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테스트를 본 곳은 축구부가 창단된 지 얼마 안 된 학교라고 했다. 테스트를 보러 갔을 땐 흔한 모래 운동장에서 축구부원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열심히 훈련 중이었다. 미리 연락을 해놨던 건지 감독이 흔쾌히 테스트를 보게 해 주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주장이 테스트 상대였다. 50m 달리기, 단거리 달리기 등 체력 테스트 후엔 미니게임을 진행했다. 주장이 그 팀에서 가장 발이 빠르다고 해서 긴장했으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내가 1등으로 들어오자 구경하던 다른 축구부원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이 풀려서 본 게임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했고 테스트는 연락을 줄 거라는 감독의 말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나쁘지 않은 결과였지만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팀이었기에 예상보다 결과가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학원축구 시스템에서 좋은 축구부 진학은 대입과도 비슷했다. 국가대표와 K-리그에서 뛰는 선수 들 많은 수가 명문이라 불리는 축구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여전히 나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성적이 꽤 좋았던 축구부였다. 친구 어머니에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학교가 끝나자마자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그곳 역시 훈련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쭈뼛거리면서 감독한테 입단 테스트를 볼 수 있냐고 물어봤다. 큰 키에 험상궃은 인상을 한 감독이 락커룸을 알려주고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했고 락커 안엔 우리보다 한 살 많은 골키퍼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축구화를 벗고 두꺼운 축구양말을 벗은 그의 다리는 멍자국 투성이었는데 흙바닥을 굴러서인지 구타의 흔적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처음에 갔던 학교와는 분위기가 훨씬 달랐다. 인원 수도 훨씬 많았고 감독인지 코치인지 하는 사람이 아이들을 거칠게 다뤘다. 축구에서 발 빠르기는 필수여서인지 이곳 역시 달리기를 시켰다. 감독이 눈사람이라고 부르는 달리기 상대는 머리가 커서 눈사람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래도 비슷하게 들어올 줄 알았다. 근데 생각보다 꽤 큰 격차로 져버렸고 이제 머리는 하얗게 질렸다. 달리기가 끝나자 감독이 슬쩍 이야기를 했다. "쟤가 우리 팀에서 발이 제일 느린 애야."라고 멘털은 이미 갈려나간 상태였다. 지금의 학교에선 내가 전교에서 발이 제일 빨랐고 체육대회가 있을 때마다 달리기 에선 깡그리 상을 휩쓸었다. (그래서 별명도 그때 '말'이었다.) 입상을 하진 못했으나 학교 육상 대표로 구 대회까지 나간 적도 있던 터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충격이 꽤 컸다. 아마추어와 준 프로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던 찰나 본 게임에 들어갔다. 템포가 빨라 따라가기 바빴다. 중학생들이지만 세부 전술을 응용할 줄 알았고 공을 '쉽게' 찼다. 몇 번 공도 못 잡아보고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감독은 도중에 한 선수의 플레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비속어를 하면서 따귀를 때렸는데 여기서 2차로 충격을 받았다. "끝나고 빠따 좀 맞아야겠다."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고 이때까지도 운동부=폭력의 일상화 공식이 적용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입단은커녕 들어간다고 해도 물이나 떠오고 벤치나 지키다 그만두는 미래가 그려졌다. 당연히 감독은 아쉬워하지도 않았고 생각이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는 식이었던 것 같다. 물론, 첫 번째 학교의 감독에겐 연락이 왔으나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 없었다. 인접한 학교의 축구부 수준이 이렇게 천지차이가 날진대 전국구 단위, 국가 단위의 정규적인 과정을 밟아온 친구들과 경쟁이 될 수 없음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애매한 재능이었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체계적인 과정을 밟아온 친구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을 나와서 벽을 느낀 거다. 아마추어에서 잘해 봤자 탈아마추어는 할 수 없었나 보다. 그 이후로 몇 달간은 축구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우울했다. 태어나서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쏟은 것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폭력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맞으면서 축구를 할 정도로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할 때라 골을 넣기라도 하면 뉴스나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실리기도 했던 시절이었지만 축구를 볼 때 마저 우울했다. 그날 이후 방과 후엔 PC방에서 게임하는 걸로 시간을 때웠다. 방황이라고 표현하면 비슷했던 것 같다. 부모님에겐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저 알고 보니 재능이 없었더라고요, 공부나 진작 할걸 그랬어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손을 놓고 있었고 다시 펜을 잡자니 앞이 캄캄했다. 함수가 뭔지, 이차 방정식은 뭔지 알지도 못하는 수학 포기자가 되어 있었다.
3학년이 되면 전교에서 공 좀 찬다는 아이들을 모아 지역 (아마추어) 토너먼트 대회를 준비했다. 중학교 3학년에 연례행사로 늘 해왔고 체육 선생님의 추천으로 팀의 주장으로 참가하게 됐다. 늘 비슷하게 지역구 정도에선 우승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역사적으로 져본 적 없던 이웃 학교에게 3대 0 완패를 당했다. 다행히 상대 팀이 구 대회까지 우승하면서 나름 '명예로운 죽음'을 당하긴 했지만. 이때가 나의 재능에 대한 확인 사살이었다. 아무리 몇 달간 공을 안 찼다지만 아마추어 사이에서도 별 특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올라갈 때 즈음이라 초등학교 때 가진 신체적 요소도 큰 이점이 아니었다. 나보다 키가 더 크고 빠른, 힘이 더 세고 체력이 강한 친구들도 간혹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축구를 업으로 삼겠다는 건 객기였다. 부유한 집안 환경도 아니었고 만약 내가 진심을 다해 도전한다면 부모님의 물적, 정신적 지원이 꽤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뿐만 아니라 가족이 '올 인'한다고 볼 수 있는 거다. 재도전할 기회는 없었다. 지금은 개선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당시엔 예체능 계열에서 프로의 세계로 가지 못한다면 뒤가 막막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학업이라던가 프로가 되지 않아도 업계에서 종사할 수 있는 다른 지식 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간절함과 재능, 좋은 지도자와 헌신적인 부모님의 조화 없이는 상위 0.001퍼센트의 세계에 진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선수의 길은 아닌 것을 인정해야 했다.
졸업할 시가엔 일반계고에 진학할지 실업계나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할지 다들 고민을했다. 3학년 때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동기부여로는 직업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에 더해서 녹록지 않은 집안 사정이 한 몫했다.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축구와 관련한 직업들이 많았고 대부분은 대학교 학위 이상이 필요했으니 공부는 해두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다. 신기하게도 축구에 매진했던 경험이 꽤 도움이 되었다. 수학은 여전히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나머지 과목은 노력 비례로 성적이 올랐다. 중학교 성적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담임 선생님이 진심으로 기뻐해 주신 기억이 나기 때문이었다. 반 28등에서 시작한 성적이 11등까지 올랐다. 처음으로 공부에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공부 습관이나 스킬이 부족했지만 체력 하나만큼은 남아있었다. 엉덩이로 공부한다는 말처럼 친구들보다 오래 앉아서 이해가 안 가면 그냥 외웠다. (암기과목 점수가 등수 뻥튀기에 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고등학교 가서 첫 시험 때는 반에서 1등을 했는데 그때부터 공부에 재미가 붙어서 대학과 진로에 관한 진지한 고민을 했다. 학군이 안 좋은 학교였고 주위 자사고가 우후죽순 생겼기 때문에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이 그쪽으로 흡수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나에겐 장단점이 뚜렷했는데 면학 분위기는 안 좋았지만 덕분에 내신 성적을 잘 받을 수 있었고 그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도 진학할 수 있었다.
글 초입에 나왔던 입학사정관 전형 이야기를 하자면 축구 해설가나, 스포츠 캐스터 쪽의 진로로 입시를 준비했다. 축구 칼럼도 꾸준히 썼었는데 그게 1차 서류 통과의 이유였던 것 같다. 면접 탈락은 나보다 성적도 좋고 서류도 더 화려한 친구들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크게 미련은 없었다. 재수 끝에 결국 가장 적성에 잘 맞는 학과에 진학해서 지금은 그때보다 다양한 진로를 고민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10대 때의 많은 경험들 중에 그때의 경험이 없더라면 지금의 나는 달랐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때 간절함이 부족했다거나 더 노력할 수도 있었지 않아?라는 물음에는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답할 수 있지만 이미 지나온 길이 됐고 진지하게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재능에 영역에서 자기 객관화를 하는 과정은 굉장히 길었다. 지금도 중학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그때를 회상하며 웃곤 하는데 난 역시 "그때 포기한 게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다고 늘 말한다.
취업을 고민하는 이 시기에 그 경험을 떠올리면 많은 힘이 되곤 한다. 몸으로 직접 부딪혔던 기억, 재능의 한계를 느꼈던 기억들 말이다. 이직과 퇴사와 관련한 글들을 읽어보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의 선택의 딜레마가 늘 따라다닌다. 나 역시 얼마 안가 겪어야 할 경험일 것이고 그때가 오면 이 경험이 선택에 있어서 다시 한번 방향 추가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20. 0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