는 지금의 나를 숨 쉬게 하는 부적으로 남을 때도 있다. 이건 기억들의 일기. 어느 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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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만났다. 일본 라멘을 먹었다. 라멘집에서 손님이 무언가를 질문했는데 음악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말해준 바로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라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손님은 단 걸 좋아하는 게 명확한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물어봤다고. 누군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은 쉽지만,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일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물어봤다는 그 말이 고마웠다. 함께 궁 안을 걸었다. 앉아있기도 하고, 가방을 베고 누워있기도 하고,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그렇게 산책을 하는데 무당벌레를 발견한 손님이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고 했다. 손님이 말했다. 무당벌레는 자기가 끝이라고 인지한 곳에서만 날 수 있다고. 그래서 줄기의 중간에서는 날 수 없다고. 나는 말했다. 끝을 아는 친구네요. 손님이 잠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재밌네요.
카페에 가서 나는 코코넛 크림 아인슈패너를 손님은 아포가토를 주문했다. 손님이 물었다. "모호한 게 좋아요, 구체적인 게 좋아요?" 나는 대답했다. "모호한 거요." "네." "그리고 구체적인 거요." "네."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일 법도 한데, 계속 "네"라고만 답하는 게 재밌었다. 내가 덧붙였다. "모호한 걸 구체적으로 말하는 게 좋아요." 손님은 짧게 아-, 하고 언어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손님이 다시 물었다. "요즘 뭐가 제일 좋아요?" 나는 대답한다. "기분이요." 잠시 텀을 두고 다시 말한다. "기분이 제일 좋아요." 그새 아포가토를 다 먹은 손님이 "단 게 너무 좋아요."라고 했다. "좋아하는 게 있는 건 좋은 거죠." "그렇네요."
천천히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맥락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손님이 나에게 자주 도망치냐고 물었다. 나는 항상 도망친다고 대답했다. 그 대상은 나라고. 나로부터 도망쳐 나로 되돌아온다고. 헤어질 때 손님은 "귀띔해주지 않아도 좋지만 서울에 올라올 때 귀띔해준다면 기쁠 거예요."라고 했다. 손에는 손님이 쥐어준 편지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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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에 일어나서 이사 준비를 하고 6시부터 이사가 시작되었다. 10시쯤 집에서 출발해 엄마와 <겨울 이야기>를 보았다. 점심으로 덮밥을 먹고 종로 5가에 있는 카페 오제도에서 시간을 보냈다. 과테말라 디카페인 두 잔. 엄마와의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오랜만이라 기분이 선선하다. 5시 10분쯤 다쁨언니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언니가 말했다. "이사를 가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텐데 혼자 오래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전 심심한 거 좋아해요." "심심함이 외로움이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심심함이 외로움이 될 때가 있죠." "그럴 때 어떻게 해요?"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외로움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일지도 몰라요. 그 사실을 인정하면 외롭지 않은 것 같아요. 반쪽을 찾으려고 한다면 언제나 빈자리가 있는 반쪽일 뿐이지만, 처음부터 그런 모양을 가진 존재라는 걸 인정하면 반쪽을 찾지 않아도 되니까요." 언니는 웃으며 말했다. "이 말,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언어예요." 그때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언어'라는 말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청계점 아마추어 작업실 카페에 갔다. 언니는 오미자, 나는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그리고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볼펜을 빌려 각자 짧은 쪽지를 쓴 성냥을 교환했다.
To. 다쁨언니
시간이 멈춘 테라스에서
From. 비
To. 비
이렇게 볕 좋은 날 좋은 기분으로 마주 앉을 수 있어서 너무 반갑고 좋아요. 바쁜 나날에 내 러브콜에 응해주어 영광이고 오늘 비의 단어들 잘 마음에 수집해 갈게요.
From. 다쁨
시간이 멈추는 문을 지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바람이 불었고, 개미와 거미가 한옥 울타리를 넘나들었다. 언니는 휴대폰 카메라로 나를 찍어주었다. 언니의 시선으로 본 내가 참 예뻐서 오늘만큼은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다음에는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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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반쯤 출발해서 7시 10분쯤 에무 시네마에 도착했다. 지하철역을 한 정거장 지나치는 바람에 종각에서 101번 버스를 타고 갔다. 다쁨언니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그런 날씨였다. 언니와 자연과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7시 50분쯤 표를 샀다. 시원한 색감의 <해변의 폴린느> 포스터를 받았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비가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 가고 싶다. 영화를 보기 전 언니가 수줍게 건넨 사랑스러운 엽서들을 가방 안에 소중히 넣었다. 영화는 재밌었고, 언니는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했다.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기적의 수학자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네가 남긴 글을 읽고 오늘 뜬 초승달 보는데 완전 체셔 고양이 웃는 모양이었어. 밤길 걷는데 체셔가 뒤에서 웃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묘하더라고. <어딜 가든 별로 상관없다>는 말이 좋다. 멀리 떠나는 너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이 정도가 생각나네. 무슨 관련인지는 나도 몰라 ㅋㅋㅋ 아무튼 조심히 내려가요 :)"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라면 그걸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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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에 짱님을 만나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우바 밀크티를 마셨다. 조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 방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주는. 인간에게도 그런 버튼이 있을까. 같은 빛인데도 다르게 굴절하는 프리즘처럼 사람도 같은 것을 자신의 색깔로 굴절시킨다. 3시 10분쯤 카페에서 일어나 역으로 걸어갔다. 짱님은 5시 반에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짱님이 말했다. "시간이 조금 뜨네요." "그러게요." "시간은 좋겠다. 뜨기도 하고." 나는 웃으며 손으로 무언가를 뜨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시간을 떠서-," "오" "빵 위에 올려 드세요." "그러다 보면 친구가 오겠군요." 짱님이 질문을 던졌다. "시간은 무슨 맛일까요." 나는 대답했다. "흐르는 맛이요." 짱님이 말했다. "허기와 비슷한 맛일 것 같아요. 왜 진짜 배고플 때 있잖아요." 내가 덧붙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에 찬물이 흘러들어 가는 느낌." "찬물이 퍼져가는 느낌인가요?" "빈속에 찬물을 마시면 소화기관의 모양이 그대로 느껴지잖아요." "그렇죠." 짱님이 말했다. "그럼 뻥튀기에 시간을 올려 먹어야겠어요. 뻥스크림처럼." "뻥시간인가요?" 짱님이 웃었다. "뻥시간." 내가 말했다. "뻥타임." 짱님이 따라 했다. "뻥타임." 그리고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뻥이 그 뻥이 아니라 뻥! 하고 터지는 거잖아요." "터지는 시간이네요." "그렇죠." "시간이 터지면서 또 다른 우주가 생길 수도 있겠어요." "다른 우주가 생길 수 있죠. 코스모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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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내 우울을 가져갔다. 우울이 내 글을 훔쳐갔다. 빛나는 것에는 언제나 벌레가 꼬이고, 다리 위의 톱풀과 무늬 둥굴레는 가만히 밤을 듣는다.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 언어를 잃은 나는 더 이상의 꿈을 꿀 수가 없다. 언어로 꿈꾸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어서 태생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가진 사람만이 잠을 잔다. 비 내리는 오후를 바라며 살아내는 하루는 언젠가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멀어지고, 너의 잠은 나의 불면. 나는 멋진 사람이 아니라서 홀로 깨어있는 밤이 서럽다. 그럼에도 삶을 놓지 못하는 건 네가 잠들길 바라서. 꿈꾸길 바라서. 나는 너를 기다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음성과 음운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소리의 메아리. 나는 날개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는 나비, 나는 갈 곳이 없어 쓰레기장을 뒤지는 고양이, 나는 여름에 피어나는 하얀 라일락 향기, 나는 아르케.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너는 아직도 이곳에 없다.
그래도 나는 쓴다. 연필은 달 대신 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