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었던 것을 포기하는 과정에 대해
"재능이 없는걸 그때 깨달았어요"
진로에 관한 이야기나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학창 시절은 참 중요한 시기였다. 고등학교 때 지금은 학생부 종합전형이라 불리는 '입학 사정관'전형이 만들어졌었고 내 1년 선배들이 거의 첫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대학을 꽤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성적이 아닌 다른 스펙으로 대학입시가 결정된다는 것이 뜨거운 감자였다. 교과보다 비교과에 특별한 경험이 있으면 유리했고 실제로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는 선배들이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나 또한 스펙이 화려하다거나 성적이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나름 쓸 말이 있던지라 수시 원서의 절반 정도를 그 전형으로 썼었다. 가장 가고 싶던 학교와 어느 정도 선호하고 있던 학교에 서류 1차를 합격 붙고 좋아했었다. 물론 두 번의 면접 기회가 있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1. 3초의 순간이 결정한 꿈
재능 이야기하는데 왜 입학사정관과 대입 이야기를 하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입학사정관을 준비하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했고 잘했었는지, 재능의 영역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이기 때문이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도 진로이야기에서 삐져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쭉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림 그리기나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지 않았던 학급 좌측 창가 쪽 자리를 선호했던 그런 아이. 그러던 어느 날 체육시간에 다른 반과 축구 시합을 할 일이 생겼다. 으레 그렇듯이 운동에 관심이 없거나 못하는 친구들은 수비수가 되어서 공좀 잘 차는 친구들에게 끌려다녔다. 나 또한 그런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상대편 공격수와 우리 편 수비수가 얽혀있는 동네 축구의 흔한 장면에서 왜 하필 내 발 앞에 공이 차기 좋게 왔던 걸까.
그 순간이 내 인생 전환점의 3초였을 거라고 확신한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있는 힘껏 찬 공에 기묘한(?) 회전이 걸렸고 그대로 상대 골망을 흔들었다. 친하지도 않던 같은 반 공 좀 차던 녀석들은 좋아했고 어쩌다 보니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골로 우리 반은 승리했고 그날 체육시간만큼은 영웅이 된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로 축구공을 사서 학교에 있던 시간 외에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같이 공을 차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지만 운동장이란 곳이 공만 있으면 모르는 사이끼리도 쉽게 친해질 수 있던 공간이라 다른 학급의 친구도 사귈 수 있었고 성격적으로도 '외향 맛 수프'가 첨가되어 운동장에서 만큼은 승부욕에 불타는 다소 호전적인(?) 성격의 사춘기를 맞았다.
이 배경에는 운의 요소가 꽤 컸다, 바로 2차 성징인데 2차 성징이 빠르지 않았다면 몇 달 정도 열심히 하다가 포기했지 않았나 싶다. 당시 키와 골격이 '탈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반에 서너 명씩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컸던 키와 중학생 정도의 체격은 축구 실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저학년 때부터 공좀 차던 친구들에 비 해기 술이나 센스로는 분명히 부족한 점이 있었으나 훨씬 빠른 발과 힘이 있어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섬세하진 않았으나 툭 치고 뛰면 두 세명 정도는 쉽게 제칠 수 있었다. 중학생들과 같이 공을 차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전교에서 공 좀 찼던 아이들과도 알고 지내고 친구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니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확신이 들던 때였다.
재능에 대한 확신이 더 확고했다면 중학교를 진학할 당시 축구부가 있는 곳으로 진학했을 테지만 그때까진 나만의 비밀이었다. 부모님이 운동을 진로로 결정하는 데엔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말하면 오히려 취미로 즐기는 축구마저 간섭받을 것 같아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쩌다 보니 뺑뺑이 방식으로 그 동네에서 가장 면학분위기가 힘든 중학교로 입학하게 된다. 당시 두발 자유화의 바람이 불어올 때였음에도 '면학 분위기'라는 마법의 단어로 동네에서 유일하게 여자는 초코송이 머리, 남자는 18mm 반삭 규정을 유지한 학교였다. 공부를 해야 할지 축구를 직업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사교육이 치열하고 학군이 '좋다'라고 알려져 있지 않은 서울 외곽의 동네였지만 중학교 분위기는 초등학교와 꽤 많이 달랐다. 같은 초등학교 출신들이 없어서 새로 친구들을 사귀는데 애를 먹는 건 물론이었고 학교 선생님부터 아이들 사이의 '면학 분위기'가 실제로 있었다. 아이들은 방과 후에 보습학원으로 다니는 애들이 대다수였고 실제로 같은 대형 학원에서 방과 후에도 시간을 같이 보내는 친구들이 많았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기에 적응하는데 어려웠던 것도 있지만, 여전히 축구를 좋아했다. 끼리끼리 노는 시기다 보니 공부랑은 그리 친한 관계가 아닌 친구들과 열심히 공을 찼다. 집과 3분 거리에 있는 학교였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운동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접근성 덕에 방과 후든 주말이든 개인 연습장 같았다. 거리 순으로 학교가 배정되었던 시기라 친구들도 학교가 멀지 않아 고정 멤버들은 정말 자주 모일 수 있었다. 용돈도 많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에 나와 친구들은 축구공 하나로 말 그대로 하나가 되었다.
방학 때와 방과 후 학교 시간에는 외부 강사의 축구교실까지 등록했다. 사실 상 축구라는 스포츠를 정식으로 배운 다는 개념에서는 생에 처음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때는 유튜브도 없던 때라서 교보문고에 있던 축구 교본 책을 사서 몇 번씩 읽으면서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을까? 축구 강습 시간이 제일 즐거웠던 시간 중 하나였다. 방과 후가 기다려졌고 격주로 쉬는 놀토가 기다려졌다. 그때만큼은 독학이 아니라 체대 출신 강사가 축구를 가르쳐 주었으니까. 강사 선생님하고도 꽤 친하게 지냈는데 선생님의 나에 대한 평가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정확했다.
'발도 빠르고 개인기는 좋지만 기본기가 부족하고 팀플레이가 부족한 편.'
많은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으나 역시 취미 수준으로 밖에는 배울 수 없었다. 강습의 시간 자체도 길지 않았고 못하는 친구들과 잘하는 친구들이 섞여있었기 때문에 효율성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1년이 지나고 중학교 2학년 때가 되었을 때엔 진지하게 전학을 가던지 정식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를 알아봐야 했다. 나와 같이 뒤늦게 축구에 빠져서 진지하게 고민했던 친구 두 명 역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 두 명의 친구들은 나보다 신체적으로나 축구라는 스포츠로보다 재능이 있던 친구들이었다.)
"너희가 축구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니, 여기서 잘해봐야 동네축구 수준인 거지. 진짜 선수가 하고 싶으면 정식 축구부에 가서 테스트라도 보고 와."
친구의 어머니께서 의도치 않게 우리의 고민을 듣고 하신 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고 웃어넘기려 했는데 꽤 진지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꿈만 꿀 줄 아는 아이들에게 어른의 진심 어린 관심은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말만이 아니라 동네에서 역사적으로 제일 성적이 좋은 축구부와 새롭게 축구부가 창단된 학교를 알아봐 주셨다. 그렇게 나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테스트를 보러 향했다. 가는 길은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훨씬 컸다. 축구화와 유니폼만을 챙겨서 차를 탔을 때엔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이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막상 가려니 홀가분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진지하게 이 길을 고민했고 기회가 온다면 시도해보자는 생각이 늘 있었기에 갈 용기가 났던 것 같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시도조차 안 해본다면 훨씬 더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 편에서 이어서 쓰겠습니다.
2020. 0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