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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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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Jun 20. 2024

느린 걸음 큰 발자국으로 올라라

예산 덕숭산 산행기, 동막골~440봉~정상~정혜사~만공탑~수덕사

 

덕숭산은 곧 수덕사다. 산 하나가 그대로 불국토요, 거대한 선(禪)의 요람이다. ‘덕숭총림’이라 불리는 산에 깃댄 절과 암자만 9개, 경허(鏡虛․1849~1912) 만공(滿空․1871~1946) 일엽(一葉․1896~1971)으로 이어지는 통 큰 선승들의 이야기까지. 그래서 덕숭산 오르는 일은 등산이 아니라 사찰기행이요 걸음마다 나를 찾는 성찰기행이다. 


“자네가 겪어왔던 그런 산행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네.” 


예산으로 향하기 전, 초등학교 내내 12번이나 소풍을 수덕사로 갔었다는 토박이는 귀띔했었다. 그 말은 돌이켜보면 495m 높이로 넉넉잡아 두어 시간이면 올랐다 내려올 산에서 어떤 화려함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했지만, 높이에 천착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놓치지 말라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덕숭산 산행을 함께 하기로 한 사람들은 수덕사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수덕초등학교 동문산악회 회원들이었다. 그들 또한 이 산을 지겹도록 올라왔을 테며, 또 그 산그늘에 기대어 사는 일이 일상처럼 여겨질 사람들이었다. 


“입장료를 안 내려면 저쪽으로 돌아가야 해요. 요새 덕숭산 오는 등산객들은 대부분 그리로 가요. 코스도 그나마 길고 수덕사 쪽으로 내려가는 건 구경해도 공짜잖아요.”


그들이 안내한 곳은 정상에서 길게 뻗어 내린 능선 끝 동막골 마을 어귀였다. 국립공원 입장료도 폐지했는데 아직도 문화재관람료를 꼬박꼬박 받는 사찰에 대해 사람들은 썩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산 대부분이 사찰 소유이기는 하지만, 문을 열고 중생들에게 먼저 베풀면 지금보다 더 많은 반향이 돌아오리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래서 ‘돈내기 싫으면 돌아가면 되고~’ 요새 유행하는 ‘되고송’처럼 아랑곳 않고 산을 오른다.      


문화재관람료 피해 샛길에 늘어나는 등산객들

날은 무더웠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습도가 높아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였다. 부연 안개에 싸인 예당평야는 논에서 나온 더운 수증기가 온 땅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요새가 제일 농한기예요. 그저 논물이나 좀 봐주면 되고 해서 산에 자주가요.”


농사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등산을 취미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자의 선입견일지도 모르나 조금은 어색했다. 산은 늘 일상의 탈출로라서, 답답한 콘크리트 숲에서 꽉 짜인 톱니바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주어지는 자연으로의 귀환 같은 것이라고 여겨왔던 탓이다. 이렇게 푸른 자연을 매일 마주하고 살아간다면, 나는 산에 오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산행에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산길은 초입부터 슬렁슬렁 이어졌다. 어릴 적 꼬맹이들과 올라 소꿉놀이하던 동네 야산 같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은 엄마가 “개똥아 밥 먹어라!” 부르면 언제든 달려 내려갈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등산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군데군데 산길을 알리는 리본이 달려있었다. 


“지난주에도 관광버스 타고 온 사람들이 이 길로 올라가다가 잔뜩 안개가 껴서 한참이나 빙빙 헤맸어요.”


작은 산이지만 언제나 얕볼 수만은 없다. 다행인 건 어느 쪽으로 내려가도 30여분이면 절이건 마을이건 닿게 되니 크게 걱정할 건 아니라는 것. 지릉을 치고 올라 10여분 만에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올라선 취재팀은 잠시 숨을 골랐다. 


“덕숭산은 그저 저녁 먹고 운동 삼아 올랐다 내려오기에 좋을 정도죠. 한 달에 한 번 정도 산행하는 사람이라면 딱 알맞은 곳이에요.”


수덕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50년이 훌쩍 넘었다는 최명식 씨는 지금까지 덕숭산을 오른 횟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내 집 앞마당 드나들듯 한 그 세월에는 그래서 추억도 많고 회한도 깊다. 


“초등학교 때는 소풍 오면 꼭 정상까지 올라갔는데, 중학교 때는 만공탑쯤, 고등학교 때는 아예 산에 올라가지도 않고 아래서만 놀았지. 애들이 다 그랬어요. 지금은 언제 올라도 좋아요. 고향이니까.”


지겹기도 했을 터, 하지만 고향땅 뒷산은 올라도 올라도 다 못 오른 것처럼 느낄 만큼 어느 이국의 만년설산보다 높고, 또 푸근하다. 

능선길은 간간이 드러난 너럭바위가 많아 쉬어가기 좋았다. 전체적으로 육산이지만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곳곳에 있어, 올라서면 발아래 전망이 탁 트이곤 했다. 들판에는 탱탱히 물기 오른 벼들이 뙤약볕 아래서 태양을 먹으며 청록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능선을 절반쯤 올라온 곳에서는 계곡 아래로 대가람 수덕사의 모습과 상가촌, 커다란 주차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들판 바로 건너편은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된 용봉산이 서 있었는데, 바로 홍성땅이었다. 덕숭산이 있는 덕산면 주민들은 예산군에 속해있으면서도 일을 보려면 홍성으로 나간다고 한다. 거리가 예산읍보다 훨씬 가까운 탓에 생활권이 형성된 것이다. 

덕숭산과 용봉산 사이에 충남도청이 옮겨올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은 터라 물어보았으나 “외지인들이 벌써 많이 들어왔다죠. 잘 모르겠어요 저는…”하며 시큰둥한 반응들만 돌아왔다.      


싱거운가맛깔스러운 하산길이 남았다

견성암으로 갈라지는 길은 출입금지 표지판으로 막혀있었다. 덕숭산의 여러 암자 중 견성암, 선수암, 극락암, 환희대 등 서쪽에 몰려있는 건물들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도량이다. <청춘을 불사르고>로 알려진 신여성 일엽도 그곳에서 하안거를 났을 것이다. 

길을 막아놓은 건 사찰에서 한 일일테다. 등산객들이 몰려들어 혼잡한 것이 마음 닦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겠기에 그리 한 것일 테지만, 정작 지나는 사람들은 막힌 길을 보며 돈 생각을 한다.

정상을 목전에 둔 440m 봉우리에 이르러, 우리는 키 높이의 펜스를 돌아 나와야 했다. ‘등산로 아님’ 표지판은 그곳에도 붙어 있었다. 등산로가 아닌 것이 길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인데도. 정상엔 작은 오석으로 된 표지석 밖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산보 같은 가벼운 산행으로 쉽게 정상을 얻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오해와 오류일지 모른다. 덕숭산의 조망은 어엿했다. 물리적 높이로 오를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마음이 올라설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를 던져주는 산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북쪽으로는 가야산의 육중한 몸이 우뚝 서 있었고, 뒤로 고개를 돌리면 넉넉한 예당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1시간 반 만에 도착했기에 급할 것 없는 우리들은 천천히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오르막이 줄곧 싱겁다고 느꼈더라도 맛깔스러운 하산길을 남겨두고 미리 불만을 터트리지는 말아야 한다. 수덕사로 내려오는 계곡길은 덕숭산이 왜 수덕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지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선승들의 발자국이 줄지어 있다. 

정상에서 계단길을 내려와 곧 만나게 되는 곳은 정혜사이다. 그에 못 미쳐 옛 절터였을 법한 너른 공터가 나타나는데, 옛 정혜사 자리다. 절터 부근을 지나며 텃밭에는 더덕이며 참깨를 심어놓아 향긋한 냄새가 은은히 풍겨 나오고 있었다. 덕숭총림의 행자승들은 하루 일을 해야 한 끼 밥을 먹는다는데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전통이다. 

하안거에 들어간 절문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결재가 끝나면 일반인들도 들어와 물도 마시고 구경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정혜사를 지나고 계단길을 조금 더 내려오면 만공탑에 다다른다. 경허스님이 수덕사에서 우리나라 선불교를 일으켰다면, 그를 가장 가까이서 접했던 제자 만공은 일제 강점기 우리 불교계를 지켜나간 사람이다. 당시 공주 마곡사 주지였던 그는 31 본산 주지 중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며, 일본 불교화하려는 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육 척 장신으로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해도 지지 않던 천하장사였다니, 풍모가 상상이 된다.    

“만공스님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에 가서도 호령을 하고 다니던 유일한 사람이었대요.”


초등학교 적부터 만공탑으로 소풍을 다녔던 일행들은 “그땐 탑이 엄청나게 커 보였는데 이제 보니 왜 이렇게 작아 보이는지 모르겠다”라고 입을 모은다. 얽매이지 않고 늘 자유로웠던 만공이 부르고 다녔다는 노래도 전해오는데 제목은 ‘누름갱이 노래’ 요, 내용은 이렇다.


‘오랑께루 강께루/정지문 뒤 성께루/누름개를 중께루/먹음께루 종께루’


무슨 요술을 부리는 주문인 듯한데, 따라 하면 할수록 입에 착착 감기는 게 은근한 중독성이 있다. 아이 같은 몸짓으로 중얼거리고 다녔을 만공의 유쾌함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행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산길은 향운각과 소림초당으로 이어진다. 두 곳 다 공부하는 도량으로 외인들은 출입이 금지돼 있다. 향운각 앞에는 눈에 띄는 불상 하나가 서 있는데, 1924년 만공이 자연 바위벽을 깎아내 만든 관세음보살상이다. 높이 7m에 달하는 미륵상은 거대한 체구에 굵은 기둥 같은 몸뚱이가 투박하지도 않고 날렵하지도 않으며, 우아함보다는 그저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딱 본인의 자화상이요 내포 땅을 밟고 살아가는 농투성이를 새겨놓은 것 같다. 고통받았을 식민지 중생들에게 만공이 준 선물이었을까. 

소림초당은 절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그저 평범한 초가집이다. 등산로에서 살짝 비껴있는 그 집으로 가려면 ‘갱진교(更進橋)’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도 출입할 수는 없기에 그곳에 서서 담 너머를 넘겨보는 게 아마 전부일 텐데, ‘갱진’이란 한발 더 나아간다는 뜻으로 벼랑길 같은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한 번 더 마음을 때리는 죽비소리와도 같은 것일 테다. 만공은 이곳에서 한 여름을 보내며, 갱진교 위에 앉아 거문고를 켰다고 전해진다.       

고승의 흔적들 곳곳에 배어있는 산길

이런 작은 산에도 계곡물이 흐를까 생각했었는데, 실 같은 물줄기가 도랑을 타고 내려온다. 땀으로 흠뻑 젖은 일행들은 그 물에 손을 씻고 얼굴을 닦는다. 


“어머, 물이 너무 시원해.”


여느 산 계곡에 비한다면 계곡이랄 것도 없는 작은 물줄기. 1080개의 계단길을 내려온 끝에 수덕사에 다다라 다시 본 그 물은 어느새 한 사람은 들어가 풍덩할 만한 넓이로 커져 있었다. 

수덕사 대웅전이 벌써 700살이란다. 700년 동안 이 작은 산에 기대 살아왔으니, 지겨울 만도 한데 그래도 여기가 좋다고, 여기 아니면 아니라고 큰 품 벌려 사람들을 안고 있다. 


“아저씨,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절문을 나서려는 찰나, 납의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웅전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어달란다. 파인더는 너무 좁아 아무리 뒤로 뒤로 걸음을 쳐도 덕숭산의 모습은 다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에라 모르겠다 사람만 찍어놓고 황급히 건넨 후 사천왕문, 금강문, 일주문 지나 저잣거리 같은 매표소 밖으로 빠져나왔다.  


2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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