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연합국 최고사령부 참모 2부장인 찰스 윌로비 장군이 일요일임에도 출근해 사무실 자기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 때, 첩보 과장이자 윌로비 참모인 윌리엄 테이트 중령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일세."
장군이 아침 인사를 하면 미소 짓던 테이트 중령이지만, 오늘 아침엔 표정이 굳어있다. 좋은 아침이 아닌 것이다.
"장군님, 지난밤 한국에서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들고 온 서류를 윌로비 책상에 올려놓았다. 미 8군의 워커 중장이 보낸 보고서였다.
윌로비 장군이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그 서류를 읽었다. 그는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중령을 돌아보았다.
"이놈들이 또 나타났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령관님도 알고 계신가?"
"지금쯤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쪽에서 이 서류를 보내왔으니까요."
윌로비 장군이 책상을 돌아 의자에 앉자마자 붉은색 전화기가 요동쳤다. 사령부 내부 직통전화였다.
수화기를 든 윌로비가 아침인사를 하다 말고 잠시 저쪽 이야기를 듣더니 말했다.
"저도 지금 막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저쪽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조금 후 “알겠습니다.” 하면서 전화를 내려놓았다.
윌로비가 양손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신음을 내뱉더니, 윌리엄 테이트 중령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난 10월 하순에 있었던 중공군 출현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무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왜냐하면 그들은 잠깐 눈앞에 나타났다가 그냥 사라지지 않았나. 누군들 그런 친구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겠냐고. 더구나 우리는 닷새 전 미 육군 7사단 친구들이 압록강변에 오줌을 갈겨댄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성대한 파티까지 열었네. 라인강에 도착해 벌인 처칠과 패튼의 행위를 깜찍하게 흉내 낼 때까지, 그 7사단 친구들의 전진을 가로막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랬기에 지난 10월 중순에 올린 CIA 소속 유진 클라크 해군 대위 정보를 쓰레기통에 구겨 넣은 일을 후회하지 않았네. 그런데 이놈들이 또 나타나 이번엔 유재흥 장군의 한국군 2군단을 아예 초토화해버렸단 말인가?"
눈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 윌로비 장군 앞으로 테이트 중령이 다가왔다.
"그런데, 어젯밤엔 그들 공격작전이 이색적이었습니다. 한밤중에 각자 소부대로 나누어 후방으로 침투했거든요. 공격무기는 오로지 수류탄과 대검이었다고 합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근접전으로 공격해오는 바람에,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아군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말입니다.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작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한국군 2군단을 하룻밤 사이 붕괴시켜버린 겁니다. 결국 워커 장군이 이끄는 서부전선 오른쪽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이제 8군은 진격은 고사하고 부대를 재정비해야 합니다만, 불길한 건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윌로비 장군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 질렀다.
"도대체 마오(毛澤東)놈 속셈이 뭐란 말인가. 이 자가 정말 우리와 한판 붙어보자는 건가?"
하지만 테이트 중령은 침착했다.
"장군, 당장은 중공군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급선무입니다. 클라크 대위를 불러 더욱 세밀한 정보에 접근하라는 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물론 그럴 걸세. 그렇지만 CIA 놈들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 우리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정보를 캐야 하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중국 사정에 정통한 동양인을 오늘 내로 찾아내게. 무엇보다 마오 머릿속을 마오 자신보다 더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네. 그러려면 동양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동양인이 제격이거든. 시간이 없다는 건 우리에게 더 큰 불행이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 문제를 이른 시간 안에 풀어내야만 하네."
1
1966년 1월 1일
의식이 돌아오자 멀리서 산발적인 총성이 들렸다.
정부군과 파테트라 공산반군은 이 밀림 어딘가에서 늘 싸웠다.
최근 파테트라 반군 세력이 점차 불어난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마가렛 히긴스 기자는 라오스의 전장에 관심을 쏟을 새가 없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 사이공 지국장인 그녀는 베트남전을 취재하기에도 벅찬 나날이었다. 말라리아만 걸리지 않았어도 지금쯤 베트남의 동호이나 후에, 아니면 다낭쯤에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들의 트럭 위에 있을 것이다.
마가렛의 간이침대를 씌워놓은 모기장 안으로 밀림의 모기들이 쏟아져 들어와 극성을 부렸다. 어딘가 열려있는 것 같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어깨만 움찔할 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가렛이 최대한 목으로 짜낸 소리로 외쳤다.
"앙리! 앙리! 닥터 로쉐! 나 좀 봐요. 모기들이 나한테 네이팜을 쏘고 있어요."
그녀 목소리가 자신을 공격하는 모기소리보다 작았다. 힘없는 외침을 프랑스인 의사가 들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앙리는 언제나 바빴다.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가 이 임시 야전병원에 넘쳐났다. 베트남 국경을 넘어 라오스의 캄모무인 근처 밀림지대에 임시로 차려진 야전병원이지만 북베트남군에게 전상을 입은 환자들은 늘 붐볐다. 촌각을 다투는 구급치료가 끝난 환자들을 사이공으로 실어 보내도 그만큼 환자들이 다시 들어왔다. 그러나 의사는 앙리 혼자였다.
사실 이 야전병원도 그의 개인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 캄모무인에서 개업을 했던 그가 베트남 국경 근처 밀림에 전복된 미군 부상병 이송차량의 환자를 우연히 돌보게 되면서 이 병원이 시작되었다. 극심하게 비가 쏟아지는 우기였던 1964년의 9월이라고 했다. 15개월 전이었다. 앙리는 그 뒤로 자연스럽게 생성된 이 야전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직후에 다급한 소식을 듣고 사이공으로부터 달려온 프랑스인 수녀 둘이 간호사로 닥터 로쉐를 도왔다. 앙리는 한시름 놓았지만, 그래도 분주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간혹 마가렛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요청했다. 마흔여섯해의 반편생동안 2차 대전 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이곳 베트남까지 전쟁터를 누볐던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대화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마가렛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1965년이 지나고 1966년의 새해 첫날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병이 단순히 말라리아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처음 들었다.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밀림의 풍토병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그녀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매기, 그럴 리가요. 당신은 말라리아에 걸렸을 뿐이에요. 곧 일어나 다시 전쟁터로 달려갈 거예요. 그때 나한테 맡긴 카메라와 타자기를 잊어버린 채 그냥 달려가지나 마세요."
다가온 앙리가 열린 모기장을 수습해주며 웃었다.
"매기, 그런 나약한 소리는 그만두고 당신다운 이야기나 들려줘요.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장진호 전선으로 함께 떠났다던 그 한국인 청년 이야기 말이에요. 미 10군단 사령부가 있는 함흥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까지 지난번에 들었어요. 기억하죠?"
마가렛이 미소했다. 그것은 마가렛이 이야기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라는 것을 앙리도 알고 있었다.
1950년 그 추웠던 11월 28일의 일이었다. 한반도 북쪽 산악지대의 추위를 처음 실감하던 그때를 마가렛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가 'War in Korea라는 제목의 르포집을 발간해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의 참상을 알렸고, 그 책으로 서른두 살 나이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녀는 수상식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인류 역사에 전쟁은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혹독한 시련을 우리 인류가 마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전쟁이란 대다수 인류에게 이득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본 한국전쟁은 모두에게 이득이 없었습니다. 그 전쟁엔 피해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나 역시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슬픔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전장을 뛰어다니는 강철 이미지로 새겨진 그녀의 눈에 그 순간 눈물이 고인 것을 본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김인규의 얼굴이 그녀 앞에 다가온 순간, 기쁨의 수상식 자리였어도 그녀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2
1950년 11월 27일
연일 으스스한 날씨가 일본 동경을 휩쓸었다.
김인규는 오전 8시, 여느 날처럼 출근 길목인 왕궁 옆 히비야 공원을 가로질러 갔다. 물 마른 분수대 뒤쪽 은행나무 꼭대기에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달새가 참 예쁘지 않니?’
‘엄마 눈이 더 예뻐.’
김인규는 맑은 아침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릴 적, 종달새 날아다니던 그 하늘과 같은 파란색. 어머니 눈동자 같은 하늘이었다.
수령이 100년이 넘는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서서 지나가는 김인규를 배웅했다.
“어머니가 세상에 오기 전부터, 저 나무들은 여기 있었던 거야.”
김인규는 혼자 중얼거렸다.
김인규는 나무들에 마음속으로 아침 인사를 한 뒤 히비야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본부건물인 다이이치 생명관을 지나 민간 정보 교육국이 있는 도쿄방송회관 건물로 들어섰다.
3층의 민간 정보 교육국 여론사회조사과 사무실로 들어서자 먼저 출근한 일본인 문관들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김인규가 자리에 앉아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서류 더미를 꺼냈다. 일요일인 어제 하루 종일 집에서 들여다보던 서류들이었다. 동경대학 후배인 옆자리 요시다 군이 슬며시 다가와 말했다.
"선배, 베네트 과장이 찾던데, 무슨 일인가요?"
"글쎄?"
"아무튼, 선배 출근하는 대로 과장실로 오라던데요?"
여론사회조사과장인 존 W. 베네트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즉 맥아더 사령부(GHQ, SCAP)에서 일하는 많은 미국인이 그렇듯 군인이 아닌 문관이었다.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일본 맥아더 사령부로 부임하기 전까지 오하이오 주립대학 사회학부 조교수로 있던 사람이었다.
'우에하라 교수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네. 자네와 함께 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네.'
그를 처음 만나던 날은 부드럽기 그지없는 인물로 보였다. 그렇지만 처음 호감과는 달리 일하는 습성이 지나치게 치밀해서 부하직원들에게 원성을 사는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 토요일 김인규에게 한 아름 서류 뭉치를 안기면서, 월요일 퇴근 전까지 조사 분석을 마쳐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휑하니 돌아섰다. 일본 지방신문들에 나타난 여론 동향에 관한 문서들이었다. 그러니 오늘 퇴근 전까지 여론 분석을 마쳐 보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나를 보자고 하는 이유는 뭘까.'
김인규가 과장실 문 앞에 가서 노크하니 기다렸다는 듯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거구의 베네트가 말없이 인규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저를 찾았다면서요?"
김인규는 영어를 쓰지 않고 일본어로 말했다. 베네트가 일본어를 곧잘 구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네트는 평소와 달리 영어로 말했다. 뭔가 중요하거나 긴급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본부에서 자네를 찾고 있네. 찰스 윌로비 장군과 아는 사인가?"
어쩔 수 없이 인규도 영어로 말했다.
"윌로비 장군이라면, G2(참모2부)의 보스 말입니까?"
"그래. 그 독일인 말일세."
"제가 어떻게 그런 높은 사람과 친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독일인이 새벽부터 내 집에 전화를 걸어왔네. 출근하자마자 당신 과에 있는 한국인 김인규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말일세. 그 사람이 직접 내 집으로 전화한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자네를 정확하게 지칭한 건 더 신기했다네."
김인규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찰스 윌로비 소장은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맥아더의 정보참모로, 사령관의 오랜 측근이었다. 아돌프 칼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인 어머니를 따라 젊어서 미국으로 귀화해 군인이 되었다. 그는 매사에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미국 군대에서 그는 빠르게 성장했고, 급기야 아시아 태평양 사령관인 맥아더의 최측근이 되었다. 하지만 비사교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바탄 보이스(Battan boys, 맥아더의 전용기인 바탄호를 함께 타는 주요 참모들을 언론에서 일컫던 말.)사이에서도 배척받아왔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규는 그가 자신을 부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베네트 과장이 자기 사무실 문 앞에 버티고 선 채로 말했다.
"어서 다이이치 생명관(맥아더 사령부 본부건물)으로 가보게."
"G2 사무실로 찾아가면 되는 겁니까?"
"아니지. 로비 안내데스크에서 찰스 윌로비 장군의 호출로 왔다고 하면 곧장 연락이 갈 걸세."
"지방 여론 동향에 대한 분석은 어떡합니까?"
베네트 과장이 성큼 문밖으로 나와 김인규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난 지금 자네를 그 무시무시한 사람에게 보내놓고 줄곧 기도해야 한단 말일세. 자네가 그 게르만족 장군 손에서 무사히 풀려나오도록 말이지. 그 빌어먹을 여론 동향 분석에 대해서는 그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나는 민간 정보 교육국에 있는 한국인 문관 김인규라고 합니다. 참모부 제2부장인 찰스 윌로비 장군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녀가 전화를 들더니 그대로 전했다. 잠시 후 전화를 내려놓고 그녀가 말했다.
"G2 첩보 과장인 테이트 중령께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잠시 후 연락을 주겠다는군요. 저쪽 소파에 앉아 기다리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인규가 돌아서려는데, 현관에서 사람들을 헤치며 안내데스크를 향해 곧장 뛰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헐렁한 전투복에 군모까지 썼지만 계급장은 없었다. 모자 차양 위엔 전차병처럼 고글이 얹혀 있었다. 커다란 군용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그녀는 한달음에 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안내데스크까지 뛰어왔다. 그녀가 데스크에서 돌아서는 김인규를 잠깐 쳐다보더니 중위에게 다가섰다.
"이봐요 앤. 사령관님을 만나야 해요. 그분이 출근하셨나요?"
당돌한 여자 물음에 중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은 했어요, 매기?"
"약속 같은 건 없어요. 사령관님은 내가 찾아온 걸 알면 만나주실 거예요."
중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매기가 찾아왔습니다. 사령관님을 만나야 한다는군요."
중위가 전화기 저쪽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다시 말했다.
"어쨌든, 매기는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사령관님께 전해주시..."
중위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여자는 벌써 뛰어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 쪽이었다. 출근 시간이라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다.
동경 맥아더 사령부 본부건물인 다이이치 생명관
3
김인규를 똑바로 바라보는 찰스 윌로비 장군 눈이 차갑게 빛났다. 태어나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책상에 서류가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에겐 중공군에 대한 여러 정보가 있네. 문제는, 이 정보들이 수용할 수 있는 정보들인지 우리가 확신해야만 하는 일일세. 그러기 위해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김인규가 물었다.
"정확히 제가 무슨 일을 해야 도움이 되는 겁니까."
"지금 자네 조국에서 생각지 못한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네. 마오(毛澤東)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전쟁에 개입했기 때문이지. 우리는 정확한 그들 규모를 알고 싶은 걸세."
김인규가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저는 이쪽 G2와는 전혀 별개 부서인 민간 정보 교육국에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하급 문관입니다. 그런 일을 어째서 제가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장군이 흩어진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들고 일어나 응접용 소파로 오며 인규에게도 맞은편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가 시가에 불붙이고 한 대를 내밀었지만, 인규는 사양했다.
"우리 정보국에서 자네 파일을 발견했네. 그중, 자네 비교정치 논문인 '태평양 전쟁 후의 동북아정세에 대한 고찰'을 보고 감탄했지. 1947년 가을에 나왔더군. 학위논문인가?"
"아닙니다. 교수님 권유로 그저 미국 학술지에 발표했던 논문입니다."
그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김인규 논문의 주요 부분을 카피한 문서였다. 장군이 말했다.
"자넨 이 논문에서 1947년도 이후의 동북아정세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견했더군. '중국의 내전에서 마오가 승리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미, 소의 군정이 끝난 한국에서도 내전이 발발할 것이고, 그 전쟁에 미국의 개입에 이어 소련이 아닌 중국의 개입이 필연적일 것이다.'라고 말이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중국의 움직임까지 자넨 이미 3년 전부터 내다본 거야."
김인규가 양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고 무릎에 얹었다. 그의 얼굴 역시 표정이 없었다. 장군이 다시 말했다.
"우선 자네가 그렇게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던 비결이 궁금하네."
김인규가 동요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연구 결과 대로 논문을 쓴 것뿐입니다. 그게 정확한 예언이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 생각보다 실제 일들이 몇 년 앞당겨졌습니다."
"그러지 말게, 미스터 킴. 우리는 지금 솔직해야 하네. 자넨 상해에서 대학을 다녔다지?"
"맞습니다. 상해 푸단(復旦)대학에서 비교정치학을 공부하고 나서,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에 우에하라 교수님을 따라 동경대학으로 왔습니다."
"우에하라 교수라면,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인 스티븐 우에하라, 그 사람 말인가?"
"그렇습니다."
"훌륭한 선생 밑에서 배웠군. 그 사람이 중국의 푸단대학으로 갔던 건 유명한 일이었지."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이 동시에 막을 내리자, 일본인을 향한 중국인들의 민족감정은 격해졌다. 스티븐 우에하라 교수 역시 더 이상 푸단대학에 머물 수 없었다. 미국인이긴 해도 그는 엄연한 일본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령부에 자넬 추천한 사람도 우에하라 교수였나?"
"그렇습니다."
"그런 자넬 눈먼 사람들이 엉뚱한 부서에 처박아버렸군. 그런데 영어는 어떻게 그렇게 잘하지?"
"제 어머니가 미국인 선교사였습니다. 제가 아기 때 입양해서 키워주셨지요. 어머니와는 어릴 때부터 줄곧 영어로 대화했습니다."
"그렇군. 한국에서 자랐나?"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평양에 계시나?"
"제가 상해로 가서 대학을 다니던 중에 어머니는 악성 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유감이네."
그렇게 말했지만, 장군 얼굴에 유감스럽다는 표정은 없었다. 그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며 다시 물었다.
"양아버지는? 그러니까, 어머니의 부군 말일세."
"어머니는 독신이셨습니다."
"그렇군."
찰스 윌로비 장군
그가 서류를 뒤적이며 들여다보더니 한참 후에 눈을 뗐다. 그러고는 어깨를 곧추 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린 서로 솔직해야 하네. 자네가 이 논문을 탈고할 즈음엔, 자네를 뺀 누구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이 마오에게 패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 왜냐하면, 당시 양쪽의 전력 차이도 컸을 뿐만 아니라, 장제스는 우리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까지 받고 있었네. 하지만 자넨 중국 내전의 결말뿐만 아니라, 작금의 한국전쟁 양상까지 정확히 예견했네. 나는 지금 자네의 그 분석방식을 듣고 싶네."
김인규가 깍지 낀 손을 풀고 단정히 앉았다. 그러고는 표정 없는 장군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장제스가 패할 수밖에 없던 요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그의 가장 큰 실책은, 장정(長征) 시절의 공산당을 완전 소탕하지 못한 것입니다. 장제스는 그 1935년에 이미 공산당에게 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 옛날 항우가 홍문(鴻門)의 파티에서 유방을 죽이지 않은 것이 천하 패권의 저울추를 잃은 결과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합니다만, 그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공산당은 종교와도 같은 확고한 이념으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마오라는 뛰어난 리더의 지휘를 받는 집단입니다. 당시 장제스를 비롯한 옌시산(閻錫山), 펑위샹(馮玉祥), 우페이푸(吳佩孚), 리쭝런(李宗仁), 그리고 한때 동북의 제왕이라 불렸던 장쭤린(張作霖)과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 등의 군벌들과는 완전히 다른 집단이었죠. 그렇기에 거의 1만km를 돌고 돌아 북쪽의 연안에 도착한 이후, 채 일만도 안 되던 공산당 세력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장정의 기나긴 행로에서 그들과 접촉한 농촌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지지해준 덕분이었지요. 그것은 중국 홍군의 삼대기율 팔항주의(三大紀律 八項注意)에 잘 나타나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 인민대중을 도울지언정, 신세를 지거나 부당한 행동을 삼갔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적군 포로를 대우할 때도 자신들이 먹는 음식보다 더한 대접을 했을 정도였는데, 그런 행동은 나중에 장제스 군대의 대거 이탈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마오는 언론을 지혜롭게 이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미국 기자들을 통해 대장정을 포함한 자신들의 투쟁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하지요. 그 와중에, 중국에서 오랜 세월 활동했던 종군기자이며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로 잘 알려진 에드거 스노가 "중국의 붉은 별"을 1937년 미국에서 출판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그 책에 경도한 중국의 많은 지식인 젊은이들도 열광적인 공산당 지지자로 돌아섭니다. 그 덕에 마오는 중국의 "떠오르는 별"로 각인되었지요. 국민당 내부의 핵심 세력 중에서 공산당과 내통하는 자들도 이 무렵부터 나오게 됩니다. 반대로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이해관계로 얽힌 군벌들의 집합체에 불과했습니다. 장제스에겐 쑨 쭝산(孫文, 中山) 과는 달리 그들을 완벽하게 장악할 구심점도 없었지요. 그것은 국민당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요인이 됩니다. 어쨌든 2차 국공합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공산당 세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1946년 6월부터 다시 국공내전이 발발했을 즈음엔, 마오의 군대가 국민당군과 비교하면 전력이 삼분의 일 수준까지 육박합니다. 양측의 전투력과 정신적 무장 상태, 그리고 집단에 대한 지도자의 확고한 장악력과 인민대중의 지지도를 고려했을 때, 이 정도면 거의 대등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국민당군의 세력은 약화 되지만, 공산당 세력은 불어나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국민당군의 많은 일선 부대가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수많은 물자와 함께 대거 공산당 측으로 넘어가는 일은 내전 초기부터 있던 일이니까요. 전쟁을 이끄는 지휘관들의 능력과 정신자세 역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장정 이후 사실상 신의 반열에 오른 마오라는 확실한 구심점 아래, 명령계통이 분명하고 각 부대 간의 협조가 일사불란하며 철저하게 검소한 공산당의 홍군지휘관들과는 달리, 장제스의 군대 지휘관들은 서로 제대로 된 협조도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그것은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나 군벌들 간에 이기심과 시기심이 팽배했고, 그 중엔 공산당과 내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논문을 탈고하던 당시까지도 이런 일이 진행 중이었는데,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공산당의 승리는 정한 이치였고, 실제로 그렇게 끝이 난 겁니다."
"탁월한 통찰일세. 그렇다면 한국의 내전과 이 전쟁에 중공군의 개입은 어떤 분석에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제가 보기에 자연스러운 절차였습니다. 한반도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됐지만, 미국인들의 관심에서 제외된 지역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에 전쟁 막판에 만주로 진주해 들어와 일본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킨 것이 전부인 소련에, 미국인들은 조선의 반을 전리품으로 주지 않았습니까. 이후 미 소 양국은 조선의 신탁통치에 들어갔습니다만, 그건 오래가지 못할 것이 뻔했습니다. 당시 조선 민중의 반발이 예상보다 컸으니까요. 오라지 않아 양쪽의 신탁통치가 끝나면서 각각 공산정부와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은 분명했고, 북쪽의 김일성, 남쪽의 이승만이 권력을 잡을 것도 분명했습니다만, 오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조선 민중들은 통일된 조국을 원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양쪽이 협상을 통해 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지요. 그렇기에 남과 북이 각자의 정부로 나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초읽기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먼저 기회가 와 준 것이지요.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지 못한 남한의 이승만과는 달리, 그는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논문을 쓴 이후의 일이지만, 지난 1월에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른바 애치슨라인이라는 극동 방위선을 발표할 때, 한반도를 제외함으로 김일성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어쨌거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그동안 한반도에 관심을 두지 않은 미국이라도 가만있지 않을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미 소련과의 냉전에 돌입한 미국의 시각으로 보면, 어차피 김일성의 남침은 소련의 조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거기엔 소련의 세계지배전략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이렇게 되면, 미국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남한의 공산화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고, 결국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의 참전은 필연적이지요. 물론 이때, 소련과 중국의 입장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두 나라에도 한국전쟁 참전의 개연성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다고 저는 판단했지요. 제가 논문을 탈고할 무렵 소련은 아직 핵폭탄을 완성치 못했습니다만, 설령 갖고 있더라도 결과는 같을 것이라고 본 거죠. 그들은 미국과 달리 혹독했던 독일과의 전쟁 후유증이 깊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전쟁 개입이 또다시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일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죠. 한반도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정도로 스탈린에게 매력적인 곳도 아닙니다. 그러나 마오는 처지가 다르지요."
"마오의 처지는 어떻게 다르다는 것이지?"
장군이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어내며 김인규 쪽으로 허리를 굽혀 앉았다. 그의 눈빛이 김인규를 관통할 듯 빛났다.
"남쪽 편을 들어줄 미군 참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소련의 적극적인 개입이 어려워진다면 김일성 단독으로 한반도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지요. 그렇다면 맥아더의 군대가 한 중 국경까지 밀고 올라오는 상황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마오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의 결말을 이용한 장제스의 보복을 마오는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요.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게 되더라도 어차피 장제스는 하이난과 대만으로 철수할 것은 뻔한 사실로 저는 내다봤습니다. 그렇기에 장과 마오 두 사람의 뇌리에 중국 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맥아더 사령관과 장제스가 손잡을 가능성은 그래서 충분하지요. 실제로 장제스는 자신의 군대를 한국에 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니 맥아더 사령관이 한 중 국경에서 이 전쟁을 멈출 것이라고 마오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한반도 전쟁이 남측의 승리로 끝나면, 중국을 수복하기 위한 맥아더와 장제스의 양동작전이 마오의 눈엔 선명히 보이게 될 겁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홍군 깃발을 꽂아 놓은 대륙에 다시 포연이 일게 된다면, 그와 공산당 동료들이 수십 년 고행 끝에 쌓은 탑이 일거에 무너집니다. 그로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현재, 그 일이 진행 중이군?"
"그렇습니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상이었지요. 그리고 예상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제 예상은 틀릴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마오는 한국전쟁 발발 두 달 전에 놀랍게도 하이난섬을 점령했는데, 저는 해군력이 취약한 마오로서 그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어쨌든,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제 생각보다는 이른 시기에 벌어졌습니다."
"이런 특별한 논문을 쓴 사람답지 않게 자넨 참 겸손하군.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네. 자네 생각엔 혹시 마오가 우리 유엔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나?"
"양측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면 국력이나 전력, 어느 면을 보더라도 마오의 군대가 유엔군을 상대로 결코 승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마오의 생각도 같을까?"
"그 역시 승리를 자신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자는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인데도 자기 군사들을 이 전쟁에 몰아넣었단 말인가?"
"저는, 마오가 패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윌로비 장군의 강렬한 눈빛이 김인규의 눈빛과 맞부딪쳤다. 김인규가 말했다.
"마오의 군대는 공군력이나 기갑사단을 제대로 갖추질 못했습니다. 해군력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에겐 오로지 소총부대로 이루어진 군대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전쟁에서 제공권을 상실하면 후위 부대와 최전선의 연결고리가 취약해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뻔합니다. 이렇게 되면 병참은 물론이고 포병의 도움도 받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국공 내전 동안 서방군대에 버금가는 무장을 갖추고 싸운 장제스 군대를 대부분 전역(戰役)에서 격파했습니다. 그의 전술이 압도적으로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 전술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사실, 마오는 군사학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옛 병서들을 심도 있게 연구했죠. 그런 마오를 장정 도중 쭌이(遵義) 회의에서 러시아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이 비판했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당신은 손자병법만을 강조하는가.'
그때, 마오가 일갈했죠.
'당신은 손자병법의 한 구절이라도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가.'
이 회의에서 마오는 결국 당 주석에 오릅니다만, 이후 더욱 중국의 옛 병법에 매달려 전술을 개발했고, 서양식 전술로 싸운 장제스를 마침내 이겼습니다. 결국 고대 동양의 병법가인 손무(孫武)가 서양 근대전술의 창시자인 클라우제비츠를 이긴 겁니다. 마오는 이제 자신의 전술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을 겁니다. 미군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확신도 있겠지요. 그의 장기는 유격전과 지구전입니다. 더욱이 한반도는 그의 장기를 펼치기에 좋은 산악지형이 대부분이죠. 그는 자신의 독특한 전술을 통해 최소한 김일성의 영토만큼은 회복하리라, 생각할 겁니다."
"자넨 우리가 가진 무기를 간과한 것 같군. 우린 이미 5년 전에 원자폭탄을 가질 수 있었네. 알다시피 그것은 어떤 군사학이나 전술, 그리고 모든 무기체계를 뛰어넘는 가공할 병기라네. 만약 그들과 우리의 전쟁이 교착에 빠져든다면, 맥아더 사령관이 그 무기를 사용할 것은 똑똑하다는 마오도 모르지 않을 것 아닌가."
"궁극엔 맥아더 사령관이 원자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자네 말대로 만약 우리가 수세에 몰린다면, 사령관께서 만주 폭격을 배제할 거로 생각하나?"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만, 장군께서도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했군요."
윌로비가 김인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천 년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거의 모든 서유럽 땅을 정복해서 조국인 로마의 영토를 세배로 확장해 놓았지만, 로마의 명령권자들은 그를 제거하려 했지요. 점점 커가는 그의 힘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지켜본 카이사르는 결단을 내립니다.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입성해 오히려 그들을 제거해버린 거죠. 하지만 아시아를 정복한 오늘날의 카이사르는, 당장 군사를 이끌고 워싱턴으로 입성할 수는 없겠지요."
김인규가 잠시 섬광이 쏟아져 나오는 윌로비의 눈을 맞받아 응시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이제 핵무기는 미국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서방세계와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소련도 보유했습니다. 그렇기에 미국 국민의 안전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거운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는 워싱턴의 명령권자들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들의 허락이 없다면 맥아더 사령관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대 로마와는 달리 지금 미국에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이지요. 스탈린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미국과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저는 이미 말했습니다. 충분한 검토 끝에 마오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미국의 최고지도부 역시 스탈린의 판단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겁니다."
윌로비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결국, 워싱턴에서 원자탄만큼은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네 말이 전혀 틀린다고도 볼 수 없겠군. 뛰어난 분석일세. 역시 스티븐 우에하라의 제자라는 말이 실감 나네, 그려."
장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조금 후에 그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고는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자,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되돌리세. 지금 우리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주시하고 있네. 지난 10월 중순에 미 정보국 소속인 클라크 해군 대위가 한국인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서해상을 통해 신의주까지 침투해서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사진을 찍어서 보내왔네. 그는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대기하던 중공군이 30개 사단을 헤아린다고 보고했지. 하지만 우린 믿지 않았네. 하이난섬에 이어 대만까지 토벌해서 장제스를 완전히 제거하려 혈안이 돼 있는 마오가 그만한 대군을 한국전쟁에 투입하지는 않을 거라 판단한 걸세. 우리는 그저 한국전쟁 불씨가 자기에게 튈지 몰라 불안한 마오가 국경에 군대를 배치해서 중국 울타리를 조금 손본 걸로 이해했네. 그 후 10월 25일, 한국군의 백선엽 1사단장이 올린 중공군 포로에 대한 첫 보고를 들었네. 직후에 워커 장군의 부대들이 서부전선의 평양 위쪽에서 대규모 공격을 당했지. 특히 한국군 1사단과 미 8 기병연대의 피해가 컸네.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잠깐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즐거움을 누리긴 했지만, 그들 역시 그날 밤으로 여지없이 깨져버렸네."
중공군 출현에 대해서는 일본 신문들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윌로비 장군이 계속 말했다.
"그렇게 밀어붙이던 중공군들이 11월 중순에 썰물처럼 전장에서 빠져나가 모습을 감추더니, 지난 며칠 전부터 다시 대규모로 나타났네. 엊그제는 서부전선의 한국군 2군단이 궤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봤네. 이제 워커 장군은 진격을 멈추고 8군의 예하 부대를 재정비해야 할 정도야. 이번엔 동부전선 쪽에도 중공군이 출몰하는데, 그 자세한 병력을 우리는 알지 못하네. 동부전선 책임자인 알몬드 10군단장은 중공군의 규모를 3만에서 5만으로 보고하고 있지만, 글쎄,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 말일세. 그 정도 규모로 아군에게 그토록 덤벼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가 말을 중단하고 시가를 빨아 연기를 내뿜었다.
인규는 며칠 전에 대일이사회의 영국 대표인 맥마흔 볼이 일본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워커의 서부전선과, 알몬드의 동부전선 작전 간격 틈새가 너무 벌어져 있는 것에 대한 글이었다. 맥마흔 볼은 대규모 중공군이 그 틈을 파고들어 후방으로 들어오게 되면, 동부와 서부전선 양쪽의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고 적었다. 특히 알몬드 장군이 이끄는 10군단의 예하 부대들이 원산 부근에서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이 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부전선의 전 병력이 궤멸의 참사 앞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맥아더 사령관이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중공군 규모를 위험스러울 정도로 낮게 잡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령관의 정보참모인 찰스 윌로비 장군의 정보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윌로비 장군이 말했다.
"짐작하겠지만, 우리는 여러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긴 하네. 그렇더라도 나는 지금 자네가 필요하네. 수년 전부터 이런 상황을 탁월하게 예견했던 사람의 판단을 원한다는 말일세. 더구나 우리는 시간이 급하네. 이틀을 줄 테니 지금 당장 함흥의 10군단 사령부로 가서 알몬드 장군을 만나보게. 필요하다면 최전방 장진호 일대에서 진격 중인 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장군의 협조를 받아도 좋을 걸세. 알몬드 장군에게는 이미 협조 요청을 해두었네. 어쨌든 자네는 중공군 포로들을 심문해서, 중공군 규모에 대한 자세하고도 실제적이며 객관적인 보고서를 작성해주게. 하네다에 가면 자넬 태우고 갈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을 걸세."
C-54 Skymaster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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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참, 과달카날(태평양 전쟁의 첫 대규모 전투장이었던 남태평양의 섬) 때부터 수송기를 수도 없이 몰았지만, 오늘처럼 민간인 한 사람 태우려고 이륙을 세 시간씩이나 연장한 건 처음이오. 더구나 지금 엄청난 칭크(Chink, 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들이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장진호로도 밀어닥치고 있소. 지금 동부전선 병사들이 여기 실린 투씨 롤(초콜릿 사탕 이름이지만, 미군들이 박격포탄을 지칭하는 은어)을 애타게 기다린단 말이오."
C-54 Skymaster수송기 기장인 조셉 마이어 소령이 인규가 다가오자 툴툴거렸다. 그는 한시가 급한 수송기를 세 시간씩이나 묶어놓은 장본인이 무슨 대단한 장군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국(Gook,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속어)이었다는 데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김인규가 말했다.
"나는 연합사령부의 문관이오. 참모부의 특명으로 10군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과 해병 제1사단의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을 급히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습니다."
마이어 소령이 선글라스를 벗고는 계급이 없는 야전군복차림의 김인규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연합사령부의 특명으로 그 쟁쟁한 장군들을 만나러 간다는 이 동양인의 품위 있는 영어구사에 기가 죽는 눈치였다. 그의 태도가 금방 바뀌었다.
"화물실로 모시기엔 적당치 않을 것 같소. 거긴 적을 쓸어버릴 온갖 물품으로 가득하거든. 좁긴 하지만 조종실로 들어가시오. 어이, 해리! 접의자를 펴 드리게."
수송기가 화물 터미널을 나와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데, 멀리서 지프 한 대가 비행기의 정면으로 질주해오는 것이 보였다. 지프의 조수석에 탄 사람이 선 채로 손을 흔들며 뭐라 외쳐대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마이어 소령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건 또 뭐지? 도대체 왜 앞을 막는 거야."
부기장인 해리슨 커 준위가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보더니 말했다.
"여자 같은데요?"
마이어 소령이 조종간을 내려 비행기를 멈추는 것과 동시에 다가온 지프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비행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이에 온 걸 보니 커 준위 말대로 여자였다. 헐렁한 군복 차림에 큰 가방을 메고 뛰어오는 그녀의 목에 매달린 고글이 춤을 추었다. 마이어 소령이 조종실 창문을 열고 외쳤다.
"미안하지만, 이 비행기 탑승시간은 지났소."
그러자 비행기 밑에서 외쳐대는 여자목소리가 인규 귀에도 들렸다.
"아직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여자가 당찬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여기 맥아더 사령관님이 직접 사인한 서류가 있어요. 미군을 포함한 모든 연합군이라면 누구든 저를 도와줘야 한다는 서류에요."
마이어 소령이 인규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번엔 그 쪽보다 더 대단한 VIP인 것 같구려."
그러더니 아래쪽으로 다시 외쳤다.
"이 비행기는 함흥 비행장으로 가는 거요. 서울이나 수원으로 가려면 탑승 수속을 다시 밟아야 할 거요."
"어서 나를 태워줘요. 나도 함흥엘 가야해요."
미간을 찡그리는 마이어 소령을 바라보며 준위가 킥킥 웃고는 여자를 태우러 조종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준위를 따라 들어오면서 여자가 지껄였다.
"함흥 가는 수송기가 줄 서 있다고 하던데 도대체 왜 이리 한산한 거죠? 오다가 지프 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이 비행기마저 못 탈 뻔 했군요. 사령부 소속 운전병들은 왜 그렇게 굼뜬지, 세상에 그깟 타이어 하나 갈아 끼우는데 45분씩이나 걸리지 뭐에요. 전선에서 그랬다면 우리 둘 다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휴, 이젠 안심이네요. 어찌 됐든 비행기를 탔으니까. 기사를 송고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동경엘 와야 하니, 앞으로 또 언제 신세를 질지 모르겠군요. 저는 히긴스라고 합니다. 마가렛 히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동경지국장이에요."
그녀가 마이어 기장과 악수하고 나서 조종실 벽에 붙은 접의자를 꺼내려 낑낑거리는 해리슨 커 준위를 밀쳐내더니 단번에 우당탕 펴 버렸다. 그녀가 의자에 앉으면서 안전벨트를 매더니 인규쪽을 돌아봤다.
"어머, 탑승객이 또 있었네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이륙이 지체 된 것 같군요."
마이어 소령이 비행기를 움직이며 말했다.
"그 손님 아니었으면 벌써 3시간 전에 이륙했을 거요. 그러니까 히긴스 기자는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하오."
"아, 그래요? 고마운 일이군요. 저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동경지국장..."
그녀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 인규가 이어서 말했다.
"마가렛 히긴스 기자, 우리는 초면이 아닙니다. 사령부 건물 로비의 안내데스크 앞에서 오늘 아침에도 만났거든요."
"아,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네드를 만나러 가는 거에요. 동부전선 쪽에도 엄청난 중공군이 밀려온다고 해서요. 이 사실을 미국시민들에게 자세히 알리는 게 제 일이거든요."
"네드?"
그러자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비행기의 조종간을 틀어쥔 마이어 소령이 말했다.
"10군단의 보스를 말하는 거요. 에드워드 알몬드 군단장의 애칭이죠."
그녀가 빙긋 웃더니 인규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구 셔터를 난사했다.
월턴 해리스 워커 중장,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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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공군이 대규모로 출몰해서 네드가 많이 바쁠 거에요. 서부전선에서는 불독(미8군사령관인 워커중장을 지칭)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는군요."
수송기에서 내려 김인규를 기다리는 지프까지 걸어가면서 마가렛이 말했다.
"그런데 히긴스 기자는 이 위험한 곳에 여자 몸으로 왜 왔습니까? 서울이나 수원 같은 안전한 곳에서 기사를 써도 되지 않나요?"
마가렛이 걸음을 멈추고는 김인규를 노려보았다.
"이봐요. 미스터 킴. 당신도 그 불독처럼 말하시네요. 난 여자가 아니라 기자에요. 그리고 종군기자는 전선에서 취재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마주 선 김인규가 웃었다.
"워커 장군이 뭐라고 했는데요?"
"그 돼지같은 장군이 전쟁터엔 여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없으니 당장 동경으로 돌아가라고 지난여름에 나를 한국에서 추방했어요. 하도 기가 막혀서 동경사령부의 맥아더 장군께 달려가 사정했죠. 한국엔 풀숲이 많아서 여자라도 일 보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말이에요. 결국 인천상륙 때 맥아더 장군께서 군함에 태워주었어요. 그 분이 월미도 앞에서 인천 쪽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사진이나, 참모들과 함께 바닷물에서 걸어 나오는 사진들이 다 내가 찍어 송고한 사진이에요."
"그랬군요. 열정이 대단하신 기자님을 몰라봤습니다. 히긴스 기자. 진심으로 사과하죠."
마가렛이 가방을 반대쪽 어깨로 옮겨 메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사과를 받아들이겠어요. 그리고 매기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겠습니다."
뾰로통했던 그녀의 표정이 금방 미소로 바뀌었다.
마가렛 히긴스 기자는 6.25가 발발한 이틀 후에 한국으로 달려왔고, 폭파 된 한강 다리의 그 유명한 사진을 찍은 장본인이다.
한국전을 취재하는 마가렛 히긴스 기자. 그녀는 미군들 사이에서 '매기'열풍이 불 정도로 인기있는 종군기자였다.
인규를 앞장서 10군단 사령부로 성큼성큼 들어간 마가렛이 긴 복도를 지나 군단장인 알몬드의 방을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 열고 들어갔다. 인규도 따라 들어갔으나 방은 텅 비어있었다. 뒤 따라 뛰어온 군단장의 당번병이 마가렛에게 친밀한 미소를 띠어보이고는 김인규에게 말했다.
"동경에서 오신 미스터 킴입니까?"
"그렇소."
"장군께서는 해병1사단의 여러 연대가 중공군으로부터 파상공세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부관님과 함께 급히 전선시찰을 나가셨습니다. 나가시면서 미스터 킴이 오거든, 해병1사단 본부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쪽에 헬기를 준비해놨습니다."
김인규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장군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더 시급한 일이 있소. 먼저 이 사령부에 있는 중공군 포로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시오. 그들을 취조해야 하오."
그가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포로들은 이미 후방의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해병사단이 중공군과 전투중이라고 했지 않았소? 거기서 포로들을 계속 보내올 것이 아니오."
"어제부터 해병 1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 근처에서 전투가 치열합니다. 그래서 지금 육상도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아직 채 완공되지 않았지만 하갈우리의 비행장에서 수송기로 부상병을 실어 나르는 형편입니다. 지금 포로들을 후송할 사정이 아닙니다."
마가렛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스터 킴. 그래서 네드가 1사단 본부로 당신을 오라고 한 것 같네요. 자, 이럴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빨리 헬기로 가자구요."
그녀가 인규의 팔을 잡아끌었다. 인규가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장군이 전선시찰을 끝내고 올 때까지 기다려요. 나 혼자 가겠습니다."
그녀가 양 손을 허리에 올려놓고는 눈을 부라렸다.
"이봐요, 미스터 킴. 정말 이럴 거예요?"
김인규가 그녀에게 돌아섰다.
"매기, 당신이야 말로 이러지 말아요. 중공군이 파상공세를 한다는 이야기를 당신도 들었잖소. 아무리 종군기자라도 그 위험한 전투장엘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당신도 군인은 아니면서도 거길 갈려고 하잖아요. 나도 마찬가지 이유가 있다구요."
그러더니 그녀가 당번병에게 돌아섰다.
"헬기가 어디 있죠, 버니?"
마가렛이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김인규는 어쩔 수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6
“한밤중에 중공군의 길 안내를 했다는 이곳 마을 사람이 진술하기를, 그들 행군 길이가 세 시간이 넘었다는 거요. 그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런 부대가 한 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오. 이곳 산악지대 곳곳에 중공군들이 대거 숨어 있다는 말이거든.”
태평양 전쟁 때부터 역전의 용사이며, 사단 휘하 장병들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소장이 김인규와 캐서린 앞에서 말했다. 휘하 장병들이 '사단장'이라기보다는 '교수님'으로 부를 정도로 침착하며 매사에 철두철미한 성격이라고 알려졌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김인규가 말했다.
“그렇다면 알몬드 장군의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가 아니겠습니까.”
“어젯밤 장진호 동안의 육군 7사단 31연대장인 앨런 맥클린 대령의 휘하 대대가 동시에 공격받았는데, 한 개 대대당 수많은 인원이 공격을 해왔다는 보고요. 마을 사람의 진술을 처음엔 믿지 않았는데,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소.”
“그렇다면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이 동부전선의 산악지대에도 대규모 중공군이 들어와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그런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소. 도대체 그런 대규모 병력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말인지 말이오. 어쨌든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우리에겐 아직 없소. 알몬드 군단장이 이 사태를 가볍게 보는 것이 답답할 뿐이오."
김인규는 스미스 장군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태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
미10군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은 맥아더의 오랜 참모이자 그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장군이었다. 그렇기에 인천상륙작전을 입안할 때 맥아더는 미10군단을 새로 창설하면서 알몬드 소장에게 군단장을 맡겼다. 그런 후,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게 되면서 서부전선의 워커 미8군사령관으로부터 독립시킨 그에게 동부전선을 책임지게 했다. 그런 알몬드가 지금 눈앞에 나타난 중공군의 규모를 우습게 평가하는 견해가 그대로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알몬드 군단장의 휘하에 있는 같은 계급의 사단장으로서 스미스 소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여야 하는 형편이었다. 김인규가 말했다.
"제 임무가 장군의 병사들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중공군의 규모를 자세히 파악해서 동경의 참모부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협조해주신다면 말입니다. 중공군 포로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취조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장군."
"훌륭하오. 미스터 킴. 지금 장진호 서안의 유담리 쪽은 치열한 전투중이라 위험하오. 마침 호수 동쪽의 후동리 쪽으로 특수임무부대를 이끌고 간 육군7사단의 앨런 맥클린 31연대장이 수십명의 포로들을 잡았다고 전해왔소. 그 중엔 당신과 제법 말이 통할 적군의 고급 지휘관들이 있을 것이오. 알몬드 장군이 지프를 타고 그 쪽으로 갔으니 거기 가면 그도 만날 것이오. 당신들이 타고온 헬기로 가서 알몬드 장군이 돌아올 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시오. 어디서 적군이 나타날지 모르는 지금, 지프는 위험하오."
마가렛이 스미스장군 앞으로 선뜻 다가갔다.
"저도 가야겠어요. 홍콩에서 태어나 자란 제 중국어 실력을 장군님도 아시잖아요. 미스터 킴을 도울 수 있을 거에요."
스미스장군이 그녀를 잠시 쳐다보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가렛의 표독스러운 눈을 다시 쳐다보고는 결국 그가 말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시오, 매기."
스미스 장군 사령부를 나오자, 그 앞 넓은 논바닥을 불도저 몇 대가 고르고 있었다. 이미 논 흔적이 사라진 평평한 바닥엔 아스팔트를 깔고 있었다. 그 광경을 잠깐 보고 있자니, 행정장교 하나가 두툼한 파카를 가져왔다.
“사단장님께서 두 분께 이걸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밤이 되면 영하 30도에 육박하거든요.”
김인규가 파카를 입으며 물었다.
“저건 무슨 공사를 하는 거요?”
“비행장 건설을 하는 겁니다. 이곳에 사단사령부를 설치하자마자 시작했습니다.”
“알몬드 장군 명령이오?”
“알몬드라구요? 천만에! 그 사람은 오로지 빠른 진격만을 원하는 사람이오. 이 비행장 공사는 우리 사단장님 고집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아마 알몬드는 비행장을 고집하는 우리 사단장님을 권총으로 쏴버리고 싶을 거요.”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1.4 후퇴 때 모든 군수물자를 군함에서 내리게 한 뒤, 피난민 10만명을 실어 나른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로 극찬을 받았다. 당시 타임지 표지에 실린 모습.
7
마침 알몬드 장군은 매클린 연대장과 함께 각 대대의 현황을 시찰하고 후동리의 시골학교를 급히 개조한 연대본부로 돌아와 있었다.
"미스터 킴. 오우, 매기도 함께 왔군요. 윌로비 장군에게 연락은 받았소. 결국 여기서 보게 되는군. 어이, 대령. 여기 동경에서 온 미스터 킴에게 중공군 포로들을 취조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게. 그리고 매기, 여기는 이 사람들에게 맡기고 당신은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못되오."
마가렛이 알몬드 장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장군님을 모시고 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저는 전장을 취재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여기 남아있겠습니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거구의 맥클린 대령이 뚜벅뚜벅 그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기자님, 여기 남는 건 좋지만 그러려면 내 명령에 따라야 하오. 동경에서 오신 손님은 날 따라오시오."
결국 알몬드 장군과 그의 부관 알렉산더 헤이그 대위만이 헬기를 타고 돌아갔다.
"나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9병단 26군 76사단 소속의 연대 정치위원이오. 우리 병사 동무들과 함께 미 7사단의 동향을 정찰하러 나왔다가 포로가 되었소."
김인규가 포로들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그들 중 가장 높은 직급인 사내를 알아냈다. 중공군에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직급으로만 군 내 서열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포로들과는 다르게 김인규 앞으로 불려나왔어도 전혀 경직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관등성명을 말하는 그에게 김인규가 물었다.
"당신들은 언제부터 한반도로 들어왔소?"
"지난 10월부터 13병단이 들어오기 시작했소."
"현재 한반도에 들어온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
사내는 마가렛이 찍어대는 카메라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말했다.
"우리는 숨길 게 없소. 현재 리텐위 동지가 이끄는 제13병단의 6개 군, 도합 18개 사단 및 예하 3개 포병 사단이 서부전선을 맡고 있소. 그리고 쑹쓰룬 동지가 3개 군, 12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제9병단을 이끌고 동부전선을 맡고 있소. 현재 조선반도에 들어와 있는 우리 인민지원군은 모두 30개 사단과 후방 지원을 맡은 포병사단들이오."
인규가 그에게 얼굴을 붙이고 말했다.
"거짓말 마시오. 그런 대 인원을 어떻게 이쪽에서 모르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이오. 하늘에서 미군 정찰기가 수도 없이 눈을 번뜩이고 있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내가 믿을 것 같소?"
그가 피식 웃었다.
"믿건 말건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우리는 대장정 시절부터 그렇게 해왔소. 낮엔 개인호를 파서 감쪽같이 숨고, 해가 지면 철저한 등화관제 속에서 행군하는 거요. 하늘에 아무리 정찰기가 깔려도 우리를 발견할 수 없소. 우리 홍군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방면에 철저히 훈련이 되어 있소."
인규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인규 자신이 그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김인규는 상해 푸단대학시절부터 모택동 전술이라 일컫는 중국 홍군의 전술에 대해서 연구해왔다. 그렇기에 일본이 물러간 후 중국에 국공 내전이 다시 일어났을 때, 국민당에 대한 상당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내 홍군의 승리를 장담했던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중공군은 그들 사단편제를 감안하더라도 30만이 넘는 대병이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이전에 신의주 근방인 압록강을 정찰하고 나서 클라크 해군대위가 동경사령부의 윌로비 장군에게 보고했다던 것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동경의 전쟁지도부에서는 이 사실을 끝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옆에서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마가렛 역시 얼어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김인규가 일어서려는데, 그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우리 9병단은 지금 하갈우리에 있는 미 해병 1사단 사령부의 후방인 고토리까지 침투했소. 앞으로 이삼일 후면 함흥의 길목까지 차단할 거요.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을 포함한 이 지역의 당신네 부대들은 우리 제9병단 병력 12개 사단에 모두 포위되었소. 당신들의 동부전선 병력은 곧 붕괴될 거요."
김인규가 그에게 말했다.
“9병단 사령관 쑹쓰룬은 어떤 인물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믿을 수 없게도 그가 씨익 웃었다.
“우리 홍군의 자랑인 쑹동지를 숨길 이유가 뭐 있겠소. 쑹동지 휘하 사령(사단장)들은 아침마다 기도한다오. 그가 오늘은 분노하지 않기를 말이오. 그가 한 번 명령하면 불가능이란 없소. 만약 명령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의 분노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가 분노하면 차라리 지옥으로 도망치는 게 나을 정도요.”
13병단을 이끄는 리텐위와 마찬가지로 쑹쓰룬 역시 오래전부터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는 장군이라는 것을 김인규도 알고 있었다. 특히 쑹쓰룬은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직후 그 혹독했던 장정 기간 내내 젊은 연대장으로 자기 부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중국 홍군의 대부분 장군처럼 그 역시 수많은 전투 속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좋은 정보 고맙소, 정치위원 동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마가렛이 김인규의 팔을 잡고 물었다.
"저 사람 말이 사실일까요?"
"사실일 거요."
"그럼 전쟁양상이 어떻게 되는 거죠?"
"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소. 맥아더 사령관은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요. 이제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인 전쟁이 되어버렸소. 이 전쟁은 금방 끝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오."
김인규와 마가렛이 밖으로 나오니 운동장에서 트럭 몇 대가 군인들을 태우고 막 떠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이었다. 그들을 떠나보낸 맥클린 대령이 다가와서 말했다.
"동북쪽에서 대규모 중공군들이 우리 3대대와 1대대를 공격하고 있소. 이제 장진호 서쪽과 마찬가지로 이 동쪽도 적군이 쫙 깔렸소. 난 지금 돈 페이스 중령의 32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출발하려는 중이오."
김인규가 그에게 말했다.
"중공군 포로는 해병사단사령부 남쪽인 고토리 근방까지 자기들이 진출했다면서 이 동부전선의 중공군 규모가 12개사단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곳 장진호 근방에 집결한 적군 병력이 대규모 병력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가 가는 눈으로 김인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포위 된 거군."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서 스미스장군 사령부로 달려가서 동경에 전문을 띄워야겠습니다."
마가렛이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연대장님도 사단에 보고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알몬든 장군에겐 제가 직접 알리겠어요."
그가 부릅 뜬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우리도 빨리 대처를 해야겠소. 그나저나 당신들이 하갈우리의 해병1사단 본부로 갈 일이 걱정이오. 사방이 적으로 깔린 이 마당에 도로로 가려면 위험할 텐데..."
대령이 말끝을 흐려도 마가렛은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도 가야죠. 높은 사람들에게 빨리 알려야 하잖아요?"
"좋소. 우리 병력 일개 소대로 호위해줄 테니 함께 가시오."
그러나 마가렛이 손을 저었다.
"대령님의 부대에도 한 사람의 병사가 아쉬울 겁니다. 고맙지만, 저희는 그냥 알몬드 장군이 타고 왔던 지프로 돌아가겠어요."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에 세워진 장군의 지프로 가서 운전석에 올랐다. 곧바로 시동을 걸고는 지프를 몰고 와 김인규 앞에 세웠다.
"어서 타요, 미스터 킴."
인규가 말했다.
"매기, 내가 운전할 테니 옆 자리로 가시오."
그녀는 옆자리로 가는 대신 뒷좌석에 팽개쳐 있던 톰슨기관총을 집어 인규에게 던지며 말했다.
"운전은 나한테 맡기고 이거나 받아요. 어서 가자구요."
인규가 맥클린 대령과 악수를 나누고 지프에 오르자 마가렛이 쏜살같이 지프를 몰아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해가 지고 있는 어둑한 시골길을 달려 남쪽을 향했다.
미 육군 31연대장인 앨런 맥클린 대령(좌)과 32연대장인 돈 페이스 중령. 이들은 해병 1사단 휘하에서 작전을 펼쳤지만, 장진호 전투에서 끝내 두 사람 모두 전사하고 만다.
8
어슴푸레 빛나는 장진호의 얼음판이 멀리 보이는 도로가 이어졌다. 지난 늦가을에 비가 쏟아진 후 진창이 되었다가 그대로 얼어버렸는지 심하게 울퉁불퉁했다. 그래도 마가렛은 지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엉덩이가 좌석에서 지속적으로 춤을 추었다. 그렇게 달려가자니 앞길도 선명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어둠이 깔렸다.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몰라 라이트를 켤 수도 없었다. 그래도 마가렛은 희미한 도로의 윤곽을 따라 지프를 맹렬하게 몰았다.
"중공군이 이토록 밀려오고 있는 것을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정말 모르고 있었나요? 아무리 중공군이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다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녀가 심하게 흔들리는 운전대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었다.
"사실은 윌로비 장군도 지난 10월 중순부터 첩보를 받고 있긴 했소. 단지 사령부 사람들이 그 정보들을 외면했을 뿐이오."
"왜요?"
"나도 그게 의문이오. 그런 중요한 정보를 그냥 흘렸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령부답지 않거든.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오."
그녀가 인규를 쳐다보았다. 그 사이 지프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매기! 조심해요!"
다행히도 지프가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잃지 않고 착지하면서 달려 나갔다.
"미안해요."
위험한 순간이었어도 그녀는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어쨌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맥아더 사령관에겐 워싱턴과는 다른 생각이 있지 않나 하는 거요. 이 전쟁을 한반도 내부로만 국한 시키려는 애치슨 국무장관이나 트루먼 대통령 같은 정치가들과는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말이요."
"그렇다면 맥아더 사령관은 이 전쟁을 한반도 밖으로 확대시키려 한다는 건가요?"
"그렇소. 더 많은 중공군이 이 전장에 발을 들여놓을수록 만주 폭격과 장개석의 중국 본토침공 여론을 만들기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거요."
"미스터 킴의 무모한 확대해석이 아닐까요?"
"지금 상황을 종합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소. 천하의 윌로비 장군이 그토록 정보 분석에 허술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오. 어쨌거나 맥아더 사령관이 3차대전 발발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참에 공산진영의 과감한 축소를 기도한다면, 그 다운 성격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 않소."
"태평양 전쟁을 이끌 때 그 분의 스타일을 보면 그렇긴 해요. 그렇다 해도 워싱턴을 반하면서까지...앗!"
그 때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이 지프 앞에서 작렬했다. 두 사람은 지프와 함께 공중으로 날았다가 옆의 도랑으로 처박혔다.
혹독한 겨울의 장진호 전투
김인규가 눈을 떴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자신을 꽁꽁 묶어버린 느낌이었다. 몹시도 추웠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무언가가 가슴을 눌렀다. 마가렛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인규의 얼굴로 자기 얼굴을 붙여왔다.
"깨어났군요. 죽은 줄 알았어요."
그녀의 볼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울었던 것 같았다.
"당신은 어떻소. 많이 다쳤소, 매기?"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아요. 당신은요?"
작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엔 그래도 힘이 묻어났다.
"모르겠소. 몸을 움직여봐야 알 것 같소. 그런데 여긴 아직도 우리가 폭격 맞은 곳이오?"
"아니에요. 길에서 좀 더 아래쪽으로 당신을 끌고 왔어요. 저 쪽에 희미하게 연기가 올라가는 거 보이죠? 저게 우리가 탔던 지프에요. 그 옆이 도로구요."
"중공군들이 확인하러 오진 않았소?"
"무슨 영문인지 그들도 잠잠해요. 지프가 전복 된 걸 봤을 테니 우리가 죽은 줄로 알고 있나 봐요."
하갈우리의 해병사단본부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었다. 이 밤에 길로 나가 걸어가자니 도처에 깔려있을 중공군에게 무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추위가 심했다. 김인규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발을 떼어놓는 순간, 오른쪽 다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비틀 거리자 재빠르게 마가렛이 자기 어깨로 인규를 부축했다.
"내 어깨를 잡고 한쪽 발을 옮길 수 있겠어요?"
인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해봅시다."
그녀가 인규를 부축한 채 발 등으로 무언가를 땅에서 걷어 올렸다. 웬 끈이 어둠 속에서 보였다. 그녀가 허리를 조금 굽혀 그걸 손으로 집어 올려 반대쪽 어깨에 멨다. 톰슨기관총이었다.
"당신이 기절한 사이 나는 좀 바빴어요."
"그런 것 같군요. 그 총을 이리 줘요. 내가 멜 테니. 그래야 나를 부축하기 수월할 거요. 그런데 당신 가방은 어쨌소?"
"부서진 카메라에서 간신히 필름만 건졌어요. 타자기도 그렇고 모두 쓸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었기에 가져오지 않았죠."
인규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계곡이 나왔다. 두 사람이 계곡을 따라 좀 더 내려가니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민가가 보였다. 불빛은 없었다. 빈 집이라면 들어가 추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가렛이 말했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내가 가서 살펴보고 올게요."
마가렛에게 총을 주려고 하니 손을 저었다. 하긴 이 밤에 총을 쏘면 중공군을 떼로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녀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금 후에 돌아온 그녀가 인규에게 어깨를 들이밀며 말했다.
"낮에 중공군들이 있었나봐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어디 허물어진 곳이 없는 멀쩡한 집이었다. 방마다 창호지가 약간 찢어졌을 뿐 문도 온전한 그대로였다. 둘은 안채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라이터를 켜고 방을 둘러보니 지푸라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한 쪽에 두꺼운 이불이 뭉쳐져 있었다. 마가렛이 방바닥에 인규를 앉히고 이불을 가져다가 두 사람을 둘렀다. 그래도 한동안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았다. 마가렛이 인규를 눕히고 체온을 나누기 위해 감싸 안았다. 그녀는 얼굴이 서로 맞닿아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우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그래야 되오. 만약 둘이 안 된다면 당신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겠소."
마가렛이 얼굴을 인규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코에서 내 뿜는 온기가 얼굴에 닿는 걸 느끼며 인규가 마주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인규에게 다가왔다. 인규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든 당신과 함께 여길 빠져나갈 거예요."
9
"추웠어도 마음은 포근한 밤이었겠네요."
닥터 로쉐의 말에 마가렛이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밤은 길지 않았어요."
마가렛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다음 날 새벽, 동 트기 직전에 중공군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어요. 우리는 잠결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그 민가를 빠져나와 계곡으로 숨었죠."
닥터 로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그래서요?"
"우리가 계곡에 숨어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한 떼의 중공군이 그 빈집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온 반대 쪽 능선으로 올라가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의 숲으로 들어갔죠. 도무지 방향 잡을 길이 막막했어요. 그저 어림짐작으로 스미스 사단본부가 있는 방향 쪽으로 무작정 걸었어요. 미스터 킴은 다리통증이 극심했어도 잘 참고 따라왔죠.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마가렛이 누운 채 한숨을 쉬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얼마간 숲을 헤치고 가는데 자동차 소리가 멀리서 들렸어요. 미스터 킴을 세워놓고 앞으로 달려가 풀숲을 헤치고 보니 눈앞에 도로가 나타났는데, 부옇게 동터 오르는 저 멀리서 지프가 달려오고 있었어요. 분명 미군 지프였어요. 나는 얼른 돌아가서 그를 데리고 뛰다시피 도로로 나왔죠. 그리고는 손을 흔들었어요. 지프가 다가왔을 때 보니 젊은 소위 한사람과 운전병, 둘 뿐이었어요. 그들에게 우리를 하갈우리의 스미스사단본부로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자기들도 그리 가는 중이라면서 타라더군요. 그런데.....그런데....."
닥터 로쉐가 말끝을 잇지 못하는 마가렛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다시 말했다.
"그가 나를 지프 위로 밀어올리기 전에, 내가 그를 먼저 태웠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가 말하더군요. '매기, 당신이 먼저 올라가요. 난 성한 다리를 짚고 올라앉으면 되니까.' 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먼저 지프에 올라가는데, 갑자기 반대편 숲 속에서 총알이 날아왔어요. 깜짝 놀란 내가 그의 팔을 잡았죠. 어서 지프에 오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가 내 팔을 뿌리치더니 외치더군요. '빨리 출발해! 어서!' 그러자 운전병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어요. 그리고.....그리고 그 사람은 거기 남아 적을 향해 마구 톰슨을 쏴대더군요. 지프가 모퉁이를 돌 무렵, 그가..... 그 사람이 쓰러지는 걸 마지막으로..... 봤어요."
마가렛의 눈에서 끝내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필로그
마가렛 히긴스 기자는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이틀 후인 1966년 1월 3일, 프랑스인 의사 앙리 로쉐와 두 수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라오스의 밀림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알 수 없는 밀림의 풍토병이었고 그녀 나이 46세 때였다. 미국 정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전장을 누비며 오래도록 종군기자로 활약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