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루리 글 그림, 문학동네
지난 2월 6일에 일어난 튀르키예(터키)•시리아 강진으로 현재(2월 17일)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상을 달리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거라는 안타까운 소식이 연일 들리고 있다.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고양이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스탄불. 그 신비로운 도시가 있는 튀르키예. 그 나라를 이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커다란 재해로, 날마다 긴박한 뉴스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무너져 버린 건물들을 보면서 내 마음도 짓눌리기 시작했다.
만약, 나에게도 저런 일이 일어난다면, 갑자기 소중한 사람들과 내 삶의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암흑 속에 갇힌다면,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끔찍한 일을 현실로 당면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중에 기적 같은 소식 하나가 전해져 왔다. 바로 강진이 일어난 지 10여 시간이 지났을 때, 시리아의 작은 도시 진데리스에서 탯줄도 떼지 못한 한 여자아이가 건물 잔해에서 구출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구조자 손에 아슬아슬하게 안겨 있던 아주 작디작은 아이를 둘러싸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신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꿈틀거리게 했다. 안타깝게도 가족은 모두 죽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끝까지 아이에게 생명을 선물해 주고 싶었을 엄마의 극진한 사랑이 아이를 모진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게 했을 것이다.
작은 몸에 멍이 가득했지만, 어여쁜 별처럼 반짝이던 아이, 아야는 아랍어로 기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야를 보면서 작년에 읽었던 동화책 한 권이 떠올랐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 그리고‘이름 없는’새끼 펭귄과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바로 루리 작가의 <긴긴밤>이다.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작품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펼쳐 본 <긴긴밤>은 나를 깊은 아름다움 속으로 이끌었다. 읽는 내내 진실한 문학이 뿜어내는 향기로 마음이 설렜고, 이렇게나 마음이 아프지만 아름다운 동화를 쓸 수 있는 루리 작가에 대한 궁금증과 경탄이 쏟아졌다. 작가는 2018년 3월 19일 출근길에, 세상에서 마지막 하나 남은 북부흰코뿔소 ‘수단’의 죽음 소식을 들으면서, 수단이 어렵게 살아냈을 45년을 그려보다가, 지금의 <긴긴밤 – 작지만 위대한 사랑의 연대>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미술 이론을 공부한 작가는 <긴긴밤>의 모든 그림도 직접 그렸다. 표지에는 바람이 일렁이는 푸른 초원에 온순한 얼굴의 뿔이 잘린 커다란 코뿔소와 아주 작은 펭귄이 서로 다정하게 마주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너는 펭귄이잖아. 펭귄은 바다를 찾아가야 돼.” 115p.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코뿔소로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안전한 공간을 벗어나 두렵기도 한 자연으로 돌아간 노든. 그곳에서 같은 코뿔소를 만나 행복한 가족을 이룬 노든이었지만, 행복도 잠시. 밀렵꾼들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파라다이스라는 동물원에서 살게 된 노든은 상실의 고통과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긴긴밤’과 마주하게 된다. 다행히 ‘긴긴밤’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코뿔소가 생겼지만, 그마저도 코뿔소의 뿔을 노리는 밀렵꾼들에게 친구를 잃고, 다시 완전히 세상에서 혼자가 된 흰코뿔소 노든. 그때 사람들의 전쟁이 시작되고, 폭탄이 동물원에 떨어지면서 노든은 얼떨결에 동물원을 벗어나게 된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서 양동이에 담긴 알 하나를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펭귄 치쿠를 만나게 된다. 치쿠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동물원이 세상 전부였지만 우연히 버려진 알 하나를 품게 되면서 아름다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사랑하는 모든 존재를 잃고,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흰바위코뿔소로서의 외로웠던 노든과 알 하나에 목숨을 건 펭귄 치쿠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힘들지만 따뜻한 ‘긴긴밤’ 이야기가 시작된다. 곧 태어날 새끼 펭귄을 위한 마음 하나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힘들고도 서툰 발걸음은 내 마음에 뜨거운 감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서히 죽음을 향해가는 치쿠의 마른 몸 위로 내 뜨거운 눈물이 가 닿기를 여러 번. 죽는 순간까지 알을 소중하게 품고 있던 치쿠와 그런 치쿠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낸 노든의 사랑으로 드디어 세상의 문을 열고 ‘이름 없는 나(새끼 펭귄)’가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p.81
노든의 일생을 보면서 우리 삶을 생각했다. 만나고 헤어지고, 상실이라는 슬픔을 만날 때마다, 그 이면에는 언제나 새로운 위로도 함께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상실의 순간은 더 많아지고, 두려움으로 잠들지 못하는 긴긴밤이 여러 번 찾아오겠지만,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고 했으니, 그 별 하나를 놓지만 않는다면, 삶은 살만한 것이라는 지혜로운 말에 마음을 기대본다.
엄마의 끈질긴 사랑으로 죽음을 이겨내고 빛으로 태어난 아야가 언젠가는 세상의 기적으로 자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세상은 끝없는 긴긴밤으로 이어져도 그 안에는 언제나 기적도 함께, 빛나는 별처럼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