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등산인구가 18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산악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아마 이들 모두가 산악인 또는 알피니스트라면 우리나라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까지도 모두 산악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산악인과 비산악인, 또는 등산동호인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우린 적어도 건강을 위해 아침마다 산에 오르거나 단순히 주말에 즐기는 여가활동으로 산에 오르는 사람을 두고 산악인이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수봉 암벽을 오르내리거나 또는 만년설산에 몇 번쯤 다녀왔다고 해서 또 그것이 산악인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것만을 두고 산악인의 기준을 세우기엔, 교회에 다닌다고 전부 성직자라 말하지 않는 것처럼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나라에는 산서 평균 판매량만큼의 산악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산서란 흔한 산행 가이드북이나 부록에 맛집 따위를 소개하는 책들을 제외한 숫자다. 적어도 산서란 시, 소설, 수필, 에세이, 체험기, 정보서, 번역서에 이르기까지 알피니즘을 배경으로 하거나, 아니더라도 역사문화적 가치와 정보가 담겨 산사람 특유의 정서가 배어있어야 한다고 우린 은연중 믿고 있으니까.
전문적으로 산에 오르는 기술을 늘 연마하고, 또 산서를 읽으며 내면을 풍요롭게 다지는 사람. 그렇게 한정해 보면 우리나라의 산악인은 많이 잡아야 대략 2~3천여 명쯤 되는 것 같다. 연간 출간되는 산서라 할 만한 것들이 초판 평균 2천 부를 찍고 나서 재판을 찍는 경우는 10권 중 1권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숫자에 대입해 보면 1800만 명 중 0.016퍼센트, 산악인이라고 모든 산서를 다 읽는 것은 아닐 테니 산에 가는 1만 명 중 단 한 명만이 문무를 갖춘 진짜 ‘산악인’에 해당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단지 외형적으로 파악될 뿐이지만, 진정한 산악인의 숫자는 교회나 절에서 수도하는 성직자의 숫자보다도 훨씬 적은 셈이다.
한국 산서의 시작, 어디부터인가
한국인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지만, 그건 산서라는 분야에서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때문에 여기서 책을 많이 읽자고 부르짖는 건 그야말로 허공에 대고 외치는 메아리밖엔 되지 않는다. 산에 다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이 글도 읽지 않을 테니까.
등산이라는 것이 머리가 아닌 몸이 우선 되는 외향적 활동이다 보니 사람들은 그 행위에 먼저 빠져들게 되고, 그 육체적 활동이 정신적 활동으로 옮아가기까지는 대체적으로 어떤 계기나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야구를 배워 잘 나가는 선수로 활동하던 사람이 어느 날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나서 문득, ‘아,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야’라며 인생도 저 바닥을 쳤을 때 다시 시작하는 거라는 삶의 진리를 깨닫는 것처럼. 공을 치는 대로 뻥뻥 맞듯 신나서 매주 정신없이 바위에만 매달릴 때는 이런 책 같은 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다가 산을 오를수록 마음이 허탈해지고 때로 가보지 않은 세계가 궁금해지고, 속 깊은 곳에 ‘나는 대체 왜 산을 오르는가’라는 화두가 스멀스멀 생겨날 때에 우리는 책을 펴 들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서를 읽는 사람들이 적은 건, 우리나라 인문학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책을 가까이하는 것을 으뜸으로 쳐온 문화를 자랑해 왔으나, 실상 한자문화권 속에서 귀족사회가 만들어낸 카르텔일 뿐이었고, 그렇게 보면 독서인구란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근대를 지나며 책은 보다 여러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왔으나, 그것이 인문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 또한 빠른 경제성장 속에 사람들의 삶도 경계를 허문 입신과 출세로 요약되었으며, 거기에 인문학적인 소양보다는 그 이외의 요소들이 더욱 중요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입시서적이 여전히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평생 동안 접할 책의 대부분을 읽어왔지만 또 그 내용은 교육과 관련된 실용서가 거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나 시집 같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사람들에게 화제가 될 정도이니까. 때문에 이들이 훗날 산에 다니더라도 실용보다는 ‘인문’에 가까운 산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시중에 몇 권의 산 관련 서적을 펴냈던 한 필자가 이야기한 “역시 그나마 등산기술 실용서가 잘 팔린다”는 말이 한편으로 씁쓸하게 와닿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나라 산악계에서는 산서를 펴내 돈 벌었다는 출판사도 없고 필자도 없다. 몇몇 고정독자를 수십만 명씩 끌고 다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을 주제로 했던 소설이나, 출간 뒤 주변 사람들이 합심해 의도적으로 팔아준 책들을 제외하곤 그렇다.
우리나라 산서의 시작은 길게 보면 근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그 이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가지 않는 건 단지 산을 소재로 썼다고 하여도 필자와 독자층, 유통구조, 소재의 기획 의도 등에서 지금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산서’의 기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유람과 탐승의 기록까지 포함시키기엔 보편성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30년대 나온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나 노산의 설악행각 등과 같이 근현대가 겹치는 가운데 행해진 유람 같은 산행의 기록까지만 우리가 산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알피니즘이라는 근대 산악운동의 입장에서 국한해 보면 더욱 그 범위가 좁아져, 1962년 손경석이 쓰고 성문각에서 펴낸 <등산기술백과>가 우리말로 된 최초의 산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불과 50년, 우리 ‘산악 인문학’이 흘러온 시간은 너무나도 짧지만, 초판본에 실린 홍종인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의 추천사에서 당시의 산서가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꾸준히 노력을 쌓아나가되 등산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이끌어나갈 만한 등산정신을 따로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다. 등산정신은 곧 등산의 지식을 포함한 교양이요, 또 그 인간의 품격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산악 인문학’을 제창함
그럼 그 이전부터 산악활동을 해온 사람들은 어땠을까? 원로들은 흔히 옛이야기를 하며 당시엔 아카데믹한 산행 풍토가 넘쳤다고 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왜 산서는 단 한 번도 중흥을 맞지 못했을까. 초창기의 산악인들은 우리나라의 근대등산이 일본에서 전파된 것과 같이 당시에도 주로 일본이 남기고 간 산서를 통해 정보를 접하고 문화적 소양을 넓혔다. 일제강점기 36년간 우리의 산을 주제로 일본어로 발간됐던 산서의 숫자가 그 뒤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글로 나온 산서와 맞먹는다는 건, 한국과 일본의 인구차이에도 영향을 받은 결과겠지만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혹독한 현실이다.
추측컨대 지금과 같은 다양한 정보 이동 통로가 없던 시절, 활자로 된 책은 거의 유일한 매체였을 테니 산에 다니는 사람 중 책을 읽는 사람의 비율은 훨씬 높았으리라.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 절대적인 숫자가 너무나 작았던 시절이라 산서의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 일뿐.
여기에 70년대를 넘기며 등산이 대중화되면서도 산서가 주목받지 못한 건 앞서 말한 우리 인문학의 낮은 수준에 바탕해 등산이 과거와 같은 엄숙하고도 순수한 방향으로 흘러오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여가활동으로써의 등산, 놀이문화의 등산에서 산길을 찾아가도록 알려주는 것 이상의 어떤 철학과 이념이 필요했으랴.
하나 또한 이런 와중에도 산서로 나타나는 ‘산악 인문학’의 중흥을 위해 분투했던 선구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잡지인 <등산>(현 월간 <산>)이 나온 것은 1969년 5월의 일이다. <등산>은 필자도 없고 독자도 없고 광고주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산악회 10 동지 조난이라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부른 사건과 함께 국민 일반이 산에 쏠린 관심에 대한 반증에 일부 힘입어 탄생하기는 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급기야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초대 발행인은 경영난 끝에 인수봉에 올라가 창간호를 품고 음독자살하는 비극의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다.
<등산>보다 한 달 늦게 나왔던 <산수>도 마찬가지로, 창간으로부터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등산 하이킹 전문 월간지를 표방하며 <산수>를 발행했던 이우형 씨는 처음 받았던 정기구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평소 쌓아두었던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컬러 등산지도를 만들어 직접 쓴 편지와 함께 독자들에게 부치곤 문을 닫았다.
1972년 세 번째로 탄생했던 <산악인> 또한 제작비 감당의 어려움 끝에 요행히 당시 권력과 줄이 닿아 대한교과서에서 공짜로 인쇄를 할 수 있었지만, 두 달 만에 그 줄이 끊어지며 함께 폐간됐다.
이런 과정은 일반 단행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에 나온, 주옥같은 고전이라 불리는 산서들이 지금 중고서적 시장에서 꽤 희귀본으로 취급되며 고가에 팔리는 건 실상 웃지 못할 일이다. 하물며 교진사에서 가스통 레뷔파의 <雪과 岩>을 만들었던 최선웅 씨조차 자신이 만든 책을 소장하고 있지 못하다니 당시의 산서 규모가 얼마나 작았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1970년대에는 과거 외서를 통해 산악 문화를 채웠던 세대들이 좋은 양서를 번역하고 또 막 시작단계에 있던, 고산등반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체험기를 집필하며 책을 써내어 척박한 산서 시장에 불씨를 꺼트리지는 않았다.
이 시기 출간된 <성봉 안나푸르나 초등> <집념의 마나슬루> <영광과 비극의 히말라야 초등사> <알피니스트의 마음> <아이거>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등을 비롯해 한국산악회에서 문고판으로 펴냈던 <별빛과 폭풍설> <8000m의 위와 아래> 등도 지금까지 회자되는 산악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산악운동의 대중화와 함께 각 산악단체에서 줄지어 펴냈던 회보와 등반계획서 및 보고서들도 단지 행위에만 그치지 않고 기록과 체험의 풍토를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간접적으로나마 산서의 명맥을 유지시키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서 및 산악문화 활성화 위한 정책 시행되어야
하나 등산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도 우리의 산서는 꾸준히 이어오되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앞서 말한 허약한 인문학과 얕은 산악문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때문에 그 이면에 몇몇 소수 정예집단의 노력이 빛날 수밖에 없다. 1986년 창립한 한국산서회가 그 대표적이다. 산악도서전시회를 계기로 모인 전국의 산악인, 산서출판인 등이 뭉쳐 만든 산서회는 초창기 단지 책을 읽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도봉산 만장봉 아처루트 재현 등 산악계에 이슈가 되었던 행위를 스스로 벌여 주목받았다. 산을 주제로 책을 읽고 서로 토론한다는 것이, 자칫 행위가 중심이 되는 산악계에서 문약하기만 한 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지만, 회원들은 스스로 당대의 클라이머들이었기에 이 같은 기우는 잦아들 수 있었다. 오히려 산서회가 다른 산악단체와는 차별화되는 산악 엘리트 집단으로 척박한 우리 산악문화를 끌어가는 견인차가 되기를 목표했는지도 모른다.
가끔 산악 관련 행사에 가보면, 이렇게 좁은 땅에 등산잡지가 서너 개나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이 말이 고스란히 우리 산악문화의 융성한 현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산에 가는 사람들이 늘며, 등산과 관련한 산업과 정책의 규모가 커지고, 때문에 등산 관련 매체의 절대적인 수익구조를 차지하는 광고 수입이 각 매체들을 유지할 만큼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일 뿐. 때문에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즐길 수 있어 각광받고 있는 여가활동인 등산이, 이제 국민소득의 증가와 함께 보다 선진국형인 다른 여가활동으로 바뀌어 가면 독자층이 얕은 등산 매체는 더 이상 유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또한 나올 수밖에 없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지금이 호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산악은 그 양적 증가와 함께 이제 사회와 경제 전반에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국가의 정책도 등산교육을 국민 여가활동의 지원 사업으로 인식할 만큼 과거에 비해 한층 다양해졌다. 그렇다면 등산 교육이 단지 기술적인 방법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자로 할 수 있는 콘텐츠의 보급을 통해 문화로 승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연령대인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산서의 보급과 이에 따른 등산문화의 인식 확산은 우리 산악계의 미래가 더 늙지 않게 할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 양대 산악단체들의 연간 예산에서 연감과 월보를 제외한 출판 예산이 전혀 없다는 건, 산서의 호황을 이루는 산악선진국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얼마나 겉으로 맴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비단 책뿐 아니라 활자화된 모든 것이 새로운 것들로 바뀌어가는 세상, 이 산서출판잔혹사가 다만 오래도록 지속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