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퓰리처 전을 갔다 왔다. 20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나에게 문화생활이란 영화, 책, 스포츠와 게임 경기 보는 것이 전부였다. 전형적인 20대 초반 남자들의 취미라고 해야 하나. 연애를 하면서 애인들이 좋아했던 것 중에는 전시회나 뮤지컬 관람들이 종종 있었기에 1년에 한두 번 정도 가곤 했었다. 지금 만나는 애인분은 뮤지컬을 좋아하고 전시회 같은 것도 꽤 좋아한다. 군대 있을 시절 영업당한 공연 기획사의 멤버십은 잘 찾아보면 분기별로 유명한 뮤지컬들과 전시회 티켓을 제공했고 덕분에 내 문화자본의 영역은 20대 초 중반보다 훨씬 넓어졌다. 퓰리처 전도 애인의 주도로 향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매년 하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기에 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예술 쪽 전시회는 영 문외한이라 전시회가 지루한 적도 있었지만 퓰리천은 사진전이기에 기대가 컸다.
평소에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고 꾸준히 콘셉트 SNS 계정에 업로드도 하는 데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장소는 남부터미널 근처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이었다. 경기 북부 거주자인 나로서는 심리적, 물리적 거리 둘 다 멀었지만 언제 또 퓰리처 전에 가겠는가.
코로나로 사람들의 밀집을 막기 위해 10명 단위로 입장을 제한했다. 한 시간쯤 기다려서 입장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적당히 있었다. 가족 단위보다는 연인들이나 친구들 단위로 온 사람들, 혼자 온 사람들이 많았다. 안은 파란색 테마의 디자인으로 되어있었는데 퓰리처 상의 시작부터 현재의 모든 작품이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친절하게 바닥에 화살표로 경로를 표시해 두었고 천천히 서서 감상만 하면 되는 구조였다. 원제와 번역 모두 옆에 상세히 적어놨고 중간중간 나오는 영상 매체들도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감상이 가능했다. 생각보다 퓰리처상의 역사는 길었다. (100년이 넘는 가까운 세계사의 기록을 2시간 좀 넘는 시간에 보는 것이긴 하지만)
잠깐 퓰리처 상에 대해 언급하자면 퓰리처 상은 헝가리계 미국인 조지프 퓰리처의 유언으로 만들어진 상이다. 1917년에 만들어졌고 단순히 하나의 상이 아니라 언론에 14개 부문과 예술에 7개 부문으로 다양하게 나뉘어 수상한다. 언론인들에게는 노벨상과도 같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퓰리처 상의 대부분은 공공 서비스 부문에서 수상한 것들이 많다. 해외 언론에서 일하는 한국인 기자들의 사진도 몇 장 있었고 2019년에 김경훈 기자가 찍은 중남미 이민 행렬의 생생한 현장은 기사로 접했다가 이번 사진전에서 큰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안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였기 때문에 기억을 더듬어서 적는다. 워낙 사진이 많았기 때문이다. 글을 빨리 읽는 편인 데다가 미국 정치사 관련한 사진들은 크게 와 닿지 않았기에 스킵한 사진들도 있었다. 특히 클린턴이나 공화당 계열의 미국 정치인들이 근엄하거나 멋지게 서술되는 사진들은 빠르게 지나쳤다. 전쟁, 테러, 환경 등과 같은 사진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관련한 사진들이 많이 기억난다. 특히 , 베트남전 사진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퓰리처 전이라고 마냥 찬양하면서 볼 수는 없었다. 베트남 전의 경우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시작한 미국이, 특히 고엽제와 같은 화학테러까지 불사하면서 승리를 간절히 원했지만 패전한 국가 아닌가. 전쟁의 상흔을 미국 언론인들이 촬영해서 상으로 뽑고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면서 상을 수여한다라..? 뭔가 모순 같았다. 퓰리처 상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미국 언론과 미국 언론계 종사 언론인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언론인들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만 자신의 땅이 전쟁터가 되고 무차별적인 폭력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 지역 사람들은 무슨 눈으로 푸른 눈의 기자들을 대했을지 궁금하다.
기억에 남는 사진 중에는 모녀가 건물의 화재를 피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으나 난간이 무너졌고 그 추락의 순간을 담은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저 순간에 찍는 거보다 도우러 가는 건 할 수 없었을까?' 1993년 케빈 카터가 촬영한 수단의 굶주린 소녀가 같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케빈 카터는 독수리가 쳐다보고 있는 순간에 셔터를 누른 것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고 그 사진을 찍은 후 그 해에 자동차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자살한다. 물론 경제난과 동료의 취재 중 사망 등 정신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 사진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카터의 사진 옆에 코멘트에는 그의 딸이 한 말이 쓰여있었다. "제가 보기에는 세상은 독수리였고 어린 소녀는 저희 아버지였습니다."(정확한 원문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이런 뉘앙스였다.)라고. '언론인은 언제나 관찰자여야 하는가?' '결과가 불러올 영향이 크다면 과정의 비윤리적을 인정해도 되는가?" 등 평소 언론인의 윤리의식에 관해서 가졌던 생각은 이미 사진으로 기록을 남길 시작부터 계속되어온 이야기였나 보다
또한, 911 테러 당시 쌍둥이 빌딩의 폭파 순간, 한강대교를 건너는 한국전쟁의 피난민들, 벌거벗은 체로 울면서 뛰어오고 있는 소녀의 절규 등 참혹한 근현대사의 한 순간들이었다. 주로 제3세계 국가의 사람들은 관찰 대상이 되었다. 흑인, 어린아이, 여성들이 많았다. 관찰자들은 백인들이 주가 되었으며 대부분 제국주의 지배의 역사를 가진 국가 출신이었다. 안타까운 생각과 불편한 생각들이 교차했다. 역사 사회학 시간에 배웠던 세계체제론이 다시 한번 생각나기도 했다. 주변부 국가들은 사진이라는 매체의 기록으로서도 종속되는 면이 있다고 말이다. 퓰리처 상 사진의 비극 안에서 남겨진 아이들이 커서 그 사진을 보았을 때에 어떤 생각이 들까?
90년대 이후 카메라 기술의 발전 덕인지 훨씬 고화질의 다양한 색감의 사진들이 등장했다. 마치 일러스트 같기도 했다. 배경화면으로 써도 손색없을 정도로. 물론 사진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비극은 더욱 화려하고 다채롭게 기록되어 있다. 너무나 많은 사진들을 봤고 대부분은 기억 속에서 잊힐 것이다. 인류의 21세기를 돌아보는 사진들이지만 소수의 사진만 뇌리에 강하게 남아서 생각날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도 카메라가 남기는 흔적들이 너무 매력적인 건 어쩔 수 없었다. 20대를 막 들어섰을 때에는 기록을 남기고 사진을 남기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을 그저 느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20대보다 30대에 더 가까워진 지금은 기록을 남기는 게 얼마나 나에게 큰 의미가 되는지 깨달았다. 아픈 기억은 지우고 싶지만 좋은 기억은 남기고 싶다. 생생하면 생생할수록 추억에 더 깊이 취할 수 있다. 요즘에야 늘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좋다고 하지만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글과 카메라는 궁합이 좋은 친구이기도 하니까! 퓰리처에 수상 된 사람들 대부분은 상에 집착해서 목숨 걸고 찍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히 그 순간을 찍어야겠다고 느껴서 남겼고 그게 인류사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2020. 10. 10
p.s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졸업 후 돈을 모아서 카메라는 꼭 사야겠다. 사진 찍는 취미로 이것저것 공부했지만 아무래도 내 갤럭시 노트로는 순간의 기록을 남기는데 아쉬울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