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멸망하고 소심한 사람들만 남았다 / 김이환 / ★★★☆
세상이 멸망한 것 같은데 나는 살아있다. 수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단다. 행정 기능은 마비되고 지역 곳곳의 삶의 영역들이 줄어들고 있다. 근데 나만 살아남은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소식을 올리는 게시판에 누군가
물었다 "소심한 사람만 세상에 남은 것 같지 않나요?" ,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소심한 사람은 수면 바이러스에 안 걸리나요? 소심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오고 있는 내가 서점 매대에서 이 책 표지를 봤을 때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나름 SF, 아포칼립스 장르를 좋아하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설정이 아닌가.
그럼에도 설정의 고증보다는 소심한 사람들만 남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지 더 궁금한 마음이 컸다. 저자의 장편소설 '절망의 구'를 군대에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에 구입까지 망설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MBTI가 지금보다 더 유행일 때 같은 MBTI만 살도록 하자는 우스갯소리를 친구한테 했었는데 나름 비슷한 느낌이었달까. 책은 소심한 사람들이 아포칼립스에서 어떻게 생존해 가는지를 그려낸다. 소심한 사람의 정의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대부분 소심한 사람이라면 공감했을 부분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습관적으로 말 끝을 흐리거나 밥 메뉴 정하는 게 너무 어려워 정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어떤 메뉴든 아무거나 괜찮다는 대답과 얼굴 보고 하는 대화보다 문자로 말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 말 실수 하진 않았나 고민하는 일상과 열심히 돌고 돌아 등 떠밀려 뽑히는 리더의 자리까지.
아포칼립스라고 하면 생존을 위해 식량을 약탈하거나 폭력을 가진 자들이 그룹을 형성해 새로운 서열관계가 생기는 미래를 그리지만 이 소설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이 소설이 가장 판타지적인 이유는 수면 바이러스로 찾아온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라기보다 소심하면서 따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소심하다고 선한 것은 아니고 대담하다고 악한 것은 아니니까. 물론 내 경험이지만 소심하면서 따뜻한 사람이 후자보다는 더 많긴 했다(?) 특히, 소심한 성격을 감추고자 대담한 연기를 하는 인물을 보고는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나도 저런 노력을 필요에 의해 하긴 하니까. 뭔가 그 마음을 아주 잘 알 것 같아서 말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오면서 소심한 성격은 늘 불리한 위치에 있고, 고치는 것이 사회생활을 위해, 커리어를 위해 대담함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을 많이 듣고 자라왔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소심함과 대담함에 대한 우열관계를 부정해 주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됐다. 소심함으로 무장해 온 생애를 돌어보면 소심한 성격이 참 먼 길을 돌아가게 했던 것 같은데 가끔은 그 길이 내게 오히려 선한 영향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의 인상 깊은 구절을 빌리며 뭐라고 써 내려갔는지 모를 서평을 마무리해야겠다. "나는 정말 소심해서 탈이었다."