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이라는 특권성. 정상인의 범주로 분류되는 사회에 대해
인생에서 운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다고 생각한다. 10대에는 잘 몰랐으나 요즘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운이 꽤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이다. 청소년기에 집안 사정이 정말 안 좋아졌을 때. 그 상황에서 교회를 도피처 삼아 기도하러 갔던 엄마를 보고 종교를 싫어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상상하고 원하는 인격신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지는 벌써 10년도 넘었다. 그럼에도 요즘은 난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최저 시급도 못 받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수를 해야 했을 때, 등록금을 내 돈으로 내야 했을 때, 단칸방 생활이나 진배없는 집을 볼 때, 보일러가 오래되어 뜨거운 물이 3분 정도 나오다 나오지 않을 때.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임금 노동을 하지 않으면 학교생활이 불가능할 때, 휴학을 하며 돈을 벌어 놓지 않으면 연애나 학교생활을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을 때. 여전히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불행은 물질적인 것에 상당 부분 국한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여건이 사람의 목숨 하나쯤은 우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만큼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잘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 들을 찾아가다 보면 아직은 살 만하다고 믿는다.
자기 계발서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힐링 담론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임금 노동 없이는 당장의 내일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평범하다면 평범한, 아니면 평범함이라고 서술하기는 조금 부족할 수 있는 내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 난 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 살아가고 싶은 삶의 모습도 있다. 내 부모님은 나에게 경제적인 뒷받침 빼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 분 모두 보수적인 면도 있고 자식들에게 바라는 이상향은 있으나 강요하지 않는다. 엄마에겐 물신주의적 모습이 많지만 애초에 아빠와의 결혼 이유에는 안정적인 가정생활이 있었으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던가 소수자에 대한 관점 같은 것들도 보수적인 기독교인과 비슷하지만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다. 결혼 후 가사노동만 하고 계시기 때문에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가치들을 말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서 그냥 내가 듣고 있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다. 어차피 가족 공동체, 동거인처럼 살아가야 하니까 이렇게 타협적인 자세로 부모님을 대하는 게 요즘은 훨씬 편하다. 20대 초반만 되더라도 엄마의 정서에 공감도 못하고 논리적으로 이기고 싶어 했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엄마에 대해선 써도 써도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그 내용을 쓰려면 논문 한편 정도는 나올 것 같으니까 여기서는 그만 써야겠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난 그래도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은 ‘운’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특출 난 기술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놓은 것도 아니고.
그러나 첫 번째로 사람이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많이 밀어내기도 했지만 결국에 평생이라도 알고 지내고 싶은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평생 가도 아깝지 않은 한 명의 친구만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거라던 말도 있지 않나. 나는 그런 사람이 있으니 아직 살만 하다. 더해서 요즘은 평생 가고 싶은 연인도 생겼으니까 이 정도면 재물 운 말고 인연 운에 몰려있는 게 아닐까? 살아볼 법 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데엔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 같다는 것도 꽤 큰 지분이 아닐까. 두 번째로는 부모에게 받은 사회 경제적 지위가 아닌 다른 요소들이다. 아버지는 키도 꽤 큰 편이었고 기골이 장대하다. 어머니도 뚜렷한 이목구비에 미인이시다. 아쉽게도 나와 누나는 두 분의 장점만을 물려받지 못했지만 난 내 외적인 요소들에 만족하는 편이다. 치열이 고르지 못한 점. 긴 턱으로 인해 노안으로 보이는 점, 다리가 짧은 점 등은 단점이 분명하지만 장점이 더 맘에 드니까 괜찮다. 아빠의 골격을 물려받은 거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아니지만 21세기 트렌드인 적당히 소심한 눈 코 입들의 아름다운 조화 정도로 귀엽게 봐줄 만하니까.(?) 더해서 운동을 취미로 꾸준히 하고 있지만 타고난 골격을 극복하는 건 정말 운동선수 수준의 노력이 필요하고 왜소한 체형보다는 지금의 체형이 낫다고 생각한다. 외적인 조건을 빼도 건강한 신체를 일단 받았으니까.
그거만이라도 난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의외로 지병이나 불치병, 이런저런 질환들을 내 또래들도 달고 사는 경우를 꽤 많이 보았다. 난 그런 거는 없으니까.(아직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회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건강히 컸으니까 뭔가 배배 꼬인 반골기질투성이에 자기애는 강한 혼종이 나와 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리하자면 사회 경제 자본은 주지 않았으나 신체와 매력자본은 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둘 중 하난 받은 셈이라고 치련다. 예전보다는 불행 배틀에 더 이상 껴서 1등을 논하고 싶진 않다는 이야기다. 남이 더 힘들다고 내 힘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은 안다. 그럼에도 난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과 거리가 멀다. 시스젠더, 20대, 남성, 군필, 서울 소재 대학, 정신·신체 질환 없음, 부모가 있는 가족 구성원, 비장애인 위에서 언급한 부모에게 물려받은 사회·경제적 자본만 전무할 뿐이다. 계급적 지위를 떠난다면 개인으로서의 나는 너무나 사회의 ‘정상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적합하고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적인 구도라면 약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난 가진 거 없는 운이 없는 불쌍한 약자’라고’더 이상 쉽게 말하고 싶지 않다.
사회가 내세우는 보편적 기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을수록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기를 부정당하는 한국이니까. 가령, 성적 지향이 '찬성 반대'로 TV 토론에서 다루어지는 걸 보면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뿐이다. 그들이 사회가 정한 정상인의 범주들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왜 이런 국가, 나는 왜 저런 기준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지? 라던가, ‘저 기준은 누가 만든 거지?’라는 고민이 들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시혜적인 느낌’이 들까 봐 쓰고 지우는 것을 반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 글을 써야 할까 말까 고민이 된다.) 한국 사회가 정한 '보편 기준'에 가까운 사람인 내가 소수자들을 이해하려고 그들을 공감하려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이 그들에겐 오히려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그들의 입장을 온몸으로 공감할 수 없고 느낄 수 없음은 한계점이 분명하지만 다양한 그들의 존재를 당연한 권리로 넓혀가야겠지.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특수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당연히’의 보편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으로 말이다. 보편이란 말의 기원은 세상에 나온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지만 보편이라는 말이 약자에 대한 경계를 긋는 도구로 쓰이지 않기를.
P.S 소수자이거나 소수자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보지도, 활동에 참여하지도 못했음에도 감히 이런 글을 쓰는 내가 부끄럽기도 한 날이다.
2020.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