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을 가다- 김천 황악산
추풍령 포도밭을 지날 때면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떠오른다. 시인의 고향은 영동이나 김천과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인데도. 그의 기일이 겨울이라서 일까. 얕은 고갯마루를 넘으며 길섶에 펼쳐진 포도밭 풍경은 흙과 물로 된 무수한 시인들이 십자가처럼 팔을 벌리고 앙상하게 매달린 것 같다.
휑한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은 절정(絶頂), 육사의 시처럼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이 땅으로 휩쓸려왔다. 구불텅한 길은 김천에 이르러 영남제일문(嶺南第一門)으로 넓어진다. 그 널찍한 대로는 누구라도 역동과 혁신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데, 바로 이 도시의 슬로건이다. 고속열차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방음벽을 뚫고 쉬익 새어나오자 포도밭에서 부리를 조아대던 까마귀들도 한껏 날아오른다.
직지(直指)라 했다. 곧게 가리키라. 천육백여 년전 이 산에 절을 지은 아도화상도 김천뜰 어느 곳에서 산 하나를 가리켰을 터, 야위고 말랐지만 늘어지지 않은 십자가의 손끝에도 우뚝 선 준봉 하나 솟아있다. 서기어린 겨울을 뿜어내고 있는 건 강철로 된 무지개, 황악산이었다.
충북 영동군과 경북 김천시에 걸친 황악산(黃岳山․1111.4m)은 이름이 둘이다. 큰 산 악(嶽)자와 돌려쓰는 것 말고도 학 학(鶴)자를 써 황학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지도에는 황학산으로 표기되어있는데, 지역 사람들이 가리키는 말이나 관에서 발간한 안내 팸플릿에는 황학산이라 나와 있지는 않다. 궁금증을 푼 건 직지사 아래서 수십 년을 살아왔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서였다. 적어도 40여년쯤 전에는 솔숲 사이로 학이 많이 날아들었고, 그래서 황학산이라는 이름도 있다는 것이었다.
<산경표>에도 황학산이라는 표기가 없어 한편에서는 일제를 거치며 지도제작 과정에서 오기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지만, 어쨌든 황악산에 학 무리가 날아드는 장면을 떠올리면 그 또한 깊게 따져 묻고 싶지만은 않은 것이다.
속리산에서 크게 골기를 뿜어낸 백두대간은 황악산 발치에서 몸을 낮춘다. 추풍령이 해발 221m이고 궤방령이 330m에 불과하니 아예 바닥에 엎드린 꼴이다. 하지만 대간은 남녘으로 치달으며 덕유산과 지리산을 웅장하게 빚어내, 이 산은 그런 역동과 혁신을 위한 디딤돌일는지도 모른다.
산의 동쪽으로 흐른 물은 감천을 거쳐 낙동강이 되고, 서쪽으로 내린 물은 초강을 지나 금강에 합류한다. 추풍령과 궤방령은 낮지만 큰물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어 굵은 경계선을 긋는다. 영동과 김천, 충청과 영남을 구분 짓는 백두대간 황악산 자락은 사람의 역사까지 저마다의 모습으로 다듬어 왔다.
삼한시대 감로국이던 김천땅은 삼국시대를 지날 때까지는 신라의 변방이었다. 이후 조선시대 김산, 지례, 개령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김산은 황악산에 정종의 탯줄 항아리를 묻었다는 이유로 군으로 승격된다. 개화기를 거치며 경부선 철도가 놓이고 추풍령 일대는 교통의 요지로 급속히 발전해 1914년 20개 면을 포함하는 김천군, 1949년에는 김천읍 일대가 시로 승격 된다.
경부고속도로와 3번, 4번 국도가 교차하는 김천은 산업단지가 들어서며 완연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10년 말이면 고속철도역까지 들어선다니 영남의 관문이라는 이 도시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비하면 황악산의 서쪽 영동은 김천에 비해 크게 융성한 모습이 아니다. 역동과 혁신에 반해 영동은 난계 박연의 고장임을 내세워 국악과 과일의 고장을 슬로건으로 한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큰 고개 하나가 영동에 있다. 바로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이다.
1950년 7월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를 지나는 철교 아래에 피란중이던 양민 300여명을 미군이 무차별 사살한 이 사건은 20세기 말 세계에 알려지며 미군관계자가 조사를 위해 현장을 방문하는 등 곧 진실이 드러날 것 같았다. 하지만 작년 가을까지 미국과 한국정부가 뚜렷하게 밝혀낸 사실이나 입장은 없다. 단지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붙여놓은 쌍굴다리의 동판과 콘크리트를 파고든 총탄 흔적에 복잡한 도심의 교통사고 현장처럼 그어놓은 하얀 동그라미들이 달리는 운전자의 눈길을 끌 뿐이다. 어디 노근리 뿐이랴. 혹여 4번 국도를 따라 추풍령 고개를 넘거든, 그대도 잠시 속도를 늦춰보라.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영남의 선비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질까 두려워 궤방령 넘는 길을 택했다는데, 그 이름대로 과거에 합격한 명단 등 나라의 방을 걸어놓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다녔을 길이었을 텐데, 지금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들이 매어놓은 리본만 한 가득이다.
황악산의 산길은 단조로운 편이다. 영동쪽으로도 길은 나있으나 거의 찾는 이가 드물고 백두대간이 아니라면 열에 아홉은 직지사를 거치는 계곡을 따른다. 직지사는 조계종 8교구의 본사로 매표소가 있는 황악산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거찰의 기운이 느껴진다. 직지사 대웅전은 조선 초기까지 2층 건물로 청동기와를 덮은 건물이었다니 여간 ‘럭셔리’했던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단층에 흙기와를 올렸지만 옛 영화를 알리려는 건지 용마루 가운데 하나만 청동기와를 덮어 두었다. 고려 때는 250동의 건물에 2500여명의 스님이 북적였다고 전해지나 요즘은 결재철에만 50여 눈 푸른 납자가 화두를 품고 씨름할 뿐이다.
오랜 세월만큼 절이 낳은 인물도 많았을 터, 손꼽으라면 누구나 알만한 사명대사다. 그가 열다섯 살 때 출가한 곳이 직지사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고 훗날 선교양종판서라는 직책까지 받는다. 직지사 경내에는 사명각을 짓고 그의 영정을 걸어두었다. 정조때 처음 지었지만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한글과 같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고, 낙관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사명각 옆 명부전에는 박 대통령 일가의 영정이 걸려있다. 명부전은 불교에서 지옥의 중생을 구한다는 지장보살을 세워둔 건물로 늘 뭇사람들의 한숨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얼마 전 누전 화재가 난 천불전에는 어린 부처들이 세수하느라 한창이다. 고목으로 늙은 마당가 개나리는 지난달까지 꽃을 피웠다지만 사뭇 내린 한파에 봉오리 쏙 들어가 버렸다. 능여계곡을 총총 뒤로하고 황악산의 배웅을 받는다.
산문을 벗어나는 시간, 마른 땅에 선 십자가 같은 포도덩굴은 여전히 구부정한 메시아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역동과 혁신은 목이 마르다. 수분이 광야를 적시고 덩굴의 겨드랑이 사이로 주렁주렁 포도가 열리는 날, 시인은 일어나 뚜벅뚜벅 그대에게 올까. 강철 같은 무지개 끝에, 포도알갱이처럼 매달린 무성한 백두대간. 하지만 겨울은 여전히 절정.
-2007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